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죽음의 순간 그리고 죽는 장면
김영지가 조용히 그를 노려보았다.
“무슨 뜻이지?”
필웅이 거칠게 외쳤다.
“당신 같은 사람들은 법이 향해 가는 곳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자경단 행세를 하고, 왜 나는 잘못한 게 없는데 법은 내 편을 들어주지 않느냐며 징징거리기나 하죠.
법은 당신이 편할 때는 찾고 불편할 때는 무시해 버릴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내가 언제 그렇게 편한 대로…!”
“그렇지 않습니까? 당신이 최고원로 자리에 있었을 때는 온갖 위법한 짓을 하고 다니지 않았나요? 법을 무시하고, 법을 농락하면서 교주를 보필하던 당신이, 이제 와서 법은 하는 게 없다고 투덜대는 게 우습지 않습니까?”
“그건…!”
필웅은 그에게 뚜벅뚜벅 다가갔다.
김영지는 자기도 모르게 주춤거리며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섰다.
“그리고 그 이유라는 것도 그렇죠. 물론 당신이 아들을 잃은 심정을 저도 십분 이해할 수 있다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제삼자로서는 차마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슬픈 일이죠.
하지만 당신이 아들을 잃기 전까지, 온 세상에 억울한 사람들의 죽음과 피해에 대해서 신경이나 썼습니까? 당신은 파렴치한입니다. 이제까지 당신이 직접 피해를 주고, 그 더러운 사이비 종교에 끌어들일 때는 모른 척했다가, 이제 와서는 스스로 피해자라고 울부짖고 있군요. 법이 우리를 위해서 뭘 해줬느냐면서 말이죠.”
필웅이 고개를 좌우로 힘차게 저었다.
“전 지겹습니다. 평소에는 법이 있는지도 모르는 것처럼 행동하면서, 정작 자기가 아쉬울 때는 법이 하는 게 없다느니, 법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느니 하는 행태가요.”
“말 돌리지 마! 너도 속으로는 인정하고 있잖아! 좋아, 내가 하기에 적절하지는 않은 말일 수도 있어. 하지만 네가 내 입장에 있다고 생각해 봐.”
김영지가 거칠게 숨을 들이쉬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너는 평소에 법 없이도 살 사람처럼 올바르게 살아왔겠지. 하지만 그래, 내가 지금 저기 누워 있는 정 검사를 죽인다면 어떨까?!”
필웅이 흠칫 놀라 그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필웅으로부터 시연까지의 거리와 김영지로부터 시연까지의 거리는 비슷했다.
동요하는 필웅을 바라보다가, 김영지가 그것 보라는 듯 미소를 띄웠다.
“내가 정시연을 죽인다고 치지. 그러면 너는 나를 재판정에 세울 건가? 아니지, 당장 내 손의 칼을 빼앗아 나를 죽이고 싶겠지. 인정해. 그게 결국 내가 말하고 싶은 점이야. 가장 쉬운 해결 방법은, 가장 직관적인 해결 방법이야. 재판이라는 건 결국 힘이 없어서 스스로 복수를 이루지 못하는 약자의 선택일 뿐이야.”
필웅은 슬금슬금 시연 쪽으로 몸을 움직이면서도 그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다고?”
필웅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저도 당신처럼 생각했던 적이 있었죠.”
필웅은 나영전으로서 살던 시절의 기억을 떠올렸다.
“법은 그저 내가 편할 때만 있어 주면 되고, 필요 없을 땐 어딘가에 처박아 버리는 도구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필요할 땐 더할 나위 없는 무기지만, 동시에 내 무기를 쓸모없게 만드는 거추장스러운 절차라는 게 법이니까요.”
“그래, 내 말이 바로….”
김영지는 자신의 이야기에 빠져 필웅이 어느새 시연을 그의 시야로부터 차단할 수 있는 지점까지 움직인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끝까지 들으세요. 하지만 제가 틀렸습니다. 법은 그냥 나 혼자 쓰고 버리는 도구가 아니에요. 지금 당장은 법에 의한 심판의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나 혼자 심판하고 결정한다면 물론 편하기는 하겠죠. 그러나 내 독단에 빠진 선택은 때론 틀릴 수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법정에는 검사 한 명만 있는 게 아니라 변호인도 있고, 판사도 있고, 피고인도 있고, 증인도 있는 거죠.
그 모든 이들이 함께 선택한 결과를 존중하는 것, 나는 그것이 ‘법’이라는 약속의 핵심이라고 믿습니다.
아무도 보지 못하는 폐건물 속에 몰래 숨어서 나 혼자 결정을 내리는 게 아니라요!”
김영지는 말이 없었다.
필웅은 등 뒤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며, 조용히 그를 응시했다.
김영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두 손을 들어 보였다.
“그래….”
김영지가 갑자기 어디선가 권총을 꺼내 들었다.
필웅이 핏발 선 눈으로 쓰러져 있는 장경의 허리춤을 돌아보았다.
아까 장경을 습격할 때 어느샌가 훔쳐 둔 모양이었다.
“이봐, 당신…!”
“어쨌든 너는 그 네 잘난 정의에 갇혀서 진짜 정의를 실현할 마음이 없다는 거로군. 잘 알았다. 나는 다른 놈들과 함께하는 결정 따윈 믿지 않아. 이게 내 심판의 결과다.”
김영지가 안전장치를 풀고 권총을 들어 올려 하늘을 향해 발사했다.
-탕!
그의 갑작스런 발포에 필웅은 놀라 시연을 몸으로 감싸 안았다.
김영지는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하는 총구를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씨익 웃었다.
“왜 그, 경찰들 총의 첫발은 공포탄이라고 하더군. 쐈는데 공포탄이어서 살아났다. 이런 전개는 너무 뻔하잖아.”
김영지가 서서히 총구를 들어 올려 서춘주를 가리켰다.
김영지가 필웅을 돌아보며 짓궂게 웃었다.
“왜, 너를 쏠 줄 알았나? 맞아, 너는 잘못한 게 없어. 내가 심판하고 싶은 건 죄를 짓고도 마땅한 벌을 받지 않은 자들 뿐이지. 내가 말했듯이 나는 내 정의를 실천하고 싶을 뿐이야. 너에게는 볼일 없어.”
그때, 기절한 줄 알았던 서춘주가 갑자기 번개같이 몸을 일으키며 두 손으로 김영지의 총을 쥔 손을 두 손으로 잡았다.
“이 새끼, 안 놔?!”
그러나 예상외의 습격에 당황한 김영지는 쉽게 서춘주를 떨쳐내지 못했고, 서춘주는 그대로 비대한 몸을 김영지에게 덮쳐 가며 쓰러졌다.
-콰당탕!
“으악!”
“총 이리 내놔!”
“놔, 이 새끼야!”
김영지가 간신히 손을 들어 서춘주를 다시 겨누었지만, 서춘주가 총을 쥔 그의 손을 강하게 깨물었다. 김영지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총을 놓쳤다.
당장이라도 누군가가 총을 오발할 수 있을 것 같은 아비규환 같은 상황에, 필웅은 섣불리 다가가지 못하고 시연을 끌어안고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으음…?”
총소리 때문인지 두 남자가 거칠게 싸우는 소리 때문인지, 시연이 정신을 차린 듯 가늘은 신음을 흘렸다.
“시연아, 정신이 들어?”
그 순간, 서춘주가 김영지가 떨어트린 총을 잽싸게 주워들었다.
-탕!
거대한 총성과 함께, 곧바로 어울리지 않는 정적이 찾아들었다.
시연과 필웅은 놀란 눈으로 총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누군가의 피가 진하게 바닥을 적셔가고 있었다.
‘누가 총을 맞은 거지?’
잠시 후, 서춘주는 피투성이가 된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아마도 김영지의 피인 듯한 핏물을 온 몸에 뒤집어 쓴 채 악귀 같은 모습이었다.
“흐흐… 그래요.”
서춘주가 피가 진득하게 흘러내리고 있는 권총을 들어 쓰러져 있는 김영지에게 다시 한 번 쏘았다.
-탕!
“크윽!”
일부러 빗맞힌 듯 김영지의 팔 쪽에서 피가 튀었다. 그러나 이미 총을 두 번 맞은 김영지의 출혈 상태는 이미 심각했다.
서춘주는 권총을 서서히 들어 올렸다.
“감동적인 연설, 잘 들었습니다. 법이라는 거, 이렇게 편리할 줄 몰랐군요. 법의 보호를 받는다는 건 이런 기분인 건가.”
필웅이 이를 갈며 그를 쏘아보았다.
“서춘주, 멍청한 짓 하지 말고 총 내려놔. 지금 총 내려놓으면 정상참작해 줄 수도 있어.”
“정상참작이요? 흐… 흐… 하하하하!!”
서춘주가 뭐가 웃긴지 그 이야기에 한참을 웃어대기 시작했다.
잠시 후, 비로소 웃음을 그친 그가 어찌나 웃었는지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며 말했다.
“이봐요, 조 검사님. 용서니 정상참작이니 하는 건 힘이 있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겁니다. 지금 이 ‘법정’에서 누가 재판권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죠?
당신들은 피고인일 뿐입니다. 재판은 제가 해요.”
“정신 차려! 설마 여기서 우릴 죽이고 쉽게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아? 여긴 한국이야! 네가 도망칠 곳이라고는 북한이나 바다밖에 없어!”
“그 정도면 충분하죠. 최후 변론은 끝났습니까? 안 그래도 처리할 예정인 분들이었는데, 이렇게 기회를 잡게 되네요.
사실 처음부터 처리해 버렸어야 했어요. 애초에 당신들을 회유해 보라는 쓸데없는 지시만 받지 않았어도…”
필웅은 그를 노려보며 시연을 감싸 안았다.
‘여기서 끝인 건가.’
사이비 종교를 파헤치던 검사와 형사, 재개발구역에서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되다.
필웅의 머릿속에 불길한 제목의 헤드라인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필웅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흔들었다.
‘조금만, 조금만 가까이 와라!’
이미 서춘주는 부주의하게 그들에게 상당히 가까이 다가온 상태였다.
조금만 가까이 오면, 한 발 내디뎌서 그를 덮칠 수 있을 것 같았다. 필웅은 조마조마하게 그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어차피 환생한 지금 죽음 따위 두렵지 않았다.
조금씩 다가오던 서춘주가, 징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우뚝 멈춰 섰다.
“다가가면 나에게 태클이라도 할 셈이었겠죠?”
‘개자식, 이미 다 알고 있으면서 갖고 놀고 있었군.’
필웅은 이를 갈았다.
서춘주에게서 나타난 크리미널 아카이브가 그 어느 때보다 명확해졌다.
<정시연 검사, 한강변에서 변사체로 발견되다>
<정시연 검사가 어떻게 해당 현장에서 사고를 당했는지는 원인불명인 것으로 밝혀져…>
필웅이 본 원래의 미래에서 시연의 사인은 분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필웅의 경험에 의하면 필웅이 미래에서 ‘보았던’ 과거들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흘러가는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필웅이 잡아 넣은 대부분의 범죄자들은 미래 시점에서는 처벌을 받지 않았거나 가벼운 형만 받고 풀려나와 활개를 치고 있었지만, 필웅이 과거로 돌아와 개입을 한 이후에는 그렇지 않았다.
어쨌든 서춘주가 시연의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는 점은 분명했다.
‘내가 막아야 해!’
필웅은 이를 사려물고 서춘주를 노려보았다.
그때 바지 주머니에서 무언가 이물감이 느껴졌다.
필웅은 그게 뭔가 하고 생각해 보다가, 예전 은전차사가 줬던 은방울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하나가 남아 있었지.’
필웅은 자기도 모르게 주머니에 겉으로 잡히는 은방울의 표면에 손을 갖다댔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서춘주는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방아쇠에 올려 둔 집게손가락을 당기기 시작했다.
“안 돼!”
그때, 필웅은 시간이 여러 개의 프레임으로 분할되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안 돼! 라고 외친 것이 자신인지, 시연인지도 생각나지 않았다.
마치 여러 개의 장면으로 이루어진 오래된 필름 같이, 시간이 흘러갔다.
장면 1. 필웅이 시연을 거칠게 옆으로 밀어낸다.
장면 2. 총구가 불을 뿜는다.
장면 3. 날아온 총알이 필웅의 몸을 꿰뚫는다.
장면 4. 붉은 꽃처럼 선혈이 튀어오른다.
장면 5. 필웅이 힘없이 쓰러진다.
거칠게 무너지던 필웅은 어디선가 은방울이 울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안 돼!!!”
눈앞의 광경에 시연이 비명을 질렀다.
* * *
필웅은 눈을 떴다.
필웅은 시간이 멈춰 버린 것 같다고 생각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자신이 총에 맞는 순간 그대로였다.
야비하게 웃고 있는 서춘주의 얼굴, 총연이 피어오르는 총구, 놀라 절규하는 시연의 표정까지 모두 생생했다.
‘그래… 이걸로 된 거야.’
필웅은 씁쓸하게 자신의 몸을 내려다 보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상처가 보이지 않았다.
필웅은 놀라 이리저리 자신의 몸을 살펴 보았다. 어디에도 총상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시간이 멈춰 버린 것 ‘같다’고 느꼈던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필웅 외에는 아무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정신이 드나?”
갑자기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오자 필웅은 놀라 그 쪽을 쳐다보았다.
은전차사였다.
“여긴 웬일이죠?”
“일이 있으니까 왔지.”
“저를 데리러 온 겁니까?”
은전차사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흐응 하는 콧소리를 내더니 필웅의 앞에서 터벅터벅 맴돌았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대체 무슨 소립니까?”
“조필웅.”
은전차사가 자리에 멈춰서서 꼿꼿이 허리를 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지금부터 네가 할 일을 알려 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