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함정수사의 이면
펜을 쥔 시연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어찌나 힘을 꽉 줘서 잡고 있는지 손이 다 하얘질 지경이었다.
시연은 펜을 부러트릴 듯 더 세게 움켜잡다가, 포기하고는 펜을 바닥에 집어 던졌다.
“젠장!”
시연은 방금 담당수사관으로부터 필웅이 내사과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시연은 이를 갈면서 사무실 문을 벌컥 열고 이규필 차장의 사무실 쪽을 노려보았다.
몇 시간 전.
이규필 차장이 시연을 방으로 따로 불러 그녀에게 시킨 일이란, 필웅을 감찰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시연은 거부했다.
“예? 왜 제가 그런 일을 해야 하죠? 아니, 애초에 조 검사가 뭘 잘못했는데요?”
이 차장이 격하게 반응하는 그녀의 모습을 쳐다보다가, 재미있다는 듯이 슬금슬금 웃으며 되물었다.
“잘 알텐데?”
시연은 화가 끓어오르는 것을 참으며 간신히 대답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애초에 최근에 조 검사가 한 일이라곤 현지 경찰들과도 연계해서 사람들을 노예로 부리던 조직을 소탕하고, ‘범죄단체’의 간부들을 잡아들인 일뿐이에요. 대체 그 과정에서 어떤 부분이 감찰 대상이 된다는 건지 잘 모르겠는데요.”
시연이 도발적으로 대답하자, 이규필 차장은 오묘한 미소를 지으며 찻잔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
시연이 뭐라 말을 하려 하는 순간, 이규필 차장이 천천히 문밖의 누군가를 불렀다.
“들어오게.”
그러자 필웅과 시연의 선배인 유 검사가 조용히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소심하고 유약한 성격의 유 검사는, 필웅과 시연이 남부지검을 떠난 사이에 이규필의 오른팔이 되어 있었다.
일전에도 이 차장의 오른팔이 되고자 했던 사람은 많았다.
그러나 이 차장은 사석에서 격의 없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사람을 잘 믿지 않는 성격이었다.
처음에 그의 오른팔이라고 믿어졌던 사람들이 하나둘 그의 주위에서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어떤 이들은 좌천됐다고도 하고, 어떤 이들은 검사 옷을 벗었다고도 했다.
이 차장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고, 누군가 그들의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이 차장은 그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조용히 웃을 뿐이었다.
그러던 중 유 검사가 점점 그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평소에 그다지 사교적인 성격은 아니었던 그였기에, 그가 이 차장과 가까워지는 것을 우려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조만간 그도 다른 사람들처럼 이 차장의 마음에 들려고 노력하다가 오히려 쥐도새도 모르게 처리될 것이라는 평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수많은 경쟁자가 떨어져 나갈 동안 유 검사는 조용히 계속해서 이 차장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사람들은 불가사의한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누구도 유 검사가 이 차장의 심복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다.
시연은 잠시 일전 회식 자리에서 유 검사가 말없이 술에 취한 필웅을 뻘뻘 땀을 흘리며 데려다주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는 분명 같은 사람이었지만, 이미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시연은 씁쓸해야 할지 분노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여전히 그는 조용하고 다른 사람과 대화도 잘 나누지 않는 성격이었지만, 오히려 그런 점 때문에 이규필의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시연은 최근 그에 대한 소문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런 유 검사가 방에 들어와 다가오자 자기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왠지 적의 소굴 한가운데에서 포위당한 느낌이었기 때문이었다.
유 검사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이규필 차장에게 공손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는, 시연을 보자 눈인사를 했다. 시연은 불편한 기분으로 까딱 고개만 숙였다.
“말씀하신 자료입니다.”
유 검사가 자료가 들어있는 서류철을 이규필 차장에게 내밀었다.
이규필 차장은 서류철을 받아들고는 이리저리 넘겨보다가 한 페이지를 펼쳐서 시연에게 내밀었다.
시연은 여전히 불편한 표정으로 선뜻 서류철을 받지 않고 이규필 차장을 바라보았다.
“이게 뭐죠?”
“정검, 선배가 자료를 주면 먼저 내용을 보고 물어봐야지.”
옆에서 유 검사가 시연을 질책했다.
시연은 성의 없이 예예 하고 대답했지만, 여전히 뭔가 혐오스러운 물건이라도 보듯 서류를 바라보며 받아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허헛 참, 정검. 나 팔 떨어지겠네. 보면 알 거 아닌가. 안 본다고 해서 이 서류가 사라지지는 않아요.”
이 차장이 능구렁이처럼 독촉하자 시연은 어쩔 수 없이 서류철을 받아 들었다.
오점순의 신문조서였다.
오점순이 밀수 현장에서 체포되고 심문을 받은 기록이었다.
시연은 자료를 받아들고 몇 번 넘겨보다가, 자료로부터 뭔가 새로운 사실을 알아내는 것을 포기하고는 이 차장에게 물었다.
“이게 뭡니까? 제가 여기서 뭘 봐야 하는 거죠?”
“자네들이 체포한 오점순의 신문조서 아닌가.”
“그러니까, 이것과 조 검사를 내사해야 하는 이유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냐구요.”
이 차장이 짜증 난다는 표정으로 찻잔을 집어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유 검사가 마치 이 차장의 혀처럼 입을 열었다.
“정검, 오점순을 체포하기 전에 조검이 어디 있었지?”
시연은 그걸 왜 묻냐는 듯 빤히 유 검사를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오점순과 함께 있었죠. 설마 조 검사가 오점순과 범죄를 공모했다고 생각하시는 거라면…”
“당연히 아니지. 조검이 그럴 리가 있나.”
유 검사가 그런 황당한 말은 처음 들어본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조 검사가 오점순과 함께 있었던 이유는 뭐지?”
“조 검사는 오점순의 범행을 도와주는 척하려고 했던 거예요. 그래서…”
“바로 그거야.”
“예?”
유 검사가 애석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시연은 그 표정조차도 꾸며낸 위선적인 모습임을 느꼈기에, 왠지 모를 그에 대한 반감이 더해졌다.
“조 검사는 함정수사를 펼쳐서 범인을 잡은 거야. 함정수사는 명백히 금지되어 있지. 아무리 용의자를 잡고 싶더라도, 함정수사를 통해 증거를 수집하는 건 불법인 거 몰라?”
시연은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현재.
이 차장은 시연에게 필웅의 내부 감찰을 도우라고 했지만, 사실 감찰은 시연이 뭘 도와줄 필요도 없이 이미 일사천리로 진행 중이었다.
이미 내부 감찰은 유 검사의 지휘 하에 차곡차곡 진행되고 있었고, 시연이 뭐라도 제지를 해 보려고 했지만 이미 유 검사의 지시를 받은 수사관들이 필웅을 데려와 신문을 시작했다고 했다.
시연은 어이가 없었다.
“아니, 이럴 거면 나한테 뭘 맡기려고 한 거야?”
물론 시연도 내심 이 차장의 의도를 알고는 있었다.
이 차장은 시연이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필웅이 당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모습을 즐기고 싶은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일부러 필웅의 감찰을 낱낱히 지켜볼 수 있으면서도 아무 것도 관여를 할 수 없는 일을 맡긴 것이다.
시연은 악랄하기까지 한 이 차장의 계획에 치를 떨면서도, 동시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에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때, 유 검사는 망연자실하게 서 있는 시연에게 다가와 서류를 하나 건넸다.
“뭐에요, 이게?”
유 검사는 힐끔 시연을 쳐다보더니 피식 웃었다.
“언제부터 후배가 그렇게 매번 자료를 제대로 보지도 않고 선배한테 내용을 보고하게 했지? 아까 이 차장님한테도 그렇고, 자꾸 그러면 버릇없다는 소리 들어. 직접 읽어봐.”
유 검사는 마치 시연이 잘되라는 뜻에서 선심 써서 충고하는 것처럼 시연을 나무라고는, 그대로 등을 돌려 걸어갔다.
시연은 그의 등 뒤에 몰래 손가락으로 욕질을 해댔다.
그러다가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보자,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자료를 살펴보았다.
필웅의 조사 기록이었다. 내사과에서 자체적으로 필웅을 조사했고, 어떻게 징계를 내려야 할지 논의된 내용이었다.
자료를 읽어 내려가던 시연은, 잠시 후 씩씩거리며 앞서 걸어가던 유 검사의 등을 툭툭 쳤다.
유 검사가 여유로운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시연은 한때 유 검사의 여유로운 얼굴이 자애로운 선배처럼 보인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저 재수 없는 위선자의 얼굴처럼 보인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바뀔 수가 있는 거지?’
시연은 대체 무엇이 유 검사를 이렇게까지 바뀌게 했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시연은 잡념을 떨치기 위해 눈을 한 번 꾹 감고는, 간신히 목소리를 가다듬어 자신이 흥분한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실패했다.
“무기한 정직이라뇨?”
시연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지금 당장 눈 앞의 당신의 안다리를 걸고 싶다는 절절한 분노가 느껴질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유 검사는 시연이 다시 한 번 화를 낼 뻔할 정도로 일부러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아직 법률문서는 읽을 줄은 아나 보네.”
“아니, 무기한 정직이라뇨? 너무 심한 것 아닌가요? 함정수사가 범죄는 아니잖아요?”
유 검사가 짐짓 근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정검, 하도 범죄자들이랑 놀아나다 보니 검사로서의 직분을 망각한 것 아닌가? 어떻게 검사가 범죄가 아니면 해도 된다는 식으로 생각할 수 있지?”
유 검사의 말은 원칙적으로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시연은 이대로 굴할 생각이 없었다.
“지금 그런 이야기가 아닌 거 선배님도 잘 아시잖아요. 이건 단지 함정수사를 했다는 명목만으로는 너무 과한 징계 아닌가요? 징계 규정 상으로도…”
“그만. 내가 징계를 내리는 것도 아닌데 왜 나한테 따지고 드는 거야? 불만이 있으면 징계위원회에서 조검한테 소명하라고 해. 네가 조검 엄마는 아니잖아?”
유 검사는 손을 앞으로 뻗어 시연을 제지하고는 다시 등을 돌려 걸어갔다.
시연은 화가 나서 어쩔 줄 몰라하며 발을 동동 구르다가 보고서에 쓰여진 징계위원회 소집일시를 그제서야 확인했다.
“뭐야? 10분 후잖아?”
시연은 벽시계를 보고 보고서 상의 일시를 다시 보았다. 틀림없이 10분 후였다.
“무슨 징계를 이렇게 번갯불에 콩볶아 먹듯이 해?”
시연은 이를 박박 갈며 징계위원회가 열리는 회의실 쪽으로 뛰어갔다.
* * *
징계위원회가 열리는 소회의실.
이규필 차장과 다른 두 명의 부장검사가 앉아 있고, 필웅은 그들과 마주 보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이규필 차장이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제15차 징계위원회 회의 시작합니다.”
이 차장은 이어 서류를 몇 개 뒤적이더니 하나를 찾아 앞에 펼쳐두고는 질문을 시작했다.
“검사 조필웅. 왜 이 징계위원회가 열렸는지 알고 있나?”
필웅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함정수사가 얼마나 부도덕하고, 우리 조직이 얼마나 지양하고 있는 일인지 잘 알겠군.”
“그렇습니다.”
옆에 앉아 있던 부장검사가 쯧 하고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혀를 찼다. 그리고는 일부러 필웅이 들으라는 듯 소리를 줄이지도 않은 채 옆의 부장검사에게 말을 건넸다.
“요즘 애들은 잘못하고도 뭐가 문제인지를 모르는군요.”
“그러게 말이에요. 이거야 원, 누가 징계를 받으러 온 건지 모르겠네.”
하지만 필웅은 그들의 대화에 전혀 신경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 차장은 물끄러미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자네가 함정수사를 벌여 피고인 오점순을 체포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건가?”
“일단 제가 피고인 오점순을 체포했다는 사실은 인정합니다.”
“말장난하는 건가? 그렇다면 함정수사는?”
“함정수사는 인정할 수 없습니다.”
이 차장의 눈썹이 꿈틀했다.
“무슨 소리지? 다시 사실관계를 따져 보지. 자네는 오점순이 밀수를 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 그에 협조하는 척했고, 실제로 밀수에 나선 오점순을 그 자리에서 체포했어. 맞나?”
“맞습니다.”
“함정을 파 놓고 사람이 거기에 굴러떨어지길 옆에서 기다리고 있었으면서, 함정수사가 아니라고 우길 셈인가?”
이 차장과 다른 두 명의 부장검사의 눈이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번뜩이고 있었다.
필웅은 짐짓 태연한 표정으로, 눈앞의 맹수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