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시연의 죽음을 막기 위해서
장경의 눈이 번뜩였다.
“누군가에게 먹인다? 하지만 이런 걸 먹여서 무슨 의미가 있슴까?”
그때 지찬이 모두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마루로 나왔다.
“지찬 씨, 이 약의 정확한 효능이 뭡니까?”
지찬이 귀찮다는 듯 안경을 고쳐 쓰며 대답했다.
“말했잖아요. 이 약을 복용하면 경미한 트랜스 상태에 빠지면서 외부의 자극을 쉽게 받아들이는 상태가 된다고….”
“아니, 그러니까 그게 뭔 말이여?”
“최면 몰라? TV에서 최면하는 거 못 봤냐고.”
“그러니까 이 약을 쓰면, 사람들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는 겁니까?”
필웅이 묻자 지찬이 방어적으로 팔짱을 끼며 대답했다.
“이론적으로는 그렇다는 거죠, 이론적으로는. 하지만 사실 꿈같은 얘기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편리한 약이 존재할 리가 없잖아요?”
“지찬 씨는 그런 약이 만들어질 수 없다고 믿는 겁니까?”
지찬은 인상을 찌푸렸다.
“본능적으로는 그런 약이 제대로 개발될 리 없다고 생각해요. 너무 꿈같은 얘기잖아요? 하지만 이성적으로는, 어쨌든 알려진 연구 결과에 따르면 그런 약을 제조하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봐요. 엄청난 예산과 충분한 인력이 있다면…”
“세계 최고 제약회사 정도의 자본 수준을 갖출 수 있다면?”
장경이 의미심장하게 묻자, 지찬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겠지?”
지찬의 이야기를 경청하던 필웅이 입을 열었다.
“이로써 도대체 그 엄청난 자금을 이리저리 돌려댄 이유가 뭐였는지는 설명이 되는군요.”
“하지만 사람을 최면 상태에 빠트리는 약이라니. 그런 게 정말 가능할까요?”
장경이 여전히 반신반의하는 눈치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실제로 개발에 성공했는지는 알 수 없죠. 어쨌든 우리가 기도원에서 목격한 사람들도, 일종의 세뇌 상태에 빠진 것처럼 보이긴 했지만 아예 의식이 없는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요.”
“그렇다면 어딘가에 실험시설 같은 걸 두고 있을 것 같은데.”
시연의 지적에 필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 정도 되는 약품을 아무 데서나 조제할 수는 없을 거야. 아마도 조제하고 생산하는 시설이 따로 있겠지.”
“그걸 알아낼 방법은 없을까? 3원로 아니, 오점순을 좀더 추궁해 보면….”
“오점순은 황대산과는 달라. 일단 지금 상태에서는 교단의 중요한 비밀에 대해서는 함부로 입을 열지 않을 것 같아.”
필웅의 말에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물었다.
안타까움 그리고 조바심에서 오는 침묵이었다.
이미 많은 것을 밝혀냈고, 교단이 삼영과 결탁하여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까지도 거의 밝혀냈다.
이제 그들이 그 약을 실제로 조제하고 있는 시설을 알아낼 수만 있다면 그들의 음모를 일망타진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일단 지금까지 얻어낸 자료들로 좀더 각자 더 알아볼 만한 게 있을지 확인해 봅시다. 그래도 많은 걸 알아냈으니, 잠깐 머리를 식히고 다시 이야기해 보죠.”
필웅이 제안하자 장경과 시연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수긍했다.
“나는 내일 남부지검 올라가서 기존 삼영그룹 수사자료 좀 다시 살펴볼게.”
“저랑 같이 가시죠.”
장경의 제안에 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내일 서울 올라간다고?”
“응, 왜?”
갑자기 심각해진 필웅의 표정에 시연이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아니. 수사자료는 내가 가서 살펴볼 테니까, 넌 여기에 있는 게 낫지 않겠어?”
“무슨 소리야? 미안하지만 너, 남부지검에 지금 방도 없잖아. 네가 가서 돌아다니는 걸 이규필 차장한테 들키면 위험하지 않을까?”
시연이 미안해하면서도 직설적으로 필웅도 염려하던 사실을 지적했다.
‘물론 이규필한테 지금 내 움직임을 노출해서 좋을 건 없다. 맞는 말이야.’
그러나 필웅이 애초에 그런 가능성을 떠올리지 못한 게 아님에도, 시연 대신 자기가 가겠다는 등 이야기를 꺼낸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해가 바뀌어 이미 2002년 초가 되었다.
‘즉, 시연이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거지.’
아마도 시연의 위험은 교단이나 삼영그룹으로부터 오는 것일 가능성이 높았다. 한창 교단 그리고 삼영그룹과의 싸움이 격해지고 있는 만큼, 시연 나아가 다른 동료들에 대해 위협이 가해질 가능성은 더 높아지고 있었다.
“그럼 나도 같이 가자.”
“네가? 교단의 본부는 영산인데, 여기서 뭘 더 조사해 보는 게 낫지 않겠어?”
필웅은 답답했다.
물론 지금 상황에서 필웅이 서울에 동행해야 할 이성적인 이유는 없었다. 단 하나, 그가 미래에서 본 시연의 사망 소식 외에는.
하지만 동시에 그런 사실은 시연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일 것임이 분명했다. 오히려 그냥 우기는 것보다 더 설득력이 떨어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냥 뭔가 안 좋은 예감이 들어.”
“아까부터 자꾸 무슨 소리야? 오늘 이상하게 구네.”
시연이 걱정스럽다는 듯 필웅을 쳐다보며 말했다. 필웅은 오히려 그냥 이렇게 밀고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니야. 같이 가자. 나도 오랜만에 서울 구경도 하고 바람도 좀 쐬고 싶어서 그래.”
“그래…? 알았어, 정 그렇다면.”
시연이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김영지가 자신의 방에서 불쑥 나왔다. 시연과 장경, 필웅은 모두 그가 집에 있는지도 모르고 있던 참이었다.
지찬이 먼저 그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깜짝이야! 이 사람은 또 누굽니까?”
“아, 지찬 씨. 미안합니다. 우리가 보호 중인 주요 증인이에요.”
김영지는 뭔가 부산스러워 보이는 필웅과 시연을 흘낏 바라보더니 물었다.
“어디들 가나?”
“아, 서울에 가서 그동안 모아놨던 삼영그룹 관련 자료들을 좀 갖고 오려구요.”
“잠깐만요. 그럼 저랑 이 아저씨 둘만 이 집에 남아 있어야 한다구요?”
지찬이 기가 막혀하면서 김영지를 가리켰다.
“어따 대고 손가락질이야? 손가락 부러지고 싶나?”
지찬은 힉 하고 숨을 들이쉬면서 김영지가 당장 손이라도 부러뜨릴까 봐 겁난다는 듯이 오른손을 왼손으로 꼭 쥐었다.
“어려우실까요? 한 2-3일이면 될 텐데.”
“절대 안 돼요! 당신들이야 장경이 형 동료 분들이라 참아 준 거지만, 이 사람은 그냥 남이잖아요!”
지찬이 또다시 김영지에게 손가락질을 할 듯 손을 뻗다가 재빨리 손을 내려 감추면서 말했다.
“상관없어. 나도 다른 곳에 가 있을 테니까.”
필웅이 의아한 표정으로 김영지에게 물었다.
“어딜 간다는 겁니까? 숨어 있을 장소가 필요하다면서요?”
김영지가 옷가지를 꺼내 입으면서 대답했다.
“그거야 처음 탈출했을 때 얘기지. 나도 어디 가 볼 데가 있어서 말이야.”
“이대로 사라지려는 건 아니겠죠?”
“날 바보로 아나? 거래는 여전히 유효해.”
김영지가 피식 웃으며 다른 사람이 뭐라 말할 틈도 없이 마당에 놓인 신발을 신었다.
“얼마나 있다 올건가?”
“빠르면 내일 모레… 늦어도 이틀 후에는 돌아올 겁니다.”
“좋아. 그럼 그때 보지.”
김영지는 목도리로 얼굴을 감싸고 휘적휘적 집을 나섰다.
“뭐, 일단은 해결된 거 아님까?”
장경이 왠지 속이 시원한 표정으로 손을 비비며 말했다.
지찬이 강조했다.
“다시 한번 말하는데, 나는 저 아저씨랑 단둘이 같이 이 집에 있고 싶지 않아.”
“아, 알았다니께! 거 참 사내자식이 낯은 엄청 가리네.”
“이건 낯을 가리는 문제가 아니라 원칙의 문제라고!”
장경과 지찬이 티격태격하는 것을 보고 있던 시연이 필웅에게 말을 건넸다.
“너 정말 괜찮은 거 맞아?”
“응? 무슨 소리야?”
“그냥. 왠지 초조해 보여서.”
시연은 별생각 없이 던진 말이었지만, 그 말은 필웅의 지금 심경을 정확하게 대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곧 네가 죽을 테니 그걸 막기 위해 따라가야겠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사실 필웅으로서는 고민되는 점이 하나 더 있었다.
필웅으로서는 그가 미래에서 본 결과들을 여기에서 그의 의지로 바꿀 수 있는 것인지 확신이 없었다.
2020년에서, 2002년에 정시연이 죽었다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하지만 현재의 2002년에서 ‘아직은’ 시연의 사망이 기정사실은 아니다.
그리고 필웅이 크리미널 아카이브를 통해 가끔 (2002년 현재 시점에서) 가까운 미래의 사실을 보게 되는 경우도 있기는 했지만, 실제로 그 결과를 막는 데 성공한 적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았다.
‘저번 월흥 리조트의 붕괴 사건 때도 그랬지.’
그때도 리조트가 붕괴되기 전, 여러 사람의 크리미널 아카이브로부터 곧 리조트가 붕괴되리라는 사실을 유추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리조트가 붕괴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물론 크리미널 아카이브와 내가 미래에서 본 역사적 사실은 다른 문제긴 하지만, 만약 이것도 그렇다면?’
지난번 월흥 리조트 붕괴 사건을 겪은 이후로 필웅은 이런 생각에 자주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부정하고 싶었지만, 쉽게 부정하기 어려운 가능성.
그러나 그런 가능성이 있다는 것만으로 시연을 구하려는 시도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필웅은 생각을 정리하고 밝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초조하다니? 그런 건 아니야. 그냥 오랜만에 가 보고 싶어서 그래. 혹시 알아? 접근 각도를 달리해 보면 새로운 단서가 눈에 띌지도 모르잖아?”
“그렇긴 하지.”
다행히도 시연은 아무렇게나 둘러댄 필웅의 대답에 순순히 수긍했다.
필웅은 시연이 더 이상 캐묻지 않는 점에 대해 안도감을 느끼며 서둘러 자리를 정리했다.
“자, 그럼 내일 아침 일찍 떠나야 되니까 오늘은 일찍 쉬기로 하죠.”
모두가 들어가자, 필웅은 잠시 고민하다가 핸드폰을 꺼냈다.
‘지금 올라가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시연과 필웅의 수사자료를 다시 살펴봐야 하니 서울에 갈 필요성은 분명 있었다.
하지만 막상 서울에 올라가면 삼영, 그리고 이규필의 눈에 띄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는 어떻게 보면 당면한 적인 교단과의 싸움이었지만, 이제는 나아가 삼영과의 정면대결도 피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애초에 필웅이 교단과의 싸움을 시작한 것도, 교단으로부터 삼영의 약점을 잡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교단이 삼영과 손을 잡고 그들로서는 상상도 못 할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 냈으니, 그런 예측은 결국 크게 틀리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이 싸움의 전선은 확대될 것이다. 그만큼 그나 시연, 장경이 감수해야 하는 위험은 더 커질 수도 있었다. 필웅으로서도 이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기 어려웠다.
‘강유라에게 미리 얘기는 해 둬야겠지.’
필웅이 딱히 강유라에게 동료의식 같은 것을 느낀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약간의 미안함에 더 가까웠다.
필웅의 잘못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가 약속한 것과는 달리 강유라가 감금당하고 고초를 겪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필웅은 조금의 부채의식은 갖고 있었다.
필웅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가 강유라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슨 일이야?”
“내일 잠깐 서울에 올라가 봐야 할 것 같아.”
“서울에? 갑자기 왜?”
“기존의 수사 자료들도 다 모아서 새로운 단서가 없을지 찾아봐야 할 것 같아. 교단이 삼영과 수상한 사업을 벌이고 있는 건 확실해 졌고, 이제는 그 사업을 어디에서 벌이고 있는지만 찾으면 돼.”
“그래. 내일 떠나는 건가?”
“응.”
“알았어.”
강유라는 건조하게 전화를 끊었다. 필웅은 최대한 과도한 정보를 주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다행히 강유라도 딱히 캐묻지 않았다.
‘이제 진짜 전면전의 시작이군.’
필웅은 기지개를 켜면서, 앞으로의 싸움에 대비해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