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적어도 이 일에 있어서는
필웅은 생각에 잠겼다.
‘만일 내가 죽게 되면, 은전차사가 내려올까?’
그가 알기로는 은전차사가 그의 담당 저승사자였으니 아마도 그가 내려올 것이다.
‘그렇다면 장경과 시연은?’
같은 저승사자가 배정될 수도 있겠지만, 다른 저승사자가 배정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필웅은 새삼 저승사자들이 어떻게 배정되는지 미리 알아두면 좋았겠더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같은 저승사자가 배정되면, 그래도 그 사무실에서라도 잠깐 같이 볼 수 있을텐데 말이야.’
필웅은 이런 생각들을 하며 비로소 자신의 죽음을 인식했다.
필웅은 나영전으로서 죽었던 날보다는 훨씬 침착한 느낌이었다.
어쩌면 이미 겪어본 일이라 내성이 생겨서일지도 몰랐다.
‘아니… 잠깐.’
필웅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원래 죽으면 이렇게 깜깜한가?’
그가 처음 죽었을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나영전이 처음 죽었을 때는, 오히려 살아있는 것과 그다지 다른 점을 인식하지 못했다. 물론 죽기 전까지의 순간 동안 칼에 찔린 끔찍한 고통은 겪었지만,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은전차사의 사무실이었다. 그래서 처음에 그는 오히려 자신이 죽었다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사실이 떠올랐다.
‘그럼 이건 뭐야?’
필웅은 그때서야, 자신이 ‘눈을 뜰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처음 눈을 뜨는 신생아처럼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여전히 장경의 차 안이었다.
운전석의 장경은 핸들에 머리를 박고 머리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필웅은 황급히 손을 들어 그의 맥을 짚었다. 다행히 맥박은 정상이었다.
필웅은 고개를 돌려 뒷좌석의 시연을 바라보았다. 시연도 여기저기 긁힌 채로 기절해 있었지만, 큰 상처는 없어 보였다.
그때서야 필웅은 운전석 앞의 유리창을 살펴보았다.
유리창은 산산조각이 나 있었지만, 생각보다 차체가 심각하게 망가지지는 않았다.
‘마지막 순간에 피한 건가?’
하지만 필웅이 기억하는 순간에 피할 곳 따위는 없었다. 장경의 차는 오른쪽의 산길에 늘어선 바위에 그대로 박기 직전에 멈춰서 있었지만, 마지막 순간에 이리로 피할 겨를 따위는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필웅은 밸트를 풀고 온몸에서 느껴지는 고통을 간신히 참으며 차 밖으로 나가기 위해 애를 썼다.
차체가 찌그러져서 문이 잘 열리지 않았지만, 발로 몇 번 차서 차문을 연 필웅은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누군가의 차량이 그들을 향해 달려오던 트럭 옆면을 들이받아 궤도를 틀어 놓은 것이다.
차량은 무척 튼튼해 보이는 외제차였다.
트럭을 들이받으면서 많이 파손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워낙 정교하게 범퍼로 측면을 들이받아 손상을 피한 모양이었다. 트럭에는 불이 붙어 한눈에 봐도 위험한 상황 같았다.
필웅은 절룩거리며 차에서 내려서는 충돌 현장을 바라보았다.
다시 봐도 정말 절묘한 충돌 각이었다. 만일 조금이라도 옆을 추돌했으면 트럭을 충격한 외제차 역시도 회전하다가 낭떠러지로 굴러떨어졌거나 심각한 손상을 피하지 못할 것 같았다.
‘우연인가? 대체 누가?’
필웅은 의문이 짙어지는 것을 느끼며 일단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찾았다. 하지만 충돌 시의 충격으로 인해 고장 났는지 핸드폰은 켜지지 않았다. 필웅은 어쩔 수 없이 일단 차문을 열어 장경과 시연을 조심스럽게 밖으로 내려 눕혔다. 차량에 불은 붙지 않았지만, 혹시 뒤에서 못 보고 달려오던 차가 다시 차를 들이받을까 봐 우려돼서였다.
필웅은 장경과 시연을 눕혀둔 뒤, 충돌한 두 차량 쪽으로 힘들게 걸어갔다.
필웅은 먼저 트럭에 충돌한 외제차의 차문을 열었다.
-빠각!
차문이 끔찍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 안에 타 있는 사람은…
“강유라?”
필웅은 놀라움과 당황스러움에 자기도 모르게 경악하며 입을 열었다.
그러자 피를 흘리며 운전석에 앉아 있던 강유라가 힘겹게 눈을 떴다.
“조…필웅?”
“어떻게 된 거야? 아니, 괜찮아?”
강유라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되받아쳤다.
“이게 괜찮아 보이냐?”
“성질낼 정신은 있나 보군.”
필웅은 내심 안심하며 안전벨트를 끄르고 강유라를 안아 들기 위해 다가갔다.
“뭐… 하는 거야?”
“뭐하긴? 차에서 꺼내야지. 언제 차가 폭발할지 모른다고.”
“그럼 좀 조심해서… 아야!”
필웅이 안아 들자 유라가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필웅이 다급하게 물었다.
“어디 아파?”
“온몸이.”
“좀만 참아.”
유라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필웅에게 안겼다. 필웅은 가까스로 강유라를 안아 들고는 장경과 시연이 누워 있는 곳으로 갔다.
“어떻게 된 거야? 여긴 어떻게 왔어?”
“계속 따라가고 있었어.”
“뭘?”
“너희 차지 뭐겠냐?”
강유라는 그 지경이 되어서도 따박따박 타박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필웅은 어처구니없어하면서도, 조심스럽게 강유라를 내려놓았다.
“아얏! 살살 하라고!”
“어디가 아픈데?”
“뼈가…부러진 것 같아.”
강유라는 계속해서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필웅은 불안해하며 강유라에게 물었다.
“핸드폰 있어?”
“여기… 안주머니에.”
강유라가 말하며 무겁게 손을 들고는 재킷의 안섶을 가리켰다.
“좀 꺼낼게.”
“맘대로 해.”
강유라는 체념한 듯 고개를 돌렸다. 필웅은 안주머니를 뒤져 강유라의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다행히 강유라의 핸드폰은 멀쩡한 모양이었다.
“여보세요? 119죠? 여기는 영산에서 서울로 넘어가는 고개 중턱인데요…예, 예. 알겠습니다.”
필웅은 재빨리 119에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하고는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강유라는 훨씬 부상이 심해 보였다. 피가 흐르는 곳도 많았고, 여기저기 뼈가 부러진 곳도 있는 것 같았다.
필웅은 그런 그녀를 안쓰럽게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강유라.”
“왜.”
“네가 구해 준 거야?”
강유라는 큰 눈을 떠서 몇 번 힘들게 깜빡였다.
“보시다시피.”
“어째서 이렇게까지?”
“이렇게 안 하고 너희를 구할 방법이 있었나? 미리 좀 알려주지.”
강유라가 인상을 찡그렸다. 통증이 심한 모양이었다.
“숨이… 잘 안 쉬어져.”
“말하지 마. 일단 쉬고 있어. 곧 구조대가 올 거야.”
“조필웅.”
“말하지 말라니까.”
“내가 없어도 우리 아빠, 잡아넣어 줄 거지?”
조필웅이 피식 웃었다.
“애초에 네가 부탁 안 해도 할 일이었어.”
“그래… 고맙다.”
강유라는 안심했다는 듯 비로소 미소를 띠며 다시 입을 열었다.
“고맙다는 말 해 본 거 처음이네.”
필웅은 갑자기 불안함을 느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괜찮아?”
“졸려… 피곤해. 자야겠어.”
필웅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잡으며 절박하게 외쳤다.
“강유라, 정신 차려!”
“조용히 해. 이제 자야 해.”
강유라의 목소리가 옅어지고 있었다.
“잠깐만 기다려. 아직 죽으면 안 된다고!”
“죽긴 누가 죽어…”
“강유라!”
그 때 멀리서 구급차 소리가 들려왔다.
필웅은 일어나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았다.
저 멀리서 구급차 여러 대가 앞다투어 사이렌을 울리며 달려 올라오고 있었다.
필웅은 다시 강유라를 내려다보았다.
“강유라, 구조대가 왔어!”
“…….”
“강유라? 유라야! 눈떠봐!”
필웅은 강유라의 어깨를 잡고 세차게 흔들었다.
뺨까지 세게 때렸다.
강유라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강~유~라!”
* * *
“강~유~라!!”
“그만 좀 해.”
필웅이 넌덜머리가 난다는 듯 머리를 감싸 쥐며 말했다.
시연이 키득거리면서 붕대를 감은 손으로 힘들게 바나나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
“아, 정말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장면이었어. 그쵸, 형사님?”
“저는 그래서 깨어났는데도 끼어들기가 뭐해서 기절한 척했다는 거 아닙니까.”
“엇, 저도요!”
시연과 장경은 그리고는 뭐가 웃기는지 서로 키득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필웅은 방금 전에 죽음의 위기까지 갔다가 여기저기 거즈와 붕대를 붙인 환자 두 명이 낄낄대는 모양을 보고 있자니 정신이 이상해지는 기분이었다.
‘도대체 둘 다 신경이 얼마나 무딘 거야…’
필웅은 가끔 자신조차 자신의 동료들을 이해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며 혀를 내둘렀다.
“아니, 난 정말 죽은 줄 알았다고.”
“누가, 내가?”
병상에 누워 있던 강유라가 갑자기 눈을 번쩍 뜨며 입을 열었다.
여러 개의 링거가 강유라의 몸에 연결되어 있었지만, 강유라의 상태는 처음 필웅이 발견했을 때보다 한층 나아 보였다.
“어, 일어났네?”
“옆에서 이렇게 시끄럽게 떠드는데 안 일어날 수가 있겠어? 다 저리 안 가?”
강유라가 짜증스럽게 손을 휘젓기 위해 손을 들려고 했지만, 끄응 하는 신음을 내며 다시 손을 내려놓았다.
“팔에도 금이 간 걸 잊고 있었네”
“그나저나 이런 일이 있을 줄 어떻게 알고 따라온 거야?”
강유라가 입을 비죽였다.
“그런 일이 있을 줄 내가 어떻게 알아?”
“그럼?”
“그냥… 뭐.”
“아, 뭔데? 속 시원하게 좀 말해 봐.”
시연이 말하며 무심결에 강유라의 팔을 탁 쳤다.
“악!”
강유라가 비명을 지르자 시연은 소스라치게 놀라 뒤로 물러섰다. 시연이 미안한 얼굴로 사과했다.
“앗, 미안. 뼈 금 갔다고 그랬지.”
“너 일부러 그랬지!!”
강유라가 노발대발하며 이번에는 상체를 일으키려다가 또다시 끄응 하는 소리를 내며 다시 자리에 쓰러졌다.
“너… 몸 다 나으면 가만 안 둬.”
“내가 명색이 대한민국 검산데 설마 아픈 사람한테 일부러 그랬겠어?”
강유라는 듣고 싶지 않다는 듯 힘겹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됐어.”
“아니, 그러지 말고 좀 얘기를 해 봐. 우리도 생명의 은인께서 어떻게 우리를 구한 건지는 알아야 할 것 아냐.”
“따, 딱히 너희를 구하러 간 건 아니라고!”
필웅은 약 15년쯤 후에나 유행할 전형적인 츤데레 같은 대사를 내뱉는 강유라를 기가 막히다는 듯 내려다보았다.
강유라가 한숨을 쉬며 힘없이 말했다.
“말했잖아, 그냥 따라가 본 거라고.”
“뭐하러? 너 스토커야?”
“하아, 열 받게 할 거면 다 나가.”
“그나저나 어떻게 그 상황에서 트럭을 들이받아서 경로를 비틀 생각을 했슴까? 게다가 들어보니 조금만 어긋났어도 정말 큰일 났겠던데.”
장경의 물음에 강유라가 피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국에서 유학할 때 카레이싱을 좀 했어.”
“에에? 정말임까?”
“굉장한데? 차라리 그 길로 나가 보는 게 어때?”
“시끄러워… 나 좀 쉬자.”
강유라는 귀찮다는 듯 두 눈을 꽉 감고는 간호사 호출벨을 눌렀다.
시연은 시시하다는 듯 바나나 껍질을 휴지통에 버리고는 일어섰다.
“잠깐만.”
함께 자리를 떠나려는 필웅을 강유라가 불러세웠다.
필웅은 이미 병실 밖으로 나간 시연과 장경을 슬쩍 바라보고는 돌아보았다.
“왜?”
“오늘 한 약속… 잊지 않았지?”
“무슨 약속?”
강유라가 험악하게 인상을 구겼다. 필웅은 그제서야 사고 현장에서 강유라를 구했을 때 강유라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아, 그거? 당연하지.”
“그럼 됐어. 나가 봐.”
강유라가 더 이상 얘기할 것이 없다는 듯 조용히 눈을 감았다.
필웅은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너 혼자서는 두려웠던 거지?”
“뭐?”
필웅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오늘 우리를 따라오고, 오늘 우리를 구해 준 거. 너 혼자서는 너의 아버지를 꺾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거지?”
“무슨 개소리야?”
강유라가 표독스럽게 되물었지만, 마치 독이 빠진 독사가 쉿쉿거리듯 그 말에는 힘이 없었다.
“걱정하지 마. 적어도 이 일에 있어서는 너는 혼자가 아니니까.”
필웅이 씩 웃으며 그대로 등을 돌려 병실 밖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지 않았기에, 필웅은 강유라의 눈가와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리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