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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로 개과천선-127화 (127/151)

127화 대담한 수법

필웅은 초조하게 경찰서 안뜰을 서성이고 있었다.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군.’

이미 장경이 심문을 시작한지 몇 시간이 흘렀는지도 알 수 없는 시각이었다.

경찰서에는 수많은 사람이 오고 가고 있었다.

싸구려 옷을 입고 야하게 화장을 한 여자가 수갑을 차고 나오거나, 검은 모자를 쓰고 옷깃을 한껏 세운 단단해 보이는 형사 같은 남자가 경찰서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들을 무심히 지켜보던 필웅은 슬슬 서춘주의 심문 내용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때 장경이 음료수를 들고 경찰서에서 나왔다.

“형사님, 어떻게 됐습니까?”

장경은 말없이 필웅에게 음료수를 건네고는 서춘주가 털어 놓은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 * *

“이름이 뭡니까?”

서춘주가 예의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주희필입니다.”

“서춘주라는 이름도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장경이 삐딱하게 서춘주를 바라보며 물었다.

서춘주는 느물느물하게 웃으며 그런 장경의 태도를 지켜보았다.

“이름을 여러 개 쓰는 게 불법은 아니지 않습니까? 저는 비록 사업가이지만, 종교인이기도 하죠.”

“물론 이름을 여러 개 쓰는 게 불법은 아니지만, 불법적인 일들을 벌이는 놈들은 꼭 이름을 여러 개 쓰더라고.”

장경이 으르렁대며 맞받아치자, 서춘주는 두 손을 모아 책상 위에 올려놓고는 말을 이었다.

“뭐, 의심하시는 건 자유입니다만, 오늘 저는 뜻밖의 습격 때문에 아주 당황스럽습니다. 그에 관한 것들만 물어보시면 좋겠군요.”

장경은 자료를 이리저리 휙휙 넘겨보다가 물었다.

“김영지가 왜 당신을 습격했다고 생각합니까?”

“아까도 차에서 잠시 말씀드렸지만, 김영지 씨와 저는 종교관이 조금 많이 달랐습니다.”

“단지 가치관이 다르다고 사람을 죽일 수가 있나?”

“십자군 전쟁에 대해 들어보시지 못한 모양이군요.”

“그래서.”

장경이 자료를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고는 매섭게 서춘주를 노려보았다.

“당신은 김영지의 십자군 전쟁의 희생양이다?”

“이해력이 좋으시군요.”

장경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왜 지금이죠? 김영지는 교단에 있을 때 당신을 습격할 수도 있었지 않습니까? 아니, 그쪽이 더 편했겠죠. 김영지는 최고 원로였고 교단에 자신의 우군도 있었을 테니까. 그렇지만 지금의 김영지는 단지 도망자일 뿐인데, 갑자기 왜 이제 와서 당신을 처단해야겠다고 마음 먹은 겁니까?”

서춘주는 어깨를 으쓱했다.

“범죄자의 마음을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범죄자들의 행동을 예측하는 게 가능했다면 형사님 같은 사람도 필요 없었겠죠.”

장경은 내심 짜증스러워하며 입을 다물었다.

“물어보실 게 더 이상 없으시면 전 가봐도 됩니까? 다음 일정이 밀려 있어서요.”

장경은 대답 없이 초조하게 손가락을 무릎을 두드렸다.

‘제기랄, 정 검사님이나 조 검사님이었으면 어떻게든 파고들어서 뭔가를 더 얻어냈을 텐데.’

장경은 아쉬웠지만 딱히 더 이상 서춘주를 잡아둘 핑계가 생각나지 않았다. 어쨌든 지금 당장 서춘주가 교단의 범죄에 직접 관여했다는 증거는 없었다.

‘가만.’

장경은 곰곰히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김영지가 월흥 리조트의 사고 현장에 갑작스레 나타났을 때의 일이었다.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사망자 명단에 혹시 권지평이라는 이름이 있나?”

김영지는 예고도 없이 나타나서는 다짜고짜 장경에게 권지평이라는 사람에 대해 물었다. 권지평은 월흥 리조트 사고 현장에서 일차적으로 발견된 사망자 중 하나였다.

‘그러고 보니 권지평은 누구고 왜 그걸 물어본 거지?’

장경은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어차피 지금 당장은 서춘주에게 물어볼 만한 것이 떠오르지 않았고, 월흥 리조트에서 죽은 누군가를 김영지가 알고 있다면 그 사람은 교단과 관련된 사람이거나 적어도 교단의 인물들의 지인일 가능성이 있었다.

“혹시 권지평이라고 압니까?”

그때, 처음으로 서춘주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것 봐라?’

장경은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 서춘주의 얼굴을 유심히 훔쳐보았다.

서춘주의 얼굴에는 분명 긴장한 기색이 떠올라 있었다.

“권… 지평이요?”

“예, 권지평.”

“그 이름을 어디서 알게 되신 겁니까?”

“취조하는 사람은 나인 줄 알았는디. 권지평을 압니까, 모릅니까? 그것만 얘기하쇼. 김영지한테 이미 다 들었어요!”

장경 역시 권지평이 누군지 알 턱이 없었다. 그러나 장경은 허세를 부리면서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서춘주를 윽박질렀다.

서춘주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권지평이라는 이름을 알고는 있습니다.”

그가 대답하자, 장경은 관심 없는 척하면서도 힐끗힐끗 그를 쳐다보았다.

“그래요? 어떻게 아는 겁니까?”

서춘주가 이상하다는 듯 장경의 눈치를 살폈다.

“형사님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장경은 속으로 흠칫 놀라 되려 버럭 화를 냈다.

“아니, 그러니까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을 당신과 맞춰 보겠다는 것 아뇨?”

서춘주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권지평은…”

그의 말끝이 흐려졌다.

“권지평은, 제가 알기로는 김영지 원로의 숨겨진 아들입니다.”

* * *

“예? 아들이요?”

장경의 이야기를 듣다 말고 필웅이 놀라 다시 물었다.

“예. 서춘주 얘기로는 그렇슴다.”

“갑자기 아들이라뇨? 아니, 애초에 아들인데 성은 왜 다르답니까?”

장경이 말없이 캔 커피를 들어 한 모금 마시며 대답했다.

“권지평은 김영지가 교단에 들어오기 전 낳은 사생아인 모양입니다. 교단에 들어온 이후로는 연을 아예 끊었다고 하더라구요. 권이라는 성은 어머니 쪽 성인 것 같고.”

“잠깐만, 그래서.”

필웅이 장경의 말을 듣다가 잠시 그의 말을 끊었다.

“그 권지평이라는 아이와 서춘주 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는 겁니까? 서춘주가 그다음에 무슨 이야기를 했죠?”

장경이 멍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다가 대답했다.

“어… 음. 일단 여기까지 듣고 나서 검사님이랑 좀 의논을 해봐야겠다 싶어서 잠깐 나온 겁니다.”

“권지평은 김영지의 아들이고, 서춘주가 권지평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필웅은 팔짱을 낀 채 손가락으로 팔뚝을 툭툭 치며 생각을 이어갔다.

“권지평은 월흥 리조트에서 사망했죠. 그리고 김영지가 처음 찾아왔을 때의 태도에 비추어 볼 때, 김영지는 권지평이 영산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렇겠군요. 그래서 혹시라도 아들이 살아 있는지 보려고….”

“그리고 김영지는 아들이 사고에 휘말려 죽은 걸 발견하게 되는 거죠.”

필웅은 아까 서춘주가 한 말들을 떠올렸다.

이원필과 김영지의 관계, 그리고 월흥 리조트 사고에 김영지와 이원필이 어떤 식으로든 관여되어 있다는 암시.

‘아니야, 김영지는 권지평이 영산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 굳이 자기의 아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가게 될 리조트를 폭파할 계획을 미리 세웠을 리가 없어!’

필웅은 잠시 동안이지만 서춘주의 간교한 혀에 놀아날 뻔한 자신을 질책했다.

“권지평의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서춘주의 반응이 어땠다고 했죠?”

“뭔가 불안해 보였습니다.”

필웅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렇군… 서춘주는 자신들이 기획한 폭탄 테러로 인해 김영지의 아들이 죽은 사실을 알고 있었던 거야.’

“김영지가 서춘주를 습격한 이유를 알겠군요.”

장경도 잠시 고민에 빠져 있다가 필웅의 말을 듣고 아 하고 탄성을 질렀다.

“그렇군요! 서춘주도 월흥 리조트 사고로 인해 김영지가 아들을 잃게 된 사실을 알고 있었겠군요!”

“의도한 바인지는 알 수 없지만, 사고로 인해 김영지는 아들을 잃었습니다. 아마도 그때부터 김영지는 단순히 교단의 원로들이 법의 심판을 받도록 돕는 것에 그치지 않고 교단의 수뇌부를 공격할 계획을 꾸민 것일지도 모르겠군요.”

필웅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대로 놔두면 김영지가 언제 또 서춘주를 습격할지 모릅니다. 서춘주는 지금 어딨죠?”

“아까 그 방에 놔두고 왔습니다. 후배 형사 한 놈이 지키고 있어요.”

장경과 필웅은 다시 방으로 향했다.

장경이 말한 대로 형사 한 명이 방문 앞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야, 안에 그놈 잘 있지?”

신문을 보고 있던 후배 형사는 무언가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장경을 올려다보았다.

“예? 풀어 주라면서요?”

“뭐? 뭔 헛소리야?”

장경이 긴장해서 윽박지르듯 그에게 물었다.

“아니, 어떤 선배님이 오셔서는 자기가 이제부터 인수하겠다면서 데리고 가셨는데요? 선배님이랑 이미 얘기도 다 됐다면서.”

“얘기가 되긴 뭐가 돼? 야 임마, 나 빼고는 아무도 들여보내지 말랬잖아!”

“광역수사대에서 온 되게 높은 분이라고 했단 말이에요.”

“아오, 이 쓸모없는 새끼! 가, 가!”

장경은 애꿎은 후배의 엉덩이를 발로 걷어차서 쫓아내고는 방문을 벌컥 열었다. 후배 형사의 말대로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장경은 다시 후배를 불렀다.

“야, 일로 와 봐.”

“가라면서요?”

“이걸 확! 빨리 안 와? 어떻게 생긴 놈이었어?”

“무슨 검은 모자 쓰고 좀 단단한 체구로 보이는 남자였는데. 한 40대 정도로 보였어요.”

장경은 인상을 쓰고 잠시 생각에 빠졌다가, 이내 경악한 표정으로 필웅을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필웅이 똑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설마 김영지가…?”

필웅은 아까 입구 근처에서 서성이고 있을 때 그런 인상착의의 남자를 봤던 것을 기억해냈다.

필웅은 왠지 모르게 전체적인 느낌이 낯이 익다고 생각했는데, 워낙 평소에 범죄자들이나 경찰들을 자주 보다 보니 비슷하게 느껴지는 것이라고만 생각했었다.

‘이런 제길, 눈 앞에서 보고도 놓치다니!’

그나저나 실로 대담한 수법이 아닐 수 없었다.

경찰서에 잠입한 것으로 모자라 경찰을 사칭하고 참고인을 데려가기까지 하다니 필웅은 분노하면서도 탄복할 수밖에 없었다.

장경이 발을 구르다가 필웅을 잡아 끌었다.

“이거 한 방 먹었는디요. 얼른 쫓아가 봐야겠슴다.”

필웅과 장경은 전력으로 경찰서 안뜰로 달려 나갔다. 이미 김영지나 서춘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필웅은 멈춰서 숨을 고르고 장경에게 물었다.

“헉헉. 나간 지 얼마나 됐답니까?”

“한 15분쯤 된 것 같슴다.”

필웅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장경에게 다급하게 말했다.

“CCTV! CCTV 같은 건 없습니까? 적어도 어느 쪽으로 나갔는지 정도는 알 수 있잖아요!”

“아, 맞다!”

장경은 머리를 두드리며 먼저 기억해 내지 못한 자신을 탓한 뒤 관제실 쪽으로 뛰어갔다.

장경이 경찰서 안으로 사라지자, 누군가가 필웅에게 다가왔다.

“조필웅 검사님?”

필웅은 갑자기 누가 찾아온 건가 싶어 경계심을 띄며 그를 돌아보았다.

돌아보니 세 명 정도의 남자가 한껏 긴장한 기색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중 맨 앞에 서 있던 남자가 다가와 재차 물었다.

“조필웅 검사님 맞으시죠?”

“그런데요.”

남자가 양 옆의 남자들에게 잠시 눈짓을 했다. 남자들이 천천히 필웅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필웅은 긴장한 채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섰다.

“무슨 일이죠? 당신들은 누굽니까?”

남자가 자신의 신분증을 보여주었다. 검찰 수사관이었다.

“조필웅 검사님, 저희는 본청에서 나온 조사관들입니다.”

“그런데요?”

남자가 자신도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썩 내키지는 않는다는 듯 불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조필웅 검사님, 검사님이 위법한 함정수사를 해서 용의자를 잡아들였다는 제보가 들어왔습니다. 잠시 내부 감찰 목적상 저희와 같이 내사과로 가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필웅은 한껏 인상을 찌푸리며 방금 들은 말을 곱씹었다.

‘뭐? 내사과? 내부 감찰?’

조사관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마주 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게 다 무슨 소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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