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왜 싸워야 하는가
필웅은 조용히 자신의 병실에서 달력을 보고 있었다.
이미 2002년이 된지도 한참이었다. 필웅은 2020년에 봤던 시연의 기사를 떠올렸다.
‘이 사고와 시연이의 죽음이 관련 있는 걸까?’
하지만 시연의 시신은 한강변에서 발견됐다고 했다.
사고가 난 곳은 영산과 서울의 경계였으니, 여기서 시연이 죽었다면 시연의 시신이 한강변에서 발견될 리는 없었다.
필웅은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2002년 중에는 계속 경계를 늦춰서는 안 되겠군.’
필웅은 자리에서 일어나 담당의사를 찾아갔다.
“9984 차량의 탑승자는 어떻게 됐습니까?”
필웅의 물음에 의사는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구조대가 도착했을 때 이미 사망해 있었습니다. 연고자를 찾아보려고 했지만, 신분을 확인할 수 있는 신분증 같은 게 아무것도 없었어요. 핸드폰이 하나 발견되기는 했지만 충돌 과정에서 파손된 모양입니다.”
“그럼 그 시신들은 어디 있습니까?”
“잠시 보관하다가 절차에 따라 처리될 예정입니다. 아마 무연고자 시신 처리 전문 업체에서 인수해 가겠죠.”
의사는 대답하고는 차트를 넘겨 보며 자리를 떠났다.
‘이런, 배후를 알아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
아마도 트럭을 운전하던 이들은 시연을 예전에 납치한 이들일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아마도 파출소장을 치어 죽게 만든 것도 같은 이들일 것이었다. 물론 그들이 재단 또는 교단의 지령을 받고 움직이는 이들임은 분명했지만, 그들이 대체 어떻게 필웅 일행의 행선지를 정확하게 알고 움직였는지는 여전히 의문이었다.
그때 시연이 다가와 필웅의 등을 두드렸다.
“응?”
“어떻게 할래?”
“뭐를?”
시연이 붕대를 감은 손이 불편하다는 듯 긁적이며 말했다.
“일단 서울에 올라가는 봐야지.”
“물론이지.”
그들이 사고를 겪은 곳은 영산에서 서울로 넘어가는 산길이었지만, 영산 쪽이 더 가까웠기에 지금은 영산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중이었다.
앞좌석에 앉은 필웅과 장경은 다소 부상이 있는 편이었지만, 시연은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담당 의사는 시연은 하루 정도만 요양하고 퇴원해도 좋다고 일러 주었다.
한편, 강유라는 부상이 좀 더 심해서 한동안은 병원에 입원해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강유라는 엄청나게 불안해했지만,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정도의 부상이 아니었기에 어쩔 수 없이 수긍했다.
“내가 먼저 올라가 있을게.”
“뭐!? 안돼.”
“왜 안돼?”
시연이 반문하자 필웅으로서는 할 말이 없어짐을 느꼈다.
“아무튼 안 돼.”
“무슨 소리야? 지금 한시가 급하다고. 언제 또 이런 습격이 있을지 모르잖아.”
‘바로 그래서 안 되는 거야.’
이번에는 운 좋게 강유라가 그들을 구해 주었지만, 만일 시연이 혼자 행동한다면 그런 요행을 기대할 수도 없었다. 적어도 그나 장경은 그녀와 함께 있어야 했다.
“박 형사님 나으시면 같이 올라가.”
“너나 박 형사님은 아직 며칠 더 있어야 되잖아?”
“그러니까. 생각을 해 봐. 나도 박 형사님도 없는 상황에서 너 혼자 행동하다가 습격당하면? 그때는 정말 아무도 도와줄 수 없잖아.”
필웅은 아무렇게나 둘러댄 말이었지만 나름 설득력이 있다고 느꼈다. 시연도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최근 큰 사고를 겪었으니, 다시 그런 일이 발생하면 어떻게 될지 염려하는 것은 당연한 심리였다.
“그런가…?”
“당연하지. 수사를 속행하는 것도 좋지만, 일단 최소한의 안전은 확보한 다음 차근차근 움직이는 게 나을 것 같아.”
시연은 우물쭈물하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 것 같기도 하네.”
그때 누군가가 병원 복도 저 끝에서 헐레벌떡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지찬이었다.
“시연 씨!”
“어, 저도 있는데요.”
지찬은 필웅은 무시하면서 시연에게 다가와 시연의 팔을 잡았다.
“괜찮아요?”
“어… 예. 팔이 조금 아프네요.”
지찬은 당황해하다가 시연의 팔을 잡고 있는 자신의 손을 보고는 흠칫 놀라 손을 떼고 물러섰다.
“미안해요. 너무 놀라서…”
“괜찮아요. 어떻게 온 거예요?”
지찬이 안경을 치켜 올리면서 약간 울먹이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장경이 형이… 시연 씨가 크게 다쳤다고.”
“예? 전 그렇게 크게 안 다쳤는데요.”
지찬은 그제서야 시연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시연은 경미한 부상이 전부라 몇 군데 붕대를 감은 것 외에는 전반적으로 괜찮아 보였다. 지찬은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다행이네요.”
“저기, 지찬 씨. 박 형사님한테는 안 가 봅니까?”
“예? 장경이 형도 다쳤어요?”
필웅은 어이가 없다는 듯 대답했다.
“같이 차 타고 있다가 사고 난 거라고 얘기 안 해 줬나요?”
“전, 그냥 시연 씨가 다쳤다는 얘기 듣고 급하게 뛰어오느라…”
지찬이 미처 생각을 못했다고 하면서 중얼거렸다.
“아, 예…”
“장경이 형은 어딨나요?”
“저쪽 병실입니다.”
필웅이 손을 들어 복도 저편의 병실을 가리켰다.
“감사합니다.”
지찬은 어설프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몇 번이고 시연이 괜찮은지 확인해 보고 싶다는 듯 돌아보며 병실로 향했다.
“되게 놀라셨나 보네?”
시연이 무신경하게 중얼거리자 필웅은 뭐라 할 말을 잃었다.
“음… 그냥 놀라서 그런 건 아닌 것 같은데.”
“무슨 소리야?”
필웅이 헛기침을 몇 번 했다.
지찬은 누가 봐도 시연에게 관심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시연이 그런 사실을 전혀 눈치 못 챈 것도 마찬가지로 분명했다. 필웅은 지찬이 왜 저렇게 행동하는지 시연에게 일러줄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내가 굳이 왜?’
필웅은 스스로 자신이 왜 이렇게 생각하는지도 약간 이해하기 어려웠다. 아무리 봐도 자신의 마음은, 단지 남의 일이라서 신경을 쓴다기보다는 뭔지 모를 불쾌함에 더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필웅은 시연을 내려다보았다. 시연은 병원 복도의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어느샌가 바나나를 또 꺼내 먹고 있었다. 필웅은 어떤 고양이 로봇의 주머니처럼 시연에게 바나나를 무한정 꺼내 올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게 아닌가 의심하기 시작했다.
“잠깐만, 너 바나나는 어디서 계속 갖고 오는 거야?”
“응? 병실에 있던데?”
시연이 말하며 크게 바나나를 한 입 베어 물었다.
“필웅아 필웅아. 바나나는 이렇게 그냥 먹어도 맛있는데 토스트랑 먹으면 얼마나 맛있을까?”
“그거 이미 있어.”
“뭐? 정말?”
필웅은 눈을 번뜩이는 시연을 놔두고 자신과 함께 쓰는 시연의 병실로 향했다.
필웅은 문을 열다가, 안에서 나오는 누군가와 부딪혔다.
“앗.”
필웅과 툭 부딪힌 누군가는 뒤로 물러서 필웅을 바라보았다.
“희주?”
희주였다. 아직 키가 작은 희주는 물끄러미 필웅을 올려다보았다.
“아저씨? 괜찮아요?”
“응, 그럼. 여긴 웬일이야?”
필웅은 병실을 같이 쓰는 다른 환자들이 무슨 일인가 하고 돌아보는 시선을 느끼고는 희주를 데리고 병원 앞으로 나갔다.
필웅과 희주는 병원 앞의 산책길을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영산지청에 놀러 가려고 연락해 봤더니, 아저씨가 입원했다고 하길래요.”
“바나나도 너가 갖다 놓은 거야?”
“병문안 올 때 과일바구니는 필수잖아요?”
알고 보니 시연이 자기에게 온 것도 아닌 바나나를 꺼내 먹은 모양이었다.
필웅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답례 인사를 했다.
“와줘서 고맙다. 난 별로 안 다쳤어.”
“다행이네요. 무슨 일이에요?”
필웅은 잠시 이 일을 희주에게 이야기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어차피 눈치 빠른 희주는 어떻게든 알아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교단에게 습격당했어.”
희주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필웅이 희주가 따라오지 않는 것을 발견하고 돌아보았다.
“희주야?”
희주가 잠시 그 자리에 서 있다가, 걸어와서는 필웅을 올려다 보며 물었다.
“제8요일 교단이에요?”
“응.”
“월흥 리조트를 폭파한?”
“맞아.”
희주는 뭔가 생각에 잠긴 얼굴이 되었다.
필웅은 희주가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무거운 얘기를 했다고 생각하고, 짐짓 환한 표정으로 희주의 양팔을 다정하게 잡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박 형사님도 그렇고 다들 무사하니까.”
“정말 이럴 가치가 있는 일이에요?”
“응?”
희주가 여전히 고민스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오늘은 운이 좋게 살았지만, 다음에도 그러라는 보장이 없잖아요. 교단이랑 싸우는 거, 정말 필요한 일이에요?”
갑작스런 희주의 질문에 필웅은 생각할 말을 찾기 위해 궁리하기 시작했다.
희주가 멈추지 않고 물었다.
“교단이 나쁜 사람들인 거, 잘 알겠어요. 하지만 교단을 없앤다고 해서 죽은 친구들이 돌아오지는 않잖아요. 오히려 교단이랑 싸우면서 또다른 사람들이 죽어야만 한다면, 그냥 놔두면 안 돼요?”
희주의 질문은 단순했지만 정곡을 찌르는 질문이었다.
그리고 단순했기 때문에 필웅은 고민에 빠져들었다.
사실 새로운 고민도 아니었다. 예전 1998년에 삼영과 싸울 때도 그는 똑같은 의문을 품었었다.
‘이렇게까지 싸우는 게 의미가 있을까? 오히려 내 만용 때문에 시연과 동료들을 위험에 빠트리는 게 아닐까?’
그리고 그 때 그는 자신을 믿어 주는 동료들의 이야기 덕분에 다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검사님, 전에도 여러 번 얘기했지만 제가 이 일을 택한 건 검사님이 말씀하신 바로 그런 일을 하기 위해서예요.
그런 일의 결과가 무서웠다면 애초에 이 일을 시작하지도 않았을 거고, 시작했더라도 금방 발을 뺐겠죠.
애초에 강유라를 상대하는 게 무서웠다면 지난번 강준수를 기소할 때부터 그만둬 달라고 말했을 거예요. 저는 두렵지 않아요.”
“제가 언제 저 한 몸 다칠까 봐 그만두자고 한 적 있습니까?
처음 혜진이 사건 할 때도 제 맘대로 검사님을 끌어들였었는데, 이제 와서 저만 발을 뺀다면 치사한 놈이죠. 저도 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이것은 필웅과 필웅의 주변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교단, 그리고 삼영은 정체불명의 약물을 이용해 이 사회의 질서를 근본부터 망가뜨리려고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교단과 삼영에 맞서는 과정에서는 피치 못할 희생이 발생할 것이다.
그 희생자로부터는 과거 다혜나 장경, 시연이 그랬던 것처럼 결의로 가득 찬 동의를 받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들과 맞선다면, 오히려 무의미한 희생만을 확대시키게 되지는 않을까? 내가 교단을 파헤치기 전에는 교단도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어. 오히려 내가 독사의 약을 올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희주가 던진 물음에 필웅 자신도 마음 깊은 곳 감춰 두려 했던 의문이 또아리를 틀기 시작했다.
담담하게 바라보는 희주를 한참이나 마주 보며 생각에 빠져 있던 필웅은, 마침내 고민의 끝에 스스로 찾은 대답을 알려 주기로 결정했다.
필웅이 결연하지만 따스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네 말은 잘 알겠지만, 교단이 지금 벌이려고 하는 일은 이제까지의 희생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엄청난 희생을 불러오게 될 거야.”
“그래요?”
“그래. 끝없는 혼란, 그리고 수많은 파괴가 벌어질 거야. 그래서 내게는 교단을 파괴해야 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어.”
희주가 궁금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게 뭔데요?”
필웅은 잠시 숨을 고르듯 멈춰 서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평소 별로 책을 보지 않던 나영전이었지만, 나영전의 기억에 또렷이 남아 있는 어떤 소설의 구절이 갑자기 그의 뇌리에 떠올랐다.
소설의 이름은 떠오르지 않았지만, 그 대사가 줬던 강렬함이 아직도 머릿속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왜 적을 맞아 싸워야 하는가.
그 가장 근원적인 물음에 대한 가장 근원적인 대답이었다.
“그건…”
필웅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건 개X 같은 적들이 저기 있기 때문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