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그래도 후회하진 않아
다음 날 아침.
아침에 일어나 기지개를 켜고 있는 장경에게 필웅이 다가가 말을 걸었다.
“형사님, 이제 지찬 씨도 돌아왔으니 거처를 옮겨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겠죠? 근데 이 동네가 한적하고 외지인도 거의 없어서 눈에 안 띄고 지내기는 딱 좋은디. 아쉽네요.”
장경이 아쉽다는 듯 지찬의 집 전경을 돌아보았다.
“원하면 더 있어도 돼.”
어느새 일어나 마루로 나온 지찬이 부시시한 얼굴로 퉁명스럽게 말했다.
“어? 어째 벌써 일어났냐?”
“그렇게 시끄럽게 부스럭거리는데 안 깨고 배겨?”
“이런, 시끄럽게 해서 죄송합니다.”
필웅의 사과에도 지찬은 별 대답 없이 고개를 숙이고는, 뭐라 중얼거렸다.
“예?”
잘 듣지 못한 필웅이 반문하자, 지찬이 조금 목소리를 높였다.
“그, 여자 검사님도 올라가면 다시 안 와요?”
“왜요? 오면 또 치시게?”
“으악!”
갑자기 뒤에서 시연의 목소리가 들리자 지찬은 깜짝 놀라 허우적댔다.
“아니, 놀랐잖아요!”
“뭘 놀라요? 제 욕이라도 했나 보죠?”
시연이 짓궂게 배시시 웃으며 짐을 들고 마당으로 내려왔다.
“준비 다 됐어, 가자.”
장경이 집 밖으로 나가 세워둔 차에 시동을 걸었다.
“저, 여기.”
지찬이 갑자기 슥 노트 하나를 시연에게 내밀었다.
“뭐에요 이게?”
지찬이 괜히 헛기침을 하면서 시선을 돌렸다.
“그, 어제 그 약품. 중요한 것처럼 보이길래 예전에 연구하던 곳에서 개발했던 비슷한 약품에 대한 정보를 좀 추려 봤어요.”
“오 정말요? 고마워요!”
시연이 눈에 띄게 기뻐하며 노트를 받아 펼쳐 보았다.
“우와~ 이걸 다 어제밤에 정리하신 거에요? 대단하시네!”
“별거 아니에요.”
지찬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시연이 씩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다짜고짜 빗자루로 공격한 건 다 잊어버릴게요. 나중에 서울 오면 꼭 연락해요. 아, 아니다. 나중에 내가 영산에 내려올 때 꼭 밥 살게요.”
“그, 그러든가요.”
지찬이 더듬거리며 대답하고는 휙 몸을 돌려 방으로 들어갔다.
시연은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필웅에게 물었다.
“내가 뭐 잘못 말했나?”
“음, 내가 봤을 땐… 아니다. 됐다.”
필웅은 고개를 저으며 시연과 함께 집 밖으로 나와 장경의 차에 올라탔다.
“이렇게 셋이 남부지검 가는건 오랜만이네요! 자, 슬슬 올라가 봅시다!”
장경이 기세 좋게 엑셀을 밟았다.
* * *
장경의 차 안.
뒷좌석에 앉은 시연은 졸고 있었고, 필웅은 지찬이 시연에게 건네준 노트를 읽고 있었다.
장경이 슬쩍 노트를 넘겨 보더니 물었다.
“어째, 뭐가 좀 있습니까?”
“일단 어제 지찬 씨가 얘기해 준 내용은 모두 사실인 것 같군요.”
노트에는 지찬이 설명해 둔 내용 말고도 스크랩 기사나 자료들도 편철되어 있었다.
필웅은 그중 하나를 짚었다.
“사람을 단기간에 최면 상태에 빠트릴 수 있는 약품 제조에 관한 검토 결과군요. 이 연구자료가 이미 몇 년 전에 나왔으니, 어쩌면 이 약을 만들기 위한 이론적 근거는 이미 모두 갖춰진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이미 몇 년 전에 연구결과가 나왔다구요?”
“초보적인 것이긴 하지만, 그 후로 계속해서 후속 연구가 이뤄진 것 같습니다.”
필웅은 대답하면서 이리저리 노트를 살펴 보았다.
정말 잘 정리된 자료였다. 그리고 이 자료에 따르면, 어쨌든 충분한 자금만 있으면 이 노트에서 말하는 최면제를 만들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저야 뭐 잘은 모르지만, 원래도 그 왜 마취제처럼 사람이 알딸딸하게 만드는 비슷한 효과를 내는 약물들이 이미 있지 않슴까?”
“그렇죠.”
“그럼 왜 이 큰돈을 들여서 이 약을 개발하려는 겁니까?”
장경이 묻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자료들에 의하면… 이들이 만들려고 하는 약은 그 정도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들을 태운 차는 좁은 산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차선이 하나뿐인 길이었지만, 차는 많지 않았다.
장경은 무심하게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그 정도가 아니라뇨?”
“이 약은 단순히 정신을 몽롱하게 만드는 게 아닙니다.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면서도 의식은 그대로 남아 있게 하는 거에요.”
“예? 그게 무슨 뜻임까?”
장경은 저 멀리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트럭을 흘끗 보면서 다시 물었다.
“보통 마취제는 의식을 잃게 만들 뿐이지, 의식을 잃은 상대가 어떤 행동을 하도록 하게 만들 수는 없어요. 말 그대로 마취제니까요.
하지만 이 약은 다릅니다. 말하자면, 이 약을 복용할 경우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은 상태로 사람을 유도하면서도 신체적으로 못 움직이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트럭은 어느새 상당히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장경은 트럭이 좁은 산길에서 생각보다 너무 빨리 달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장경은 주의깊게 트럭을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아하… 그러니까, 약을 먹어도 여전히 움직일 수는 있다는 거군요.”
필웅이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게다가 이 약을 복용한 상태에서는, 특정한 외부 자극에 반응해서 행동하게 만들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어떤 행동을 하게끔 할 수 있는 것이죠.”
“예전에 기도원에서 저희가 봤던 놈들도 그 약을 먹었을 가능성이 있군요.”
“예, 맞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완전히 자아를 잃은 것 같지는 않았어요. 어쩌면 시제품 정도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장경은 필웅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빠져 있다가 핸들을 툭툭 치다가, 깨달았다는 듯이 외쳤다.
“그러면 이놈들은 저번에 기도원에서 봤던 놈들처럼 여러 사람한테 이 약을 멕여서 군대처럼 부리려는 거군요!”
그의 말에 필웅이 노트를 덮으면서 자신의 추측을 말하기 시작했다.
“글쎄요. 아마도 이놈들이 이 약을 만드는 건, 딱히 여러 사람들을 한 번에 이용하기 위해서는 아닐 겁니다.”
“그럼요?”
“일단 이 약은 아직 불안정한 상태여서 효력이 있는 시간이 사람마다 들쭉날쭉하니 통일적으로 많은 사람에게 먹여서 군대처럼 부리기는 어려울 겁니다.”
“그러면 이걸 누구한테 멕입니까?”
“여러 사람에게 먹이는 것보다 중요한 한 사람에게 먹이는 것이 더 나을 때도 있죠.”
“그 말씀은?”
필웅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만일… 이 약을 권력자들에게 복용시킬 수 있다면 어떨까요. 예를 들면, 대통령이나 국무총리에게.”
장경이 자기도 모르게 필웅을 휙 돌아보았다.
“그, 그렇다면…!”
필웅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비록 추측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결론을 얻기는 어렵군요.
어차피 수많은 사람을 단체로 조종할 수도 없고, 제조에 엄청난 비용이 드는 약을 그렇게 수많은 위험을 감수해 가면서 삼영과 교단이 만들어내려는 이유가 뭘까요?
전에도 얘기했듯이 당연히 자신들이 먹을 용도는 아니고, 누군가를 먹여야 하는데, 이렇게 귀중한 약을 누구에게 복용시키는 것이 가장 효율적일까요?”
“말도 안 됩니다!”
“왜 말이 안 되죠? 제가 근거로 든 건 모두 우리가 두 눈으로 확인한 사실들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들에서 도출될 수 있는 결론은 하나밖에 없는 거구요.”
“허… 아무리 그래도 그런!”
“그럼 삼영과 교단은 누구에게 언제 이 약을 먹이려고 할까?”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필웅과 장경은 뒷좌석의 시연을 돌아보았다.
어느새 잠에서 깨어난 시연도 대화를 들었는지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결국 말하자면 이건 고위급 권력자를 향한 새로운 종류의 테러라는 얘기네. 하지만 이 약을 먹인다고 언제까지고 약효가 가지는 않을 거 아냐?”
“일단 한 번만 먹여서 조종이 가능해지면, 주기적으로 만나서 상태를 체크하고 다음 약을 먹이기는 쉽지. 최면이 된 상태에서 언제 어디로 나오라고 한 다음 다시 약을 먹이면 되잖아?”
“아…”
장경과 시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물론, 고위급 정치인들을 최면 상태에 빠트려서 구체적으로 이들이 뭘 기도하는지는 아직 알 수 없어. 하지만 그런 위험한 수단을 사용하면서 계획하는 게 사회복지사업일 리는 없겠지.
이제부터는 그걸 알아내야 해. 제조시설을 발견하는 건 그 첫 단추가 될 거야.”
필웅의 말을 경청하던 장경은 무언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저 멀리서 다가오고 있던 트럭이 어느새 생각보다도 가까이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급한 일이 있나?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런 산길에서 저렇게 속도를 내면…’
트럭은 거의 200미터 앞까지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속도를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장경은 경적이라도 울려서 주의를 줄까 하다가, 갑자기 이상한 느낌이 들어 트럭 쪽을 다시 바라보았다.
“어라, 저건…?”
장경은 트럭의 차량번호가 잘 보이지 않아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트럭의 번호판을 읽었다.
빠르게 다가오고 있는 트럭.
선명하게 보이는 찌그러졌다가 펴진 듯한 앞 범퍼.
그리고 그 차량 번호는…
“9984!? 잠깐, 저 번호는?”
장경은 순간 소름이 쫙 끼치는 것을 느꼈다.
9984는 예전 시연을 납치해 갔던 자들이 사용했던 트럭의 차량번호였다.
“뭐야, 무슨 일이에요? 헉, 저 차?!”
장경이 소리를 지르자 안전밸트를 맨 채 뒷자리에 앉아 있던 시연이 약간 앞으로 몸을 숙이다가, 눈앞에 닥쳐오는 트럭을 보고 숨을 삼켰다.
이제 트럭은 거의 눈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리고 속도는 여전히 유지한 채였다.
“이런 염병!!”
“형사님, 피해요!”
필웅의 외침에 장경은 거칠게 욕설을 내뱉으며 운전대를 옆으로 꺾으려고 했다.
하지만 왼쪽은 낭떠러지, 오른쪽은 바위가 들어찬 산길이었다.
필웅은 시간이 정지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트럭은 노도처럼 달려오고 있었다.
길어야 5초, 아니 3초면 그들이 타고 있는 차와 충돌할 것이었다.
필웅에게는 그 시간이 마치 영원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끝나는 건가?’
죽음이 눈앞에 닥쳐오자, 기대했던 것처럼 눈앞에 주마등 같은 것이 보이지는 않았다.
필웅은 뒷자리의 시연을 돌아보았다.
‘미안해, 내가 지켜 주지 못해서…이렇게 끝나게 해서.’
필웅은 가슴 한켠이 저려 오는 것을 느꼈다.
‘내가 아니었으면, 시연이도 이런 일에 휘말리지 않았을까?’
필웅은 처음 이기적인 변호사, 나영전으로서 죽었던 날을 떠올렸다.
처음 필웅으로 살게 되면서 시연을 만나게 되고, 시연과 함께 사건을 해결해 나갔던 일들도.
그리고 강중민을 체포하고, 강무완을 체포하면서 삼영그룹과 척을 지게 된 일도.
그로 인해 영산으로 좌천당하고, 교단의 실체를 알기 위해 고군분투한 날들도.
‘하지만… 그래도 후회하진 않아!’
필웅은 지금 이 순간이 설령 마지막이라고 하더라도 그 모든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다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똑같은 선택을 했을 것임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시연의 눈이 놀라움으로 인해 커지고, 입이 벌어졌다.
안타까워하며 시연을 돌아본 필웅은, 거대한 괴물처럼 닥쳐오는 트럭을 마주 보다가 눈을 꼭 감았다.
‘이제 다 끝인가.’
-콰광!!
처절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