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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로 개과천선-117화 (117/151)

117화 약에는 두 종류가 있다

과학수사대 건물.

“이게 뭔 소립니까?”

장경이 과학수사대로부터 받은 보고서를 읽다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과학수사대의 검사관이 보고서를 흘끔 보고는 대답했다.

“현재 알려진 제조법상 압수된 원료를 이용하여 마약류를 제조할 수 있는지는 불분명하다…라고 적혀 있네요.”

“아니, 그러니까. 그게 무슨 소린지는 알겠는데. 그럼 이 원료들은 대체 다 뭐란 말임까? 예?”

장경이 짜증스럽게 증거물들이 담겨 있는 봉투를 흔들며 물었다.

“뭔가 신경계에 작용할 수 있는 약물의 원료가 될 수도 있다는 것까진 알겠습니다. 하지만 신경계에 작용할 수 있는 약물의 종류는 수백 가지에요. 게다가 알려진 제조법 중에서는 이 원료로 마약을 만들 수 있는 방법도 없습니다. 무슨 세계 최고의 제약회사라도 사들여서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마약을 만든 게 아니라면요.”

검사관이 피곤한 말투로 대답했다.

“그 말씀은 진짜로 이 놈들이 돈만 있으면 새로운 마약을 만들 수도 있다는 것 아닙니까?”

“그럴 수도 있죠.”

“그럼 그렇게 쓰셔야죠.”

“이봐요, 형사님.”

검사관이 끼고 있던 장갑을 꺼내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던지면서 대답했다.

“제가 말한 ‘새로운 형태의 마약’이란 정말 인류가 이제까지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약품을 의미하는 겁니다. 현대의 많은 신약들은 결국 기존 약품들의 개선된 형태이거나 조금씩 효능을 바꾼 것일 경우가 많아요. 마약도 마찬가지구요.”

장경이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입을 내밀며 자리에 앉았다.

“그래서요?”

“마약 파는 놈들이 전부 다 바보라서 아직도 구닥다리 대마초나 코카인, 헤로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게 아닙니다.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마약이라는 건, 위에서 언급한 마약들의 단순한 개량품이나 변종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카테고리의 약품이라는 거에요. 세계 최고의 제약회사를 예로 든 건 그 정도면 반드시 가능하다는 게 아니라 마약 조직이 세계 최고의 제약회사를 운영한다는 극히 예외적인 상황에서도 가능할까 말까 한 일이라는 뜻이었습니다.”

말을 마친 검사관은 휘적휘적 걸어가 버렸다.

장경은 한 손에 보고서를, 한 손에 증거물 봉투를 들고 망연자실하게 서 있었다.

‘아니, 그러니까 뭐여? 도대체 뭘 만들 수 있는지도 모를 원료들을 그렇게 열심히 밀수를 해 왔다는겨?’

장경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일단 검사님들한테 알려는 드려야겠제.’

장경은 고개를 내두르고는 은신처로 향했다.

* * *

은신처.

시연은 한숨을 내쉬며 색이 바래고 칠이 벗겨진 대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때, 누군가가 갑자기 무언가를 그녀의 머리 쪽으로 내리쳤다.

-퍽!

“꺄악!”

시연은 간신히 재빨리 팔을 들어 공격을 막아냈다. 다행히 공격이 그다지 강하지 않아서 팔이 욱신거리기는 했지만 참을 만한 수준이었다.

시연은 빗자루인 듯한 무기를 잡아 쳐내고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자신을 공격한 사람의 멱살을 잡았다.

“너, 뭐야!”

시연은 씩씩거리며 그를 칠 듯 주먹을 들어 올렸다.

“잠깐! 잠깐만요! 이것 좀 놓고 얘기해요!”

멱살을 잡힌 남자가 질겁을 해서 두 손을 흔들었다.

시연은 그제야 비로소 멱살이 잡힌 남자를 바라보았다.

두꺼운 안경에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꼬질꼬질한 셔츠를 입은 남자였다.

“당신, 누구야?”

“내가 할 말이거든요? 당신 누구에요!?”

“나는… 서울남부지검 정시연 검사다.”

시연은 비로소 멱살을 잡은 손에 힘을 풀고 얼떨결에 대답했다.

남자는 거칠게 시연의 손을 뿌리치고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그러니까 당신이 왜 여기에 있냐구요?”

“나? 여긴… 내가 임시로 머무는 곳인데….”

“아니, 그러니까!”

남자가 짜증을 내며 외쳤다.

“내 집인데 왜 당신이 여기 머물고 있냐구요?!”

* * *

뒤늦게 돌아온 장경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시연이 그를 째려봤다.

“하나도 재밌지 않거든요? 저 팔에 멍들었다구요.”

“저놈한테 맞았다구요?”

“갑자기 대문에서 튀어나왔단 말이에요.”

“으하하! 그래도 저놈이니까 팔에 멍 드는 정도로 끝난 거죠. 저놈, 비리비리해서 파리채로 파리도 못 잡는 놈임다.”

“아니거든?”

안경을 쓴 남자가 투덜거리며 말했다.

“아무튼, 오해가 있었던 것 같네요. 전에도 말씀드렸죠? 원래 여기 살던 게 제 사촌동생이라고. 이쪽은 제 사촌동생 박지찬입니다. 이쪽은…”

“알아요. 무슨 검사님이시라고.”

“정시연 검사님이시다. 이분이 얼마나 대단하신 분인지 알어?”

“다짜고짜 멱살이나 잡는 사람이 무슨….”

시연이 그를 홱 돌아보며 말했다.

“이봐요, 애초에 갑자기 빗자루 들고 덤빈 게 누군데 그래요!”

지찬이 움츠러들면서 두 팔을 얼굴 위로 들었다.

“아, 알았어요.”

“아니, 제가 뭐 잡아먹기라도 해요?”

시연이 쏘아붙였지만 지찬은 대답 없이 그녀의 시선을 피하면서 우물쭈물 팔을 내렸다.

장경이 무언가 생각났다는 표정으로 시연을 바라보았다.

“아 참, 검사님. 조 검사님은요?”

“아직 안 들어왔는데요. 왜요?”

“그것이, 이번에 압수한 원료들 감식 결과가 나왔는데요.”

“오! 뭐라던가요? 역시 마약 원료겠죠?”

“그게 아니고… 아무튼 지금 국과수에서 알고 있는 제조방법 중엔 이런 원료를 사용해서 마약을 만드는 방법은 없답니다.”

“예!? 그럴 리가요?”

“저도 똑같이 물어봤죠. 근데 뭐 아무튼 뭐라더라? 세계 최고의 제약회사가 각 잡고 연구하지 않는 이상 이 원료들로 알려진 마약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시연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장경은 그때서야 지찬이 옆에서 멍하니 대화를 듣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장경은 지찬의 어깨를 툭툭 치며 반갑게 안부를 물었다.

“오랜만에 보니까 반갑구만. 유학은 끝난겨?”

“유학이요?”

시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찬과 장경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놈이 그래도 공부는 엄청 잘하는 편이라서, 글쎄 국가장학생으로 미국에서 유학을 하고 왔다는 거 아님까. 박사과정까지 최연소로 돌파했다고 하던디 사실이여?”

“열심히 하면 다 돼.”

지찬이 퉁명스럽게 내뱉으면서 자리에 앉아 장경이 사 온 치킨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열심히 한다고 다 되는 게 아닐 것인디? 가만, 너 전공이 뭐라고 그랬지?”

“약리학. 몇 번을 얘기해 줘야 아는 거야?”

“아, 맞다! 이번에 한국에는 완전히 들어온겨?”

“일단은 좀 쉬려고.”

가만히 얘기를 듣고 있던 시연이 퍼뜩 놀라 입을 열었다.

“약리학이라고요? 그러면 신약 제조에 대해서도 아세요?”

지찬은 아직도 경계심이 사라지지 않은 눈빛으로 흘끗 시연을 쳐다보더니 대답했다.

“향정신성 약품 연구가 제 세부 전공이긴 한데. 그건 왜요.”

시연이 기대감 가득찬 눈빛으로 장경을 보면서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장경도 자신도 모르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형사님?”

“예?”

시연은 다시 한번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장경도 얼떨떨하게 고개를 다시 끄덕였다. 시연은 마침내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그 증거물요! 증거물!”

장경은 잠시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다가 그제서야 화들짝 놀라 가죽 점퍼의 주머니에서 증거물을 꺼냈다.

지찬이 흥미가 생긴 듯 증거물 봉투를 들어 올렸다.

“이게 뭐야?”

“그것이… 우리가 이번에 압수한 증거물인디, 국과수에서도 통 뭔지 모르겠다고 하더라고. 혹시 이게 뭔지, 이걸로 뭘 만들 수 있는지 알아볼 방법이 있나?”

“그게 뭔데?”

“그 보니까 무슨 물질이라고 국과수에서 분석은 해 줬는데.”

장경은 한참 점퍼 안의 호주머니를 이리저리 뒤지다가 국과수의 분석 결과지를 찾아 지찬에게 건네주었다.

“흐음…”

지찬은 먹던 닭다리를 내려놓고는 결과지를 받아들고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잠깐만 있어 봐.”

지찬은 결과지를 들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노트북과 책을 펼쳐 놓고 고심하기 시작했다.

장경과 시연은 눈치를 보다가 슬쩍 지찬에게 다가갔다.

“뭐가 있어?”

“아 좀 기다려봐.”

지찬은 심드렁하게 대답하면서 이것저것 책과 바인더를 몇 권 더 꺼내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건…”

시연과 장경이 다시 조바심을 내려 할 때쯤, 지찬이 입을 열었다.

“뭔데!?”

장경이 닦달하듯 물었다.

지찬이 안경을 치켜 올리면서 대답했다.

“당연히 정식 허가된 약품은 아닌데, 이런 약품이 개발 중이라는 이야기는 들어본 것 같아.”

“무슨 약품인데?”

“나도 연구에 참여한 건 아니니까 정확한 건 모르지. 하지만 이 원료들이라면 분명 신경계에 직접 작용해서 사람을 최면 상태 비슷한 상태로 유도하는 약품을 제조하는 데 사용되는 것들로 알고 있어.”

시연이 인상을 쓰면서 재차 물었다.

“어, 그러니까, 이 원료들로 약을 만들면, 그 약으로 사람들을 최면 상태에 빠트릴 수 있다는 거에요?”

“이론적으로는 그렇죠.”

“최면 상태에 빠지고 나면?”

“글쎄요. 뭐 좀비처럼 걸어다니려나.”

장경과 시연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장경이 먼저 지찬에게 재촉하듯 물었다.

“그게 다여?”

“뭐가?”

“최면 상태에 빠지면 그냥 사람이 좀비처럼 걸어다니기만 하고 마는 거여?”

“나야 그냥 추측한 거지. 말했다시피 난 연구에 참여한 것도 아니고 실제로 이 약이 개발됐는지도 모른다니까. 단순히 정신이 멍해지게 하는 것 외에 다른 효능이 있을 수는 있지.”

지찬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시연이 장경을 뒤로 잡아끌었다.

“형사님. 예전에 저 구하러 왔을 때 뭔가 이상한 걸 봤다고 했죠?”

“예. 그 처음에 조 검사님이랑 기습을 당했을 때 습격한 애들 상태가 좀 이상했더랬죠.”

“어떻게요?”

“그것들, 딱 무슨 좀비 같더라니께요. 제가 위협사격도 했는데 도통 무서운 줄을 모르더란 말입니다. 아, 그렇다면…?”

“적어도 시제품은 성공했을 수도 있겠네요.”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필웅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어, 무슨 일이야? 빗자루는 왜 여기 나와 있어?”

“설명하자면 길어. 잠깐만 이리 와봐.”

장경과 이야기를 나누던 시연이 필웅을 불렀다.

“교단이 밀수하던 물품의 정체를 알아냈어.”

“정말? 신형 마약이었던 거야?”

“그게…뭐랄까. 좀 달라.”

시연은 지찬에게 들은 이야기와 장경과 방금 나눈 대화를 들려주었다.

“사람을 최면 상태로 빠트리는 약이라고?”

“그래. 게다가 정황상 시제품 개발에 이미 성공한 것 같아.”

필웅은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또, 또! 그거 하지 말라니까!”

“아, 미안.”

필웅은 간신히 사려물고 있던 입술을 놓고는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교단은 삼영과 공모해서 사람을 최면 상태에 빠트릴 수 있는 약품의 원료를 몰래 수입하고 있던 거로군.”

“맞아.”

“하지만 그렇게까지 해서 교단이 얻는 게 뭐죠? 마약은 분명히 수요가 있어. 그렇지만 사람들이 스스로 최면에 빠지기 위해 약을 사지는 않을 거 아님까?”

장경이 이해가 안 간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필웅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했다.

“이 약품은 팔기 위해 만든 게 아닙니다.”

“예? 그럼요?”

필웅이 심각한 얼굴로 대답했다.

“형사님, 약은 어떨 때 씁니까?”

“증상을 치료할 때나… 마약같이 뭔가 효과를 보고 싶을 때 쓰겠죠?”

“그럼 독약은요?”

“독약이요? 독약이야 다른 사람한테 먹이려고 쓰는 거 아님까.”

“그렇죠.”

필웅이 고개를 끄덕였다.

“약에는 두 종류가 있죠. 내가 먹을 약과 남을 먹일 약. 이놈들은… 이 약을 누군가에게 먹이기 위해 만들고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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