132화 선택의 분기점
필웅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키 작은 저승사자를 내려다 보았다.
“할 일이라뇨? 전 죽은 것 아닙니까?”
“아닐 수도 있다고 했잖아.”
필웅이 답답하다는 듯이 발을 구르며 그를 재촉했다.
“그러니까, 그게 다 무슨 소리냐구요.”
은전차사는 어느새 손에 들고 있는 은방울을 들어 올렸다.
“은방울을 울렸더군.”
필웅이 쓰러지던 순간 들은 은방울 소리는 착각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가 쓰러지면서 자기도 모르게 주머니 속의 은방울에 손을 뻗어 그것을 흔든 것 같았다.
필웅이 힘이 탁 빠지는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좀더 일찍 울릴 걸 그랬군요.”
“응? 왜?”
“그러면 절 구하러 좀 더 일찍 왔을 것 아닙니까.”
은전차사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하인 부르는 호출벨인 줄 알아? 날 아무 때나 불러내서는 총알이라도 막아달라고 부탁하려고 했나?”
“원래 그런 용도 아닙니까?”
“아니야!”
은전차사가 역정을 냈다.
필웅은 자기도 모르게 이 상황이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상황이지만, 모두가 멈춰 서 있는 이 세계에서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대화가 저승사자와의 대화라니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그의 표정을 보더니 은전차사가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뭐가 웃겨?”
“웃길 리가요. 그냥… 처음 나영전으로 죽었을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생각해 보니 너무 황당한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는 생각이 드네요. 저승사자를 보고도 이렇게 침착할 수 있다니.”
필웅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그래, 이상하게 침착해 보이기는 하는구나.”
필웅은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렇게 보입니까?”
은전차사가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필웅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은 마치 눈 앞의 모든 것을 불태워버리기도 할 듯 활활 불타고 있었다.
“저는 화가 납니다.”
은전차사가 눈 앞에 투지를 불태우고 있는 사람을 둔 사람치고는 평온한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무엇이?”
필웅이 휙 서춘주를 돌아보았다.
“죄를 지은 자가 벌을 받지 않는 게 화가 납니다.”
그리고 필웅은 시연과 장경을 차례로 돌아보았다.
“그리고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이 고통 받아야 하는 것도 화가 나구요.”
마지막으로 필웅은 조용히 은전차사를 바라보았다. 아니, 노려보았다고 하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이었다.
“정말로 하늘에서 우리를 지켜 보고 있는 존재가 있다면, 이런 부조리가 판을 치게 방치하고 있다는 게 가장 화가 납니다!”
필웅이 은전차사에게 거침없이 걸어갔다.
“대체 왜 그러는 겁니까? 하늘에는 법이라는 게 없습니까? 당신들에 비하면 한없이 미미하고 한없이 연약한 인간들도, 죄를 지은 자들을 벌하기 위해 비록 어설프지만 법이라는 걸 만들어서 단죄를 하고 있잖아요. 하지만 보십시오!”
필웅이 극적으로 팔을 열어 서춘주를 가리켰다.
“우리의 힘에는 한계가 있단 말입니다! 하지만 당신들은 그렇지 않잖아요. 당신들은 이 모든 걸 바꿀 힘이 있잖아요! 왜 이 지상에 이런 지옥도가 끝없이 반복되도록 방치하는 거죠? 우리는 당신들의 실험쥐 같은 겁니까?”
도전적인 필웅의 힐난에, 은전차사는 화를 낼 법도 했지만 평소의 그답지 않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필웅은 그런 점이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뭔가 변명이라도 해 봐요! 이 모든 지랄에 적어도 이유 같은 게 있다고 설명이라도 시도해 보라구요!”
“나는 시도하지 않겠다.”
은전차사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대답은 필웅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왜요!?”
은전차사는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말했다.
“인간아. 너는 네가 과거로 돌아가게 된 게 어째서라고 생각하지?”
필웅이 갑작스러운 그의 질문에 즉시 대답하지 못하고 있다가 말했다.
“당신의 실수 때문이지 않습니까”
“실수라.”
은전차사는 조용히 시연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필웅이 처음에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시연은 총을 맞은 필웅의 몸을 감싸안고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필웅은 그제서야 자신이 영혼의 상태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생각은 안 해봤나? 사실 이 모든 게 실수가 아니었다고 말이야.”
필웅이 미간을 찌푸렸다.
“실수가 아니라니요?”
은전차사가 미소를 머금었다. 필웅은 그의 표정을 보고, 처음으로 그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의 세월을 살아온 초인간적 존재라는 것을 자각했다.
‘이렇게 위엄 있는 얼굴이었나?’
“네가 말했듯이 저승의 법도는 살피지 못하는 바가 없고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다. 나영전이 죽고, 필웅으로서 다시 태어나게 한 것은 우리로서는 하나의 실험이었다.”
“실험… 이라고요?”
점점 알아들을 수 없는 은전차사의 말에 필웅은 그 자리에 굳어 섰다.
“우리는 악한 자들을 끊임없이 지옥으로 던져 넣는 데 조금 환멸이 난 참이었다. 그런데 만일 악한 중 누군가에게 시련을 주어 새 사람으로 만들어갈 수 있다면? 저승은 조금 더 괜찮은 곳이 되지 않을까? 라는 게 우리의 처음 의도였지.”
“그리고 나영전이 그 악한이었다는 말입니까?”
“그렇다. 그리고 처음 조필웅으로 환생했을 때 네 모습도 우리를 많이 실망시키긴 했지.”
필웅은 이미 지난 일이지만 왠지 창피스러움을 느꼈다.
처음 조필웅으로 태어나서 처음 생각한 것들이라고는 어떻게 이규필의 눈에 띄어 출세를 할 수 있을지, 어떻게 적당히 일을 대강 처리할 수 있을지 따위의 것들이었다.
그런 것들을 전지전능한 누군가가 하나하나 보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필웅은 마음 한구석에 뜨끔함을 느꼈다.
“그렇지만 우리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네가 다시 나영전으로 돌아와 살 수 있음에도 조필웅으로 환생하는 것을 선택했을 때, 우리는 우리의 선택이 옳았음을 깨달았지. 이제 너는 나영전보다는 조필웅 그 자체로 보이는구나.”
필웅은 쑥스러워해야 할지 자랑스러워해야 할지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그럼… 나영전이 죽은 것도 다 계획이었단 말입니까?”
“네가 죽은 것 자체는 계획에 없었다. 그저 우리가 계획을 세우고 있었을 때 우연히 너의 죽음이 이뤄졌을 뿐이고, 우리는 네가 적임자라고 판단했을 뿐이지.”
필웅은 갑자기 폭포처럼 쏟아져 내린 정보의 홍수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가 간신히 물었다.
“그럼… 크리미널 아카이브도도 모두?”
“크리미널 아카이브? 아, 조요경을 말하는 건가? 네 눈에 보이는 것은 조요경이라는 보패의 효과다. 사람의 어두운 면을 끌어내서 보여주는 보패이지.”
“보패… 라고요?”
“저승의 보물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돼. 보패는 너의 영혼에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따로 무언가를 들고 다니지 않아도 그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너를 이 실험에 끌어들인 대가로 주어진 작은 선물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제가 이걸 나쁜 일에라도 사용했으면 어떻게 하려고 했습니까?”
“아쉬운 마음으로 실험 종료를 선언했겠지.”
필웅은 납득할 수 없었고, 당연한 분노를 느꼈다.
“이제까지 그 고생을 한 게… 단지 당신들의 실험을 위해서 였다구요?”
은전차사는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의 실험으로 인해 너의 삶이 더 나빠진 것은 아니지 않느냐? 말했듯이, 나영전은 원래 그대로 죽을 운명이었다.”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그래서.”
은전차사가 부채를 들어 조용히 필웅을 가리켰다.
“너의 분노가 합당한 것이라고 치자. 너의 선택은 무엇이냐?”
“제 선택이라구요?”
“그렇다. 너의 선택.”
은전차사는 멈춰 서있는 시연과 서춘주의 사이에 가서 섰다.
“너는 이 실험의 부당함을 외치며 당장 이 모든 것을 끝내 줄 것을 요구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필웅으로서의 너도 죽고, 너는 바로 저승으로 올라갈 것이다. 너의 수고에 감사하기 위해, 저승에는 네게 좋은 자리를 마련해 두도록 하지.
혹은, 여기에 남아 이 상황을 바꾸기 위해 노력할 수도 있다. 너는 계속해서 이 세상의 오물 속에서 구르며 때로는 잘못된 선택을 하고, 때로는 상처를 받으며 다른 인간처럼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참고로, 당연히 2020년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
“왜 나입니까.”
필웅이 주먹을 부르르 떨며 외쳤다.
“왜 나만 이런 선택을 해야 하는 겁니까!? 내가 선택을 한다면, 정말 이 실험이 끝이 나기는 하는 겁니까?”
은전차사가 부채를 들어 얼굴을 가렸다.
그가 지금 웃고 있을지, 슬퍼하고 있을지, 분노하고 있을지, 그의 표정이 대체 어떤지 필웅은 알 수 없었다.
“한 가지는 확실히 말해 주지. 이 시점을 끝으로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 우리는 네게 더 이상 관여하지 않겠다.”
필웅은 묵묵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은전차사는 필웅이 생각에 잠긴 모양을 살펴보다가 지나가듯 툭 내뱉었다.
“네가 여기에서 그만둔다고 해도 누구도 뭐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네가 원해서 살게 된 삶도 아니었고, 설령 여기에서 누군가가 더 다치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네 잘못이 아닌 원래 그렇게 되기로 한 운명일 뿐이다. 정시연이 원래 죽을 운명이었다는 것은 너도 잘 알고 있겠지.”
필웅도 물론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돌아오지 않았다면 정시연은 어차피 죽을 운명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가 돌아온 지금 이 순간에도 정시연은 죽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의 선택 여하에 따라.
필웅은 고개를 떨구었다.
사실 어려울 것도 없는 선택이었다.
“여기에 남겠습니다.”
“확실해?”
“지금보다 더 확신을 느껴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은전차사는 부채를 스륵 밑으로 내려 치웠다.
필웅은 그렇게 드러난 그의 표정을 보고는 의아한 기분이 되었다.
“왜 웃습니까?”
은전차사는 굳이 미소를 감추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아무것도 아니다.”
필웅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은전차사가 부채를 든 손을 천천히 휘저으며 말했다.
“그저… 기쁘구나. 자기 자신 외에는 관심이 없던 나영전이라는 인간이, 이렇게 변화한 모습을 보게 된 것이.”
필웅은 미처 입을 열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무언가 세상이 흔들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자, 이제 돌아가거라.”
은전차사가 예전 그랬던 것처럼 필웅에게 천천히 다가와 그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네가 이 세상에서 배운 것들을, 계속해서 우리에게도 보여다오.”
은전차사가 가볍게 그의 가슴을 밀자, 익숙하게 텅 하고 밀리는 느낌과 함께 필웅은 어딘가로 아득히 떨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혼란스러운 정신 가운데 꿈결같이 은전차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요경의 진정한 힘을 알려 주겠다. 조요경은…”
필웅은 아득해지는 정신 가운데서도 은전차사의 낭랑한 목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 * *
서춘주는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방아쇠에 올려 둔 집게손가락을 당기기 시작했다.
그 순간이었다.
번쩍 뜨여진 필웅의 눈에 푸른 불꽃 같은 것이 일렁였다.
그러자 이를 드러내며 웃던 서춘주의 얼굴에, 일말의 당황한 기색이 어리기 시작했다.
“어, 이건 무슨…?”
서춘주는 자신의 크리미널 아카이브를 목격하고 있었다.
그가 저지른 수많은 죄의 결과들. 수많은 혼란들. 그가 받게 될 처벌들.
갑자기 그 모든 것들이 그의 머릿속으로 밀려 들어왔다.
“아니, 이건…”
그가 죄책감을 느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가 저지른 죄의 실상들이 그가 한순간에 받아들이기 어려울 만큼 방대한 양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뇌는 갑작스러운 정보의 홍수를 유연하게 받아들이도록 설계되어 있지 않다.
“으…어어…”
서춘주가 괴이한 신음을 흘리며 총을 놓쳤다.
필웅은 재빨리 다가가 총을 집어 들었다.
서춘주가 혼란이 가득 담긴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건 대체?”
필웅은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필웅이 쓰러진 그의 눈높이에 맞춰 무릎을 꿇을 때까지도 서춘주는 여전히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벌벌 떨고만 있었다.
필웅은 권총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번개같이 손을 놀려 권총의 손잡이 부분으로 서춘주의 뒷목을 강타했다.
풀썩 쓰러진 서춘주를, 필웅은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