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폭탄 돌리기
필웅과 장경은 조심스레 대기실 안으로 들어섰다.
예상대로 대기실은 텅 비어 있었다. 이미 행사가 진행 중이어서 관계자들은 모두 행사 진행을 도와주고 있거나 강연 중인 모양이었다.
“검사님, 여기.”
장경이 손짓으로 필웅을 불렀다. 행사장 쪽으로 나가는 문이었다.
“어떻게 할까요? 이리로 바로 나가 볼까요?”
“일단 살짝만 열어서 동태를 좀 보죠.”
장경이 살짝 문을 열고는 빼꼼히 고개를 내밀어 밖을 살폈다.
“강연장 뒤편으로 이어지는 복도가 있고, 아무도 없는 것 같슴다.”
“나가봅시다.”
필웅과 장경은 천천히 문을 열고 복도로 나왔다.
긴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고, 저 멀리 강연장으로 이어지는 출구가 보였다. 아마도 강연을 준비하는 사람이 대기실에 있다가 바로 강연장으로 나갈 수 있도록 구조가 설계된 모양이었다.
필웅과 장경은 서로를 마주 보며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잠깐, 누구십니까?”
필웅과 장경은 심장이 얼어붙는 기분을 느끼며 뒤를 돌아보았다.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가 수상하다는 눈으로 그들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긴 어떻게 들어 오셨죠? 여긴 관계자외 출입금지입니다.”
사내가 험상궂게 말하며 뚜벅뚜벅 그들을 향해 걸어왔다.
그때 필웅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자네야말로 누구지?”
필웅의 권위적인 목소리에 다가오던 사내가 우뚝 멈춰 섰다.
“예?”
“누구냐고 묻지 않나. 교단 쪽인가? 아니면 재단 쪽?”
필웅이 거침없이 묻자, 남자는 약간 당황하더니 대답했다.
“교단 쪽입니다.”
“그래? 교단 사람이 원로의 얼굴도 못 알아보나?”
사내는 조금 당황한 듯했지만 여전히 미심쩍다는 눈빛을 감추지 않은 채 물었다.
“원로님이라고 하시면…?”
“그래. 나 4원로일세.”
김영지의 말에 의하면 4원로는 교단의 비밀스러운 일들을 주로 수행하는 원로로서, 교단 내에서도 그 얼굴을 아는 사람이 극히 드물다고 했다.
필웅은 강유라를 구출할 때 김영지가 했던 것처럼, 얼굴이 잘 알려지지 않은 교단의 고위직을 사칭할 계획이었다.
‘위험한 계획이지만 일단 당장 빠져나갈 길이 없으니 시도해 볼 수밖에.’
필웅은 은근슬쩍 주위를 둘러보았다. 길게 늘어선 복도에 숨거나 도망칠 곳 따윈 없었다. 물론 방금 나온 대기실로 다시 들어갈 수도 있겠지만, 그 경우 강연장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해질 것이다. 수상한 낌새를 눈치챈 교단이 그들을 붙잡으려고 시도할 수도 있었다.
사내는 의심이 많은 편인 모양이었다. 필웅이 스스로를 4원로라고 밝혔음에도 사내는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제길, 그냥 힘만 쓰는 기도원 놈들과는 또 다른 놈이군.’
필웅은 자신이 너무 안이하게 생각했던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자신도 모르게 필웅의 등허리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필웅은 슬쩍 옆에서 넋을 잃고 보고 있던 장경의 옆구리를 건드렸다.
장경이 그를 돌아보자, 필웅은 사내가 보이지 않게 팔을 움직이지 않은 채 손가락만으로 사내의 뒤를 가리켰다.
그러던 중 갑자기 사내가 입을 열자, 필웅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다시 근엄한 자세를 유지했다.
“4원로님이시면… 교주님의 호신부가 있으십니까?”
“호신부라….”
필웅은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턱을 쓰다듬었다. 사내의 관심은 온통 필웅에게 쏠려 있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겠나? 교주님께서 이 사실을 아시면….”
“죄송하지만, 얼마 전에 교단 고위직 사칭 사고가 있어서 신분 확인 절차가 강화되었습니다. 원로님께서도 잘 알고 계실 텐데요.”
사내의 얼굴에 의심이 보다 짙게 드리워졌고, 필웅은 아차 싶었다. 아무래도 얼마 전 강유라 구출 당시 교단의 고위직(이라기보다는 고위직의 수행원이지만)을 사칭한 일 때문에 교단 내에서도 보안 방침이 강화된 모양이었다.
“제시할 수 없으시다면, 죄송하지만 제가 밖으로 안내해 드려야겠습니다.”
사내는 ‘안내’라고 했지만 누가 봐도 팔을 비틀어 버릴 기세로 노기등등하게 필웅에게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퍽-
필웅의 눈앞에 다가온 사내는, 갑자기 들려온 퍽 소리와 함께 스르르 무너지듯 쓰러졌다.
쓰러진 사내의 등 뒤로 소화기를 든 장경이 나타났다.
“휴…”
필웅은 비로소 이마에까지 송글송글 맺히기 시작한 땀방울을 닦았다.
“거, 더럽게 의심 많은 놈이군요.”
“아무래도 얼마 전 일 때문에 교단의 보안 방침이 강화된 모양입니다. 앞으로 교단에 잠입하는 일이 쉽지는 않겠어요.”
필웅과 장경은 대기실의 문을 열고는 끙끙대며 사내의 몸을 들어 옮긴 후, 옷장 안에 사내를 그대로 처박았다.
“괜찮겠죠?”
“머리에 피는 안 났으니 괜찮을 겁니다.”
장경이 심드렁하게 대답하고는 필웅을 재촉해 다시 복도로 나왔다.
강연장에서는 아직 강연이 한창인 모양이었다. 힘 있는 강연자의 목소리가 점점 더 가깝게 들려왔다.
‘이상한데? 뭔가 어디서 들어본 듯한 목소린데.’
필웅은 목소리가 가까워질수록 어딘지 익숙한 목소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복도는 강연장 무대의 어두운 뒤편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필웅과 장경은 주위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 무대 뒤편의 어두운 공간에 숨어 살며시 강단 위의 강연자를 살펴보았다.
“돈이 돈을 낳습니다. 여러분, 은행에 몇 년을 쌓아둔다고 해도 그 돈은 더 이상 늘어나지 않습니다! 연 4~5% 이자로 어느 세월에 돈을 모으려고 하십니까?
자, 오늘은 우리의 스텝업 투자로 서울에 새로 집을 장만하신 회원님의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필웅은 쏟아지는 조명 하에 우렁차게 강연을 펼치고 있는 강연자의 얼굴을 드디어 볼 수 있었다.
‘저 사람은…?’
필웅은 미간을 좁히며 다시 유심히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는 분명, 일전 3원로인 오점순과 함께 만난 교단의 고위직 ‘서춘주’였다.
* * *
“저 인간이 왜 여기에 있지?”
“예?”
필웅이 자기도 모르게 속으로 생각하던 것을 입 밖으로 꺼낸 모양이었다. 필웅은 나가서 설명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일단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으로 고개를 한 번 흔들었다.
‘저 인간이 왜 여기에 있지? 오늘의 강연자는 분명 주희필이라고 했는데.’
필웅은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조명 아래서 껄껄 웃고 있는 남자는, 분명 일요교회의 사무실에서 한 번 본 적 있는 서춘주였다.
‘가명을 쓰고 있는 건가.’
충분히 그럴 가능성은 있었다. 교단이 하는 사업이 워낙에 다양하고 비밀스러운 만큼, 여러 개의 가명을 돌려써 가면서 여러 사업을 진행 중일 가능성은 충분했다.
주희필, 아니 서춘주의 소개로 강단에 걸어 나온 남자는 평범한 직장인처럼 보였다.
“제가 스텝업 투자를 알기 전엔 별 볼 일 없는 소시민이었습니다.”
마이크를 건네받은 남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루 벌어 하루 살기도 바쁘고, 전세집도 옮겨 다니기를 수차례였죠. 언젠가 집을 사고 싶었지만, 서울에서 집을 구하기란 하늘에서 별 따기였습니다.”
조심스러웠던 남자의 목소리는 점점 높아져 갔다.
“그러나 주 대표님을 통해 스텝업 투자를 알게 되고, 제 삶은 달라졌습니다. 이제 서울에 한강이 보이는 아파트를 한 채 갖게 됐고, 이제 제 딸아이 유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스텝업 2단계 투자도 개시했습니다. 여러분, 가난에서의 탈출은 더 이상 꿈이 아닙니다!”
남자가 격정적으로 서춘주를 가리켰다.
“주 대표님이 이 모든 걸 가능하게 해 주실 겁니다! 저도 처음에는 반신반의했지만, 제가 이 자리에 나와 있는 게 증거입니다!”
남자의 말과 함께 전면의 스크린에서 남자가 찍은 자신의 아파트의 모습과 행복하게 웃고 있는 가족들의 사진이 차례로 나타났다.
사람들의 환호성과 박수갈채가 이어졌다.
서춘주는 그런 그를 보며 인자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웃고 있었다.
필웅은 이가 갈렸다.
‘개자식들, 저런 사람들이 어렵게 모아서 만든 돈을 갈취해서는 자기들의 욕심만 채우고 있다니!’
강단에 나와서 간증을 하는 남자도 분명 악의가 있지는 않을 터였다. 그가 투자금을 돌려받은 것도 사실일 것이고, 그는 정말로 앞으로도 투자금을 돌려받는데 문제가 없을 거라고 믿고 있을 게 분명했다.
필웅의 기억에 아직은 사업의 초기이니 사람들이 투자금을 돌려받는 데 큰 문제가 없는 시점이었다.
하지만 이 투자 사기의 구조는 뒤에 가입하는 사람에게 계속해서 폭탄이 전해지는 구조였다. 물론 폭탄을 건네주는 사람은 알 도리가 없지만, 실제로는 계속해서 투자금을 잃을 위험을 뒤의 사람에게 전달하게 되는 것이다.
계속해서 그렇게 폭탄이 전해지다가, 더 이상 뒤의 사람의 투자금을 헐 수 없게 되면 그때부터는 대재앙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몇십 명, 몇백 명 정도의 사람들로부터 개인적으로 투자금을 받아 사기를 쳤던 과거 진우현 사건과는 다르게 그 피해 규모는 어마어마할 것이었다.
필웅이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남자의 간증은 계속되었고, 사람들의 환호도 계속되었다.
‘자신도 저렇게 될 수 있다’라는 강렬한 기대와 희망에 가득 찬 환호성과 박수갈채들.
필웅은 언뜻 그 어디보다도 긍정적인 분위기로 가득 찬 장소가 이렇게나 끔찍하게 보일 수 있다는 사실에 전율했다.
지금 들리는 저 환희에 가득 찬 찬양들은 얼마 안 가 고통과 저주의 울부짖음으로 바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나니 필웅은 버티기가 힘들었다.
서춘주가 마이크를 다시 건네받았다.
“오늘, 저희는 중요한 선언을 하고자 합니다.”
좌중이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오늘, 그동안 잠시 중단되었던 신규 스텝업 회원 모집을 다시 시작합니다!”
아마도 새로운 회원을 모집하려는 모양이었다. 필웅이 장경을 돌아보니, 장경도 인상을 있는 대로 찌푸린 채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었다.
“가입을 희망하시는 분들은 나가시는 길에 저희의 접수처를 찾아 주시기 바랍니다!”
장내가 떠나갈 듯한 함성이 울려 퍼졌다.
서춘주는 마치 개선장군처럼 크게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는, 강연장 뒤로 퇴장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강연장 뒤의 어두운 구석.
강연장에서 내려오자마자, 서춘주의 강연장 위에서의 온화한 얼굴은 차가운 무표정으로 돌변했다.
필웅과 장경은 조용히 구석에 숨어 그와 수행원들을 지켜보았다.
“다음 약속은 어디야?”
“예, 강 사장님과 저녁 식사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그 버르장머리 없는 놈. 지 애비 힘만 믿고 위아래 없이 구는데 언제 한 번 크게 큰코다칠 날이 올 것이야.”
서춘주는 혀를 끌끌 차며 한동안 욕설을 늘어놓다가 수행원들과 함께 바삐 복도로 사라졌다.
필웅과 장경은 일어서서 조용히 그들의 뒤를 쫓았다.
강연장 뒤의 복도는 건물 뒤의 주차장으로 연결되어 있는 듯했다.
서춘주는 수행원들에게 끊임없이 뭔가를 지시하면서 빠르게 복도를 걷고 있었다.
“형사님, 먼저 나가서 시동 걸어 놓으세요.”
“알겠슴다.”
장경이 아끼던 에스페로는 지난 사고로 인해 카센터에 들어가 있었고, 장경과 필웅은 급한 대로 경찰서의 차량을 갖고 나온 길이었다.
장경을 먼저 보낸 필웅은 은밀하게 서춘주의 뒤를 쫓았다.
“약속 장소가 어디라고?”
“서초 일성회관입니다.”
‘일성회관이라. 좋아. 중간에 놓쳐도 따라갈 수 있겠군.’
필웅은 조심스럽게 그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다른 출구를 통해 주차장으로 빠져나왔다.
장경이 그의 앞으로 차를 몰고 왔다.
“저 앞에들 모여 있는 것 같슴다.”
“좋아요. 천천히 따라갑시다. 일단 일성회관으로 간다고 했어요.”
장경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용히 엑셀을 밟았다.
저물어 가는 노을 속으로 두 대의 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