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돈이라는 이름의 신
필웅과 장경도 어느 정도 몸이 회복되고 나서 셋은 다시 서울로 가는 길에 올랐다. 이번에는 좁은 산길같이 퇴로가 막힌 지형은 최대한 피하면서 조심스레 움직였다. 결국 시간은 조금 더 걸렸지만, 셋은 무사히 서울남부지검에 도착했다.
“배고픈데 오랜만에 토스트 먹을래?”
“좋지!”
시연의 제안에 셋은 서울남부지검 앞의 토스트집으로 향했다.
토스트집의 사장 아주머니는 밝은 얼굴로 그들을 반겼다.
“어이구, 영감님들 오랜만에 보네요. 다들 어디 가계셨어들?”
“이런저런 일이 좀 많았어요~”
시연이 둘러대며 토스트를 주문했다.
시연이 사장 아주머니와 정신없이 그간 밀린 수다를 떨고 있을 때 장경이 필웅을 불렀다.
“검사님, 이제 어딜 파 볼 겁니까?”
“가볼 데가 생긴 것 같아요.”
필웅은 말하면서 품속에서 전단지를 하나 꺼내 들었다.
“이게 뭡니까?”
필웅은 병원에서 희주로부터 전단지를 건네받으며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 * *
필웅의 마지막 말에 어안이 벙벙해하던 희주는, 이내 책가방에서 종이를 한 장 꺼내 내밀었다.
“이게 뭐야?”
필웅이 의아한 눈빛으로 종이를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물었다.
“전단지잖아요.”
“어… 그러니까.”
필웅은 다시 전단지의 내용을 뚫어지게 읽어 보았다.
“’지금 바로 투자하세요! 연 수익률 48% 보장!’? 희주야, 내가 여유로운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돈이 부족하다거나 그런 건 아니야.”
“그게 아니에요. 그 강연이 열렸던 장소를 보세요.”
희주가 답답하다는 듯 전단지 하단에 기재된 장소를 손으로 짚어 보였다.
“월흥 리조트…?”
희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월흥 리조트가 붕괴되기 전에 거기서 그 투자 관련 강연이랑 세미나를 많이 했었대요.”
“이건 어디서 났어?”
“엄마 가방에서요. 엄마는 한 번 가 보고 그 후로는 안 가봤다고는 하는데, 친구 부모님들 중에서는 여기에 투자한 사람이 꽤 있대요.”
필웅은 미간을 좁히며 전단지를 다시 살펴보았다.
‘어라, 이건…?’
필웅도 기억하는 ‘과거’의 사건이었다.
단군 이래 최대의 사기범이라고 하는 ‘주희필’이 일반인들로부터 몇조 원에 이르는 돈을 투자금 명목으로 끌어들인 후 잠적해 버린 사건.
2020년 현재에도 그의 생사여부를 알 수 없어 미궁 속에 빠져 버린 사건이었다.
‘그런데 세미나를 월흥 리조트에서 개최했단 말이지?’
월흥 리조트 붕괴 사건 당시 필웅이 알아본 바에 의하면, 리조트는 원래 보통 학생들의 수련회 때나 가끔씩 쓰곤 하는 건물이었다.
일반 기업이나 협회 등에서 사용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런데도 여기서 여러 차례 강연을 개최했단 말이지.’
필웅은 직감적으로 월요부흥재단, 나아가 교단과 이 ‘사업’에 연관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고맙다, 희주야.”
희주는 말없이 발끝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이내 고개를 들고 말했다.
“몸조심하세요.”
희주는 잠시 망설이다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 개X같은 적들을 꼭 박살 내 주세요.”
* * *
“이게 그러니까 월흥 리조트에서 치뤄진 행사라는 말이죠?”
“예.”
“그런데 뭐… 이게 특별히 문제 될 게 있을까요? 월흥 리조트에서 했다고 하니 뭔가 교단과 관련이 있어 보이기는 하지만, 이런 종류의 투자 세미나 같은 건 자주들 하지 않슴까? 우리 다혜도 가끔 구경하러 가는 것 같던디.”
“혹시 다혜 씨가 이 설명회에 간 적이 있다고 합니까?”
“이거요? 아뇨. 다혜도 뭐 그렇게 열성적으로 찾아다니는 건 아니라서. 영산에서 하는 설명회까지 쫓아다니지는 않죠.”
아직 주희필이 개최하는 투자 세미나가 사기라는 것이 밝혀지기 전의 시점이었다. 장경으로서는 문제 될 게 있냐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았다.
필웅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이 세미나, 사기입니다.”
“뭐라구요?”
“자기가 하는 사업에 투자하면 연 48%의 수익률로 투자금을 돌려준다고 하지만, 사실은 전부 가짜에요. 제대로 된 사업을 하고 있는 것은 거의 없고, 조만간 투자금 반환을 할 수 없다고 선언할 겁니다.”
장경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물었다.
“그런데 이미 투자금에다가 이익을 붙여서 반환받은 실제 사례들이 있다는디요?”
장경이 전단지의 한쪽 면에 쓰인, 실제 투자금 회수 사례에 대해 일반 투자자들이 증언한 내용을 가리켰다.
“투자금 사기의 전형적인 수법이죠. 초반에는 예컨대 A, B라는 사람들로부터 50씩 투자금을 받는다고 가정하면, A에게 B의 투자금 원금 중 일부를 헐어서 60을 반환해 주는 겁니다. C가 나타나 다시 50을 투자하면, B에게는 C의 투자금 일부를 헐어 다시 60을 반환하는 식인 거죠. 언젠가는 회수가 불가능해질 때가 올 겁니다.”
“그렇군요… 근데 그걸 다 어떻게 아십니까? 이게 다 사실이라면, 당장 체포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필웅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가 이것이 사기임을 알게 된 것은 그 사건이 2020년의 나영전이 알고 있던 사건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때는 이 사건이 교단과 관련이 있는 사건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지만.
“아직 물증이 잡힌 건 아니에요. 물론 발 빠르게 움직이면 증거를 찾기는 어렵지 않을 겁니다. 애초에 투자를 받는 회사들이 전부 유령회사니까요. 이 세미나가 최근 서울에서도 진행되는 모양입니다. 거길 한 번 가 볼까 해요.”
“오, 좋은 생각이군요! 가서 집회가 끝나면 관계자들을 미행해서 뭔가 정보를 얻어볼 수도 있을 것 같슴다.”
시연은 사장 아주머니와 한참 바나나를 넣은 토스트를 팔면 불티나게 팔릴 것이라는 얘기를 열성적으로 하다가, 필웅과 장경이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무슨 얘기해?”
“어? 어,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라뇨? 검사님, 조 검사님이….”
필웅은 장경의 옆구리를 강하게 찔렀다.
“억?!”
“형사님, 잠시만.”
필웅은 다시 장경을 잡아끌고 시연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으로 걸어갔다. 시연은 그런 그들을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어이구, 왜 그러십니까?”
장경이 찔린 옆구리를 부여잡으며 울상을 짓고 물었다.
“형사님, 이 건은 일단 저희끼리 진행하죠.”
“예? 그게 무슨 소립니까? 정 검사님을 따돌리자는 검까?”
필웅이 시연의 눈치를 보며 다시 속삭이듯 말했다.
“소리 좀 낮춰요! 그게 아니라… 물론 수사가 어느 정도 진행되면 시연이에게도 알려야겠지만, 지금은 좋은 때가 아닌 것 같다는 겁니다. 시연이도 지금 할 일이 있으니 정신 사납게 하지 말고 일단 우리끼리 진행하다가 알려도 되잖아요. 게다가 교단 놈들을 미행하거나 하면 위험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고….”
단순한 장경은 그런가 보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였군요. 알겠슴다. 일단은 저희끼리 진행하시죠.”
필웅과 장경이 다시 돌아오자, 시연은 토스트를 건네며 물었다.
“뭐야? 왜 나만 빼놓고 얘기해?”
“응? 아, 아니야. 박 형사님랑 다혜 씨가 애를 또 가질 계획이라고 하셔서.”
“예에? 첫째 낳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요.”
“아, 저 그게…”
장경은 핑계를 대도 하필 그런 핑계를 대냐는 듯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필웅을 쳐다 보았지만, 필웅은 시치미를 떼고 토스트만 베어 물고 있을 뿐이었다.
“그게 뭐 아직 진짜로 당장 낳겠다는 것은 아니고, 애가 동생이 있으면 어떨까 생각도 들고. 물론 요새는 바빠서 아직 착수는 못 하고… 아, 아니. 착수라기 보다는 뭐랄까…”
장경이 횡설수설을 하자 시연은 여전히 궁금하다는 눈빛으로 장경과 필웅을 번갈아 쳐다보았지만, 필웅은 여전히 생각에 잠겨 토스트만 씹어 삼키고 있을 뿐이었다.
* * *
“여러분, 돈을 벌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필웅과 장경은 강연장 밖에서 강단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음향 시설이 고성능인지 강연장 밖에서도 띄엄띄엄 강연 소리를 들을 수는 있었지만,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음과 환호성 때문에 제대로 내용을 들을 수는 없었다.
그들은 지금 막 희주가 알려 준 투자 강연회의 서울 강연을 듣기 위해 강연장에 도착한 참이었다.
“이거 참, 사람이 너무 많아서 지금은 들어갈 수가 없다는디요.”
장경이 한참 주최 측과 실랑이를 하고 오더니 낭패한 표정으로 필웅에게 말했다. 필웅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예? 아니, 우리 예약도 하지 않았어요?”
“그랬죠. 근디 이것들이 보니까 예상 인원을 전혀 생각 안 하고 되는 대로 예약을 받은 모양임다.”
필웅과 장경은 혹시나 해서 가명을 사용해 예약까지 마친 참이었다. 그래서 여유 있게 강연장에 들어가려고 했으나, 입구에서부터 주최 측의 제지를 받게 된 것이다.
필웅은 슥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야말로 인산인해라는 표현 그 자체에 걸맞는 광경이었다.
강연장에서 들려오는 소음, 입구에서 서성이고 있는 수많은 인파, 그 인파를 통제하기 위한 행사 진행 요원들까지 어림잡아도 수천 명은 되어 보였다. 실제로 필웅과 장경도 몰려드는 사람들에 의해 계속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장경이 불안한 표정으로 속삭였다.
“이것들, 혹시 뭔가 눈치채고 안 들여보내 주는 게 아닐까요?”
“그럴 리가요. 가명을 썼는 데다가 나름 변장도 했는데.”
필웅과 장경은 선글라스를 끼고 어설프게 일전 김영지로부터 어깨너머로 배운 가짜 수염 같은 것도 붙인 상태였다.
시연에게는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장경이 다혜에게 이야기를 한 탓에 다혜도 둘의 분장한 모습을 보게 되었는데, 다혜의 감상평은 이랬다.
“음~ 뭐 아주 똑똑한 친구들이 아니면 대강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아요~”
필웅은 그 애매한 평가에 굉장히 찜찜해 했지만, 장경은 왠지 모르게 그 평가를 OK 사인으로 받아들이고는 문제없다며 필웅을 끌고 강연장으로 향한 것이었다.
“좀 기다리면 자리가 나지 않을까요?”
장경이 초조하게 시계를 바라보며 말했다. 필웅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뇨, 그럴 것 같진 않네요.”
필웅은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그들 뒤에서 대기하고 있는 인원이 하나 가득이었다. 그 정도면 포기하고 돌아갈 법도 한데, 사람들은 지친 기색도 없이 밖에서라도 강연을 듣게 되어 행복하다는 표정으로 열심히 전단지며 팜플렛 등을 읽고 있었다.
“이거야 원, 완전 종교네요, 종교.”
장경이 맥이 풀린다는 듯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렸다. 필웅도 그의 말에 공감했다.
‘정말로 사이비 종교의 집단 예배와 다를 게 없군.’
다른 게 있다면, 이 사람들은 신이 아니라 주희필, 나아가 돈을 숭배한다는 점뿐이었다.
존재하지 않는 가짜 신과 존재하지 않는 일확천금의 기회.
필웅은 어쩌면 무언가를 믿고 싶어 하는 인간의 본성이 계속되는 한 이런 범죄는 계속될 수밖에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어떡하죠? 강연 내용도 제대로 듣고 관계자들 얼굴도 확인을 해 봐야 뭔가 조사의 단서가 나올 것인디.”
필웅도 고개를 끄덕이고는 인상을 찌푸리며 고민에 빠졌다.
그때, 무언가가 필웅의 눈에 포착되었다.
<행사자 대기실>이라는 표지였다.
필웅은 장경을 툭툭 치고는 턱 끝으로 관계자 대기실 쪽을 가리켰다. 분주한 사람들이 그 앞에서 계속해서 오고가고는 있었지만, 강연을 들으러 온 사람들은 당연히 들어갈 엄두를 내지 않고 있었고 행사 인원들도 너무 바빠서 신경을 쓰지 않고 있는 모양새였다.
장경도 그쪽을 힐끗 돌아보고는, 필웅과 함께 이리저리 눈치를 보며 살금살금 대기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람은 많았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시선이 분산되어 아무도 그들에게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필웅은 대기실 앞에 서서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아무도 미처 그들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을 때, 필웅은 조심스럽게 손잡이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