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암살
필웅과 장경은 서춘주와 강 사장이 만나기로 한 회관의 입구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일성회관은 멋들어지게 지어진 한옥 양식의 식당이었다. 드나드는 사람들 하나하나가 정계나 재계에서 이름깨나 알려진 인물들이었고, 모두 각자의 방으로 따로 안내받아 들어가는 듯했다.
“우와, 영화에서나 보던 곳이네요.”
장경이 입을 쩍 벌리고 감탄했다.
“그러게요. 수상한 사람들이 수상한 모임을 가지기에 딱인 곳이네요.”
서춘주는 이미 수행원들과 함께 들어갔고, 아직 강 사장이라는 사람은 도착하지 않은 듯했다.
‘강 사장이라… 강무완 사장을 말하는 거겠지?’
잠시 후, 외제차 한 대가 미끄러지듯 어둠 속에서 나타나 일성회관 앞에 멈춰 섰다.
수행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조수석에서 내리더니 뒷좌석의 문을 열었고, 뒷좌석에서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남자는…
“어, 저 새끼가 왜 저기서 나오지?”
장경이 황당하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필웅도 약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차에서 내린 남자는, 다름 아닌 강무완의 아들 강준수였다.
강준수가 차에서 내려 일성회관 안으로 들어간 후 필웅과 장경은 방금 본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방금 본 거, 강준수 맞죠?”
“예, 맞는 것 같습니다.”
“저놈 마약류관리법 위반으로 빵 들어간 거 아니였슴까?”
“대법원에서 사건 진행 중이었는데, 아무래도 결과가 좋게 나온 모양입니다.”
필웅은 쓴 입맛을 다시며 이를 갈았다. 어렵게 범죄자들을 잡아넣고도 그냥 어이없이 풀려 나오는 경우가 너무 많아지고 있었다. 특히 소위 힘 있는 집안의 사람들은 더욱 그랬다.
‘이래서 도둑질을 할 거면 크게 하라는 거군.’
도적질을 하려면 쌀을 훔칠 게 아니라 나라를 훔치라는 말은 조선 시대 시절부터 돌았다고 했다. 필웅이 보기에는 그 이야기는 2002년, 나아가 2020년의 한국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이야기였다.
아무리 법이 정교해지고, 수사 기법이 발달해도 결과는 늘 똑같았다. 그런 상황에 필웅은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 사회 자체를 바꾸지 않는 이상 결국 이 일은 반복되고 마는 건가.’
필웅은 쓸데없는 감상을 쳐내기 위해 고개를 휘휘 내둘렀다. 일단은 지금의 일에 집중해야 했다.
“아무튼, 강 사장이 강무완이 아니라 강무완의 아들인 강준수였나 보군요.”
“무슨 얘기들을 하는 걸까요?”
“아무래도 최근 여러 곳을 압수수색 당했으니, 당국이 냄새를 맡았다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대응방안을 논의하는 거겠죠.”
장경과 필웅은 잠시 말없이 일성회관 쪽을 바라보았다.
“일단 좀 기다려 봐야겠죠?”
“기다렸다가, 서춘주가 나오면 따라붙죠.”
“알겠습니다.”
장경은 대답하고는 크게 하품을 했다. 얼마 전 사고를 겪었음에도 제대로 쉬지 못했기 때문에 장경은 상당히 피곤한 기색이었다. 물론 그것은 필웅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병상에 누워 허송세월할 시간이 없어.’
삼영과 교단의 음모는 차곡차곡 진행 중이었고, 그들이 모르는 어딘가에서 지금도 정체불명의 약품이 연구되고 있을 터였다.
그런 사실을 생각하니 필웅으로서는 자는 시간조차도 아까웠다.
“저기, 누가 또 들어가는디요.”
장경이 일성회관 입구 쪽을 가리켰다.
흰색 세단이 입구 쪽에 가까이 멈춰서더니, 뒷좌석에서 한 백발의 중년 남자가 내렸다.
“저거, 어디서 본 얼굴인디….”
장경이 인상을 쓰며 어디서 그를 봤는지 떠올리려고 애썼다. 필웅이 그런 그를 도와주었다.
“자유민족당의 이영규 당대표입니다. 차기 대통령 후보 중 지지율 2위죠.”
“아, 맞다! 원체 뉴스를 잘 안 봐서리.”
이영규 당대표가 내리자, 입구에서 안내를 맡고 있던 식당 종업원 중 한 명이 안으로 황급히 들어갔다.
잠시 후, 서춘주와 강준수가 입구 쪽으로 나와 공손히 그를 맞았다.
“잉? 이건 또 뭔 상황이여?”
장경이 놀라자 필웅도 유심히 그들 셋을 바라보았다.
각각 교단, 삼영 그리고 정계를 대표할 만한 인물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한 자리에 회합한 것이다.
‘별로 보기에 즐거운 모임은 아니군.’
삼영과 교단 만으로도 막막한데, 정계와도 연줄이 닿아 있는 모양이었다.
‘저들이 개발하고 있는 신약은 고위층을 상대로 할 가능성이 높다. 이영규 당대표 같은 사람도 목표 중의 한 사람일 수도 있지. 설마 이미 신약이 완성돼서 이영규에게 써 보려고 하는 건가?’
필웅은 바짝 긴장해서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생각에 빠졌다. 하지만 추측만 거듭할 수 있을 뿐 그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는 단서는 적었다.
‘그게 아니라면 이영규와 같이 상대편 후보에게 약을 쓰려고 하는 건가? 그럴 가능성도 있지.’
지찬의 설명에 의하면, 신약은 사람을 최면 상태에 빠지게 해 쉽게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게 만드는 약이라고 했다.
그 약의 존재는 사실상 정재계를 지배하고자 하는 야심가들에게 치트키나 다름없었다. 굴복하지 않는 적이 있다면 약을 쓰고, 아군을 만들고 싶을 때도 약을 쓰면 그만이었다. 물론 일단은 약을 먹어야 한다는 제한이 존재하기는 했지만, 일단 어떻게든 약을 먹이기만 하면 그다음은 일사천리였다.
필웅은 입술을 씹기 시작했다.
입술에서 진득하게 피가 흘러나왔지만, 필웅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니, 아랑곳하지 않았다기보다는 의식하지 못했다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이었다.
필웅은 그렇게 완전히 생각을 멈춘 채로 뚫어지게 일성회관 쪽만을 바라보았다.
약 2시간 후.
술이 거나하게 취한 듯한 강준수가 먼저 휘적휘적 걸어 나왔다. 그를 부축하려는 수행원들을 밀쳐내면서 무언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는 모양새였다.
장경은 혀를 쯧쯧 찼다.
“이거야 뭐, 타이틀만 사장이지 아주 개백정이 따로 없구만.”
강준수가 수행원들을 발로 차고 밀치는 와중에도 수행원들이 억지로 그를 부축해 차로 집어넣기까지 약 10분 정도 시간이 흘렀다.
강준수를 태운 차가 떠나자, 이번에는 이 대표와 서춘주가 짐짓 하나도 취하지 않은 것처럼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며 일성회관의 입구에 모습을 드러냈다.
입구에서 서춘주가 허리를 굽히며 두 손으로 이 대표와 악수를 한 후, 이 대표 역시 자신의 차를 타고 자리를 떠났다.
서춘주가 막 수행원의 부축을 받으며 차에 타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일성회관 옆의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그림자처럼 나타났다.
“저거 뭡니까?”
밤눈이 좋은 장경이 먼저 그림자 같은 형체를 발견하고 불안하게 속삭였다.
일성회관 입구의 조명에 드러난 형체는 비단 검은 옷을 입고 있을 뿐만 아니라 복면도 뒤집어쓴 상태였다.
뒤늦게 그를 발견한 수행원들이 놀라서 그를 저지하려고 했으나, 그 형체는 놀라울 정도로 빠른 속도로 칼을 꺼내 수행원들의 급소를 하나씩 찔러 들어갔다.
“뭐, 뭐야?!”
필웅과 장경은 자신도 모르게 놀라 차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서춘주는 갑작스러운 습격에 허둥지둥하며 도망가려고 했지만, 이미 그 곁의 수행원들을 깔끔하게 쓰러트린 그림자 같은 형체는 비대한 체구의 서춘주의 뒷덜미를 바로 낚아챘다.
그의 날카로운 칼이 번개같이 서춘주의 목덜미를 향해 날아가는 순간이었다.
무언가가 날아 들어와 암살자의 손을 강타했다. 충격을 받은 그의 손에서 칼이 볼품없이 떨어졌다.
그에게 날아든 것은 바로 필웅의 신발이었다.
필웅은 구두 한 짝을 집어던진 탓에 겅중거리며 달려오고 있었고, 장경은 암살자의 퇴로를 막기 위해 반대편에서 달려오고 있었다.
그림자 같은 암살자는 잠시 필웅과 장경을 번갈아 보며 고민하는 듯하더니, 재빨리 일성회관의 입구 안으로 사라졌다.
“꺄악!”
“누구냐!”
담장 안에서 비명소리와 외침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장경은 재빨리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러나 이미 그림자 같은 형체는 넓은 마당을 지나 저 멀리 뛰어가고 있었고, 그가 달리면서 쓰러트리고 갔는지 여기저기 종업원들이며 기재가 널브러져 있어 달리는 데 방해가 됐다.
장경은 간신히 비명이 이어지는 방향을 쫓아 일성회관의 후원에 들어섰다.
그러나 이미 형체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후원을 둘러보니 후원의 담장도 입구 쪽의 담장만큼이나 낮아서 쉽게 타고 오르내릴 수 있어 보였다. 아마도 암살자는 후원의 담장을 타고 넘어간 모양이었다.
비명 소리는 이내 점점 잦아들었고, 종업원들은 그제서야 입구 앞에 수행원들이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여종업원들이 다시 놀라 비명을 질렀다. 필웅은 침착하게 일단 119와 경찰에 신고하라고 요청하고는 서춘주 쪽을 돌아보았다.
서춘주는 차에 기대 간신히 숨을 고르고 있었다. 필웅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저 기억합니까?”
필웅의 목소리에 서춘주는 멍하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고, 이내 깜짝 놀랐다.
“아니, 조 검사님 아니십니까? 여긴 어쩐 일로?”
그때 장경이 후원에서 입구 쪽으로 다시 돌아왔다. 필웅이 급하게 물었다.
“그놈은요?”
“없어졌슴다. 이거야 원, 엄청 날랜 놈이네요.”
필웅은 다시 서춘주를 돌아보았다.
“서춘주 씨. 최근에 이와 유사한 습격을 당한 적이 있습니까?”
서춘주가 겨우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는 숨을 고르며 대답했다.
“그랬다면 수행원을 고작 두 명 데리고 다니지는 않았겠지요.”
‘맞는 말이야. 이런 습격은 처음인 모양이군. 그렇다면 대체 왜?’
“왜 습격당했는지 짐작 가는 바가 있습니까?”
필웅은 내심 이 습격이 서춘주가 주희필이라는 이름으로 이끄는 사기 조직과 연관이 있다고 믿고 있었다.
서춘주로서도 자신이 많은 원한을 사고 있다는 점을 알 테니, 그 점을 이끌어내면 유의미한 자백을 얻어낼 수도 있을 터였다.
그러나 서춘주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그저 영산에서 작은 교회를 하고 있는 목회자일 뿐입니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저도 알고 싶군요. 어린 양들은 쉽게 미혹되기 마련이니….”
‘염병하고 있네.’
필웅은 정신을 집중해서 서춘주의 크리미널 아카이브를 막 열어 본 참이었다.
참으로 가관이었다.
그가 주희필이라는 이름으로 치고 다니는 다단계 사기 외에도, 수없이 많은 파렴치한 범죄의 기록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성추행, 음주운전, 강간, 협박, 공갈, 문서 위조, 횡령….
필웅은 고개를 흔들고는 크리미널 아카이브를 꺼버렸다. 크리미널 아카이브를 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메슥거리는 기분이었다.
필웅은 서춘주의 역겨운 면상에 침을 뱉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간신히 표정을 무표정으로 유지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누가 그랬는지는 의심 가는 바가 있습니까? 어떤 간 큰 어린 양이 도시 한복판에서 당신을 습격한 걸까요?”
필웅의 비아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서춘주는 그저 머리를 감싸 안을 뿐이었다.
“서춘주 씨, 협조를 해 주셔야 도와 드릴 수가 있습니다.”
장경도 옆에서 다가와 으름장을 놓았다. 습격으로 인해 머리가 혼란스러운 지금이야말로 그로부터 뭔가 가치 있는 정보를 이끌어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는 것을 필웅도 장경도 모두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최대한 정신적 압박을 줘서 어떻게든 뭔가를 흘리게 만들어야겠군.’
서춘주는 여전히 혼란스럽다는 듯 머리를 흔들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누군지 저는 알고 있습니다.”
필웅이 인상을 찌푸리며 그의 말을 받았다.
“짐작가는 게 아니라 알고 있다구요? 복면을 쓴 채였는데 말입니까?”
“예. 왜냐하면 지인이기 때문이죠.”
“지인이요?”
서춘주가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이마의 땀을 닦으며 의미심장하게 말을 이었다.
“물론이죠… 일전 함께 같은 교단에서 일했던 최고 원로. 아까 그 암살자의 정체는 바로 그 최고 원로였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