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불길한 예감 속으로
필웅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일전에도 한 번 정직을 당한 적은 있었지만 무기한 정직은 아니었고, 때마침 강유라의 도움이 있었기에 정직에서 풀려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황이 전혀 달랐다.
게다가 당시에는 징계사유도 명확하지 않았기에 그 징계로 인해 그의 위신이 떨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후배 검사들 중에서는 재벌과 맞서다가 부당하게 징계를 받았다고 해서 은근히 그를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만일 함정수사로 야비하게 범인을 잡았다는 소문이라도 돌면, 안 그래도 설 자리가 없는 이 검찰조직에서 완전히 코너로 몰리게 될 것이었다.
‘이번에 정직당하면 돌이킬 수 없을지도 몰라.’
필웅의 꾹 쥔 주먹에서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짐짓 당당한 척 하고 있었지만, 필웅으로서는 긴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저는…”
그때, 문이 벌컥하고 열렸다.
모두의 시선이 열린 문으로 쏠렸다.
시연이었다.
“잠깐만요!”
이 차장과 다른 두 명의 부장검사가 처음에는 놀란 눈빛으로, 그 다음에는 화난 눈빛으로 시연을 노려보았다.
“정 검사? 지금 이게 무슨 짓인가!”
시연은 들어와 씩씩거리다가 잠시 숨을 고르고 외쳤다.
“이런 갑작스러운 징계가 어디 있습니까!”
이 차장이 혀를 차며 말했다.
“정 검사. 지금 자네 꼴이 어떤지 알고 있나? 정신 차려! 이건 회식 자리가 아니라 징계위원회야!”
“하지만, 하지만 조 검사에게 방어권을 행사할 기회도 주지 않으셨잖아요!”
그때, 필웅의 머리에 번뜩하고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검찰 징계규정상 징계위원회의 의결이 이렇게 빨리 이뤄질 수 있습니까?”
이 차장의 눈썹이 순간 치켜 올라갔다.
“뭐라고?”
“징계규정상 징계위원회는 당사자에게 통보 후 3일 후에 열리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이 징계위원회 자체가 규정 위반입니다!”
필웅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며 강하게 외쳤다.
부장검사 한 명이 옆의 부장검사와 수근거리더니, 잠시 자리를 떠나 밖으로 사라졌다. 아무래도 내부 규정을 확인하러 간 듯했다.
잠시 후, 부장검사는 돌아와 이 차장에게 무언가를 속삭였다.
이 차장의 얼굴에 언짢은 기색이 떠올랐다.
이규필 차장이 억지로 입을 열어 말했다.
“겨우 절차상의 하자로 인해 징계위원회를 취소할 수는 없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함정수사 역시 절차상의 하자이니 체포가 불법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겁니까?”
필웅의 항변에, 이 차장은 잠시 한입에 개구리를 집어삼키고 싶지만 개구리가 물속에 있어 아쉬워 죽겠다는 뱀 같은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음…”
이 차장이 서류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좋네. 3일의 시간 여유를 주지. 징계위원회는 그때 열릴 거야.”
“감사합니다.”
필웅은 이 차장의 말이 뭔가 더 이어지기도 전에 시연을 데리고 서둘러 징계위원회가 열린 회의실 문을 열고 나갔다.
“어쩌자고 갑자기 이렇게 들이닥친 거야?”
“아니, 말이 안 되잖아.”
필웅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두르고는 한숨을 쉬었다.
“뭐, 어쨌든 네 덕분에 징계규정이 떠오른 거니까. 고마워.”
“별 말씀을.”
“하지만 아직 불은 꺼지지 않았어. 3일 후에는 어쨌든 징계위원회에 출석해야 해. 이 차장은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 징계를 내리려고 하겠지.”
시연의 얼굴에 다시 불안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럼 어떡하지?”
필웅은 한숨을 쉬고 대답했다.
“일단 그것보다, 서춘주를 누군가가 습격했는데, 그게 김영지인 것 같아.”
“뭐? 김영지 씨가? 서춘주는 지금 어딨어?”
“경찰서에 잠시 잡아두려고 했는데 김영지가 납치해간 것 같아. 지금 이럴 시간이 없어. 일단 박 형사님한테 연락해 보자.”
시연과 필웅은 시연의 사무실로 가서 장경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사님? CCTV에 뭔가 잡혔습니까?”
“예, CCTV에 누군가가 서춘주를 뒤에서 밀면서 나가는 모습이 잡혔슴다!”
“어디로 향하는 것 같던가요?”
“입구에서 택시를 잡은 것 같은데… 차량 번호를 한번 추적해 보겠습니다.”
“예, 제가 곧 그리로 갈게요.”
필웅이 전화기를 내려놓고 외투를 챙겨 들었다.
“시연아, 갔다 올게.”
“응? 무슨 소리야? 나도 갈 건데?”
“뭐?”
시연이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갈 거라고. 어차피 내가 여기에 남아 할 수 있는 일도 없잖아?”
“그렇긴 하지만…”
필웅은 왠지 김영지를 추적하러 가는 길에 시연을 데려가고 싶지 않았다.
어쨌든 시연의 죽음은 피해야 했다. 위험한 장소에서는 최대한 멀찍히 떨어트려 놓고 싶은 것이 필웅의 심정이었다.
“위험하지 않을까?”
“너는 괜찮고?”
시연의 반응에 필웅은 두 손을 들어보였다.
‘어쩌면 차라리 내 시야가 닿는 곳에 시연이를 계속 두는 게 더 안전할지도 몰라.’
“좋아, 함께 가자.”
* * *
“시내의 재개발 중인 구역으로 들어간 것 같슴다.”
택시의 차량번호를 조회해 행선지를 알아낸 장경이 말했다.
“어디죠?”
“예전 검사님이 사시던 동네네요. 여기임다.”
장경이 교통지도에서 손으로 가리킨 곳은 한창 재개발이 진행 중인 필웅이 예전 살던 지역이었다.
장경과 필웅, 시연은 차를 타고 이동 중이었다.
지체할 틈이 없기에 시연과 필웅은 경찰서에 도착해 바로 장경을 찾았고, 장경은 CCTV를 통해 확보한 이동경로를 보여 주었다.
조수석에 탄 필웅은 힐끗 뒷좌석에 앉은 시연을 돌아보았다. 시연은 피곤했는지 등받이에 기대 졸고 있었다. 필웅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형사님.”
“예?”
“혹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시연이를 잘 부탁합니다.”
“허헛, 정 검사님이야 워낙에 운동으로 단련된 몸 아닙니까? 검사님 안전을 챙기셔야죠.”
농담을 건네던 장경은 필웅의 진지한 표정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뭔가 걱정되는 게 있으십니까?”
“그렇다기보단… 그냥. 예감이 좋지 않아요.”
“걱정 마십쇼. 정 검사님은 제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드리겠슴다.”
필웅은 조금 안심했지만, 장경에게만 맡길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장경은 곧 차를 세웠다.
재개발이 시작된 도심 구역은 스산했다.
이미 철거가 상당 부분 진행되고 있었고, 사람들은 모두 떠난 후였다.
낮에 작업을 하던 건설장비들도 을씨년스럽게 풍경의 일부를 이루고 있었다.
어느새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장경과 필웅, 시연은 일단 내려서 주위를 둘러 보았다.
사방은 깜깜했고, 인기척도 보이지 않았다.
필웅은 정신을 집중하고, 크리미널 아카이브가 나타나는지 주위를 둘러 보았다.
그때, 저 멀리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서춘주의 크리미널 아카이브였다.
멀리 있어서 내용은 읽을 수 없었지만, 평소 그랬던 것처럼 어두운 밤 중에도 확실하게 보이는 표식이었다.
“저 쪽입니다.”
“예? 어디요?”
장경이 눈썹 위에 손을 가져다 대고 필웅이 가리키는 곳을 뚫어지게 노려보았지만, 그의 눈에는 당연히 아무 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요?”
“아무튼 뭔가 인기척이 느껴졌습니다. 저리로 가시죠.”
필웅이 독촉하자 장경과 시연은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어쩔 수 없이 그의 뒤를 쫓았다.
언덕은 예전 필웅이 살던 시절과 비슷하게 계속해서 이어졌다. 언덕을 파내리는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기에 여기저기 구덩이도 눈에 띄었다.
세 사람은 구덩이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언덕을 올랐다.
서춘주의 크리미널 아카이브가 점점 가까워졌다. 한 폐건물 안이었다.
필웅은 조심스럽게 건물로 다가가 안쪽을 살펴보았다.
“읍, 읍!”
누군가가 입이 틀어막힌 듯한 소리를 내었다.
장경과 필웅은 서로를 마주보았다.
“서춘주겠죠?”
“그럴 겁니다.”
세 사람은 눈에 띄지 않도록 몸을 숙인 채 빙 돌아 건물의 후문으로 이동했다.
필웅이 살짝 문을 열었다. 끼익 하는 녹슨 철문 특유의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안에 들어오자, 목소리가 더 가깝게 들렸다.
“으으읍!”
건물의 2층인 모양이었다. 시연이 주위를 둘러 보다가 낡은 계단을 발견했다. 세 사람은 계단 쪽으로 이동해 천천히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은 이미 내부 철거가 마무리되어 내벽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게 앙상한 구조물 한가운데에, 누군가가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다.
서춘주였다.
필웅이 그에게 다가가려는 순간이었다.
“억!”
뒤에서 누군가가 장경을 습격해 쓰러뜨렸다.
시연이 재빨리 그를 제압하려고 했지만, 그는 어느새 시연의 등 뒤로 돌아가 시연의 목덜미 부근을 가격했다.
시연은 소리없이 쓰러졌다.
눈 깜짝할 새 벌어진 상황에 필웅은 놀라 습격을 해 온 사람의 얼굴을 그제야 마주보았다.
“조 검사, 오랜만이군.”
김영지가 이를 드러내며 미소를 지었다.
“여긴… 무슨 일이죠?”
필웅이 아무 것도 모르는 척하면서 물었다. 그들 둘을 쫓아왔다고 할 경우 김영지의 경계심을 자극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봐, 서로 멍청이 취급하지는 말자고. 내가 서춘주를 이리로 끌고 와서 여기까지 쫓아온 것 아닌가.”
역시 김영지는 쉽게 넘어가 주지는 않았다. 필웅은 피식 미소를 지으며 짐짓 여유롭게 두 손을 펼쳐 보았다.
“이런, 이미 다 알고 계셨군요.”
“물론이지.”
김영지는 쓰러져 있는 장경과 시연을 내려다 보며 천천히 서춘주 쪽으로 다가갔다. 서춘주는 그가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벌벌 떨기 시작했다.
“저까지 눕혀 버릴 수 있었을텐데, 왜 전 남겨둔 겁니까?”
“응? 널 눕히면 무슨 의미가 있어? 난 네게 할 얘기가 있어서 여기까지 데리고 온 건데.”
김영지는 대답하고는 서춘주가 앉아 있는 의자를 돌려 필웅 쪽을 마주 보게 했다.
“읍! 으읍!”
“조용히 하라고 했을 텐데.”
김영지가 음산한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서춘주는 식은땀을 온 얼굴에서 흘리며 바로 입을 다물었다.
“자, 이게 다 뭔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필웅이 김영지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쨌든 김영지는 당장 필웅까지 이 건물의 잔해에다가 당장 파묻을 마음이 없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렇다면 뭔가 내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거겠지.’
김영지는 고개를 몇 번 갸웃거리더니 옆에서 먼지 쌓인 의자를 가져와 앉았다.
“자네도 앉지.”
“의자도 없고, 딱히 앉고 싶은 마음도 없군요.”
“그래? 그럼 서서 들어.”
김영지는 어느새 손에 들고 있는 날카로운 나이프를 들어 손톱을 다듬기 시작했다.
“나는 자네가 마음에 들어.”
필웅의 얼굴에 잠시 의문이 떠올랐다가, 이내 사라졌다.
“고맙군요.”
“천만에. 솔직히 말하면, 잘 될지 알 수 없었는데 이렇게 자네와 단 둘이 얘기를 나눌 기회가 생겨서 흡족하군.”
“잘 될지 모르다뇨?”
김영지가 손톱에서 신경을 거두면서 필웅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모르겠나?”
필웅은 팔짱을 끼고 그를 내려다 보았다.
“물론, 여기까지 저를 끌고 오기 위해서 상당히 귀찮은 계획을 세운 건 잘 알겠더군요.”
“그래? 어떻게 알았지?”
김영지는 놀랐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입은 재미있다는 듯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일단, 당신이 정말 서춘주를 죽이려고 했다면 지금 서춘주를 굳이 여기까지 끌고 온 건 말이 되지 않습니다. 경찰서에 잠입했을 때 죽이고 나오면 됐겠죠. 당신이라면 가능한 일이니까요.”
김영지가 두 손 다 들었다는 제스처를 취해 보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과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군. 계속해.”
“당신은 서춘주를 데리고 더 멀리 도망갈 수도 있음에도 오히려 서울시내 한복판으로 움직였습니다. 택시를 잡는 모습을 보니 딱히 행선지를 숨길 마음도 없어 보이더군요. 애초에 우리보고 따라오라고 메시지를 보낸 것 아닙니까?”
“맞아.”
“여기까지는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필웅이 팔짱을 풀고 그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이렇게까지 복잡하게 이런 상황을 만든 이유까지는 이해할 수가 없더군요.
김영지 씨, 당신은 대체 뭘 하고 싶은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