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사로 개과천선-116화 (116/151)

116화 아니야? 아니야

시연은 심문실에서 3원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오점순 씨. 심문을 시작하죠.”

3원로, 아니 오점순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게 부르지 말아 줄래요?”

“주민등록등본상 이름이 오점순인데 그럼 뭐라고 불러요?”

“영어 이름이 있어요. 제시카라고 불러줘요.”

시연은 가볍게 그 요청을 무시했다.

“오점순 씨. 관세법 위반, 특수공무집행방해 및 범죄단체 조직 혐의 모두 인정합니까?”

“오점순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제시카, 아니 오점순이 소리를 빽 지르며 책상을 탕 하고 쳤다.

시연이 인상을 찌푸렸다.

“오점순 씨, 이런 태도는 조사에 도움이 안 됩니다.”

“후. 변호사 불러줘요.”

“오고 있습니다.”

“아직 오지 않았잖아요. 묵비권 행사할래요.”

시연은 한숨을 쉬며 들고 있던 파일을 덮었다.

“오점순 씨. 잘 생각해 보세요. 오점순 씨는 현행범입니다. 변호사가 아니라 대법관이 와도 혐의를 벗을 수는 없어요.”

오점순은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물론 변호사가 오면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이 경우엔 그런다고 변할 건 별로 없어요. 변호사도 오히려 조사에 협조적으로 응하는 게 좋다고 할 겁니다.”

오점순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전 잘못한 게 없어요.”

“현장에서 경찰들에게 저항하고, 약품을 밀수했는데도요?”

시연이 보고서를 꺼내 서춘자에게 들이밀었다.

필웅과 장경이 현장에서 압수한 물품들은, 필웅이 이미 오점순에게 들은 대로 일련의 약품들이었다. 국내에는 판매되지 않는 희귀한 약품도 있었고, 용도를 알 수 없는 화학물질들도 있었다.

이미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약품들과 원료들의 성격을 조사해 달라고 의뢰한 상태였지만, 일단 대놓고 마약으로 보이는 약품들은 없었다.

시연은 오점순을 회유해 약품들을 밀수한 목적을 알아내려고 하는 참이었다.

‘단순한 밀수만으로는 부족해. 그 약품들을 사용해 뭘 하려고 한 건지 알아내야 해.’

시연은 초조함을 느꼈지만, 짐짓 태연한 척하며 슬쩍 보고서를 훔쳐보는 오점순을 바라보았다.

“무슨 약품인지 저는 몰라요. 그냥 좋은 약이라길래 들여온 거 뿐이라구요.”

오점순이 입을 비죽이며 말했다.

“뭔지도 모르는 걸 밀수하려 했다는 말을 저보고 믿으라는 건가요?”

“아무튼 전 몰라요. 전 그냥 수입해 온 물건들을 갖고 오라는 지시를 받았을 뿐이라구요. 무슨 약품인지 제가 알고 있었다는 증거를 갖고 오시던가요.”

오점순이 흥미를 잃은 듯 보고서를 시연 쪽으로 툭 던졌다.

시연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좋습니다. 누군가 지시했다고 하는데, 그게 누굽니까? 교주?”

“조사해 보세요.”

“이봐요, 오점순 씨.”

시연은 인상을 다시 쓰면서 말했다.

“누군가 시켰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누가 시켰다고 알려주지 않으면 우리로서는 당신이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가상의 인물을 꾸며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이렇게 다 뒤집어쓰고 평생 감옥에서 썩을 겁니까?”

오점순의 눈이 마침내 조금 흔들렸다.

시연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몰아붙였다.

“황대산이 협조해서 풀려나온 거, 잘 알고 있을 거예요. 우리는 당신들 같은 하수인에게는 관심이 없습니다. 누가 이 모든 일을 기획하고 지휘했는지를 알고 싶은 거예요.”

“변호사는 대체 언제 오는 거죠?”

오점순이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시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변호사가 온대도 저와 똑같이 얘기할 겁니다.”

“듣고 싶지 않아요.”

오점순은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입을 다물었다.

시연은 한숨을 쉬고는, 자료를 정리해서 일어섰다.

심문실에서 나온 시연은 필웅과 마주쳤다.

“뭔가 알아낸 게 있어?”

“입을 꾹 다물고 있어. 황대산처럼 얼치기는 아닌 것 같아.”

“협박도 안 통해?”

“어차피 변호사가 오더라도 달라질 건 없다고 얘기해 봤지만 안 먹혀. 아~ 단 거 땡긴다.”

필웅은 팔짱을 끼고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내가 얘기해 볼게.”

필웅은 시연에게 자료를 건네받아 심문실로 들어갔다.

오점순이 얼굴을 찌푸렸다.

“뭐죠, 이건? 선수 교대인가요?”

“그런 셈이죠.”

“선수가 바뀐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어요.”

오점순이 자신의 잘 다듬어진 손톱을 내려다보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당신은 아마 전부 다 뒤집어쓸 각오도 되어 있는 것 같군요.”

“대답하지 않겠어요.”

필웅은 오점순의 손이 조금씩 떨리는 것을 발견했다.

“당신이 어떻게 행동하든 우리는 교단의 원로 전부를 잡아들일 겁니다.”

“현장에는 나만 있었고, 다른 원로들은 있지도 않았어요. 무슨 명목으로 전부 다 체포하겠다는 거죠?”

오점순은 태연하게 맞받아쳤지만, 여전히 미세하게 떨리는 손은 감출 수 없었다.

‘역시… 이 여자는 자신의 실패로 교단 전부가 책임을 지는 걸 두려워하고 있어!’

필웅은 잠시 그녀의 손끝을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글쎄요? 이번에 압수한 물품의 조사가 끝나면, 우리는 정식으로 교단의 모든 지부에 대한 압수수색을 요청할 겁니다. 그 물품들이 어디로 흘러 들어간 건지 밝히기 위해서 말이죠.

그 과정에서 당연히 교단의 모든 원로들에 대한 조사도 진행할 겁니다. 지금 당장은 당신 혼자 다 뒤집어쓸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때 뿐입니다. 결국 교단은 와해될 거고, 당신은 현장에 있었으니 더욱 가중처벌될 수도 있겠죠.”

오점순의 표정이 조금씩 초조해졌다. 뭔가 안절부절못하고 있다는 것을 필웅은 직감할 수 있었다.

‘만약 입을 다물고 있으면 흐지부지 끝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자신이 입을 여나 열지 않으나 결과는 똑같고 심지어 자기만 가중처벌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필웅은 김영지가 해 준 이야기들을 떠올렸다.

’일단 교단은 원로들끼리 잘 알지 못해. 황대산이나 이원필은 비교적 오래된 원로여서 내가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다른 원로들은 다 어딘가에서 새로 나타난 놈들이라 잘 알지 못해.’

만일 그렇다면, 원로들 간에도 무조건적인 협력 관계보다는 알게 모르게 서로를 견제하는 분위기가 있었을 것이다.

최고원로인 김영지가 축출되고 심지어 감금되기까지 한 것만 봐도 그랬다.

필웅이 할 일은, 그런 그들의 잠재적인 경쟁의식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교단에는 충성하지만, 자기가 다른 원로들의 죄까지 떠안거나 그로 인해 다른 원로가 성공하는 꼴은 볼 수 없을걸.

어차피 네놈들은 종교집단도 뭣도 아닌 이익단체니까 말이야.’

오점순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어차피 그럴 거면… 나한테 진술을 들어봐야 무슨 소용이 있죠? 내 도움이 없어도 수사를 진행할 수 있다면서요?”

내용은 도발적이었지만 오점순의 목소리에는 왠지 모르게 자신이 없었다.

필웅이 두 손을 모아쥐고 진지한 태도로 말했다.

“물론 우리는 당신의 진술 같은 데에는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이 제안은 당신을 위한 거예요.”

“나를 위한 거라구요?”

“교단을 위해 충심을 다 바쳤는데, 자신의 책임이 아닌 일까지 전부 뒤집어쓰고, 다른 원로들이 당신의 공로까지 빼앗아 가는 걸 바라는 겁니까?”

“그걸 당신이 왜 신경 쓰죠?”

필웅은 잠시 강유라와 교단 사무실에 찾아갔던 날, 오점순과 술을 마셨던 때를 떠올렸다.

오점순은 필웅에게 개인적인 관심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비록 술을 마시면서 아주 중요한 정보를 캐내지는 못했지만, 오점순이 왠지 모르게 필웅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필웅은 잠시 속으로 심호흡을 하며 말했다.

“당신을 걱정해서 하는 말입니다.”

필웅은 짐짓 서글픈 표정을 지으며 상체를 테이블 너머 오점순 쪽으로 약간 기울였다.

오점순은 그의 시선을 피하며 뭐라 말할 듯 입을 달싹였다.

“뭐라구요? 잘 안 들립니다.”

“해 봐.”

“예?”

“멋대로들 해 보라고. 너희들은 우리를 이길 수 없어!”

오점순이 갑자기 악을 쓰며 필웅에게 달려들었다.

필웅은 간신히 의자를 뒤로 물리며 오점순의 공격을 피했다.

“우리가! 어떻게 쌓아 온 것들인데! 한낱 검사 나부랭이들 따위에게 빼앗길 것 같아?!”

조사관들이 신문실로 뛰어 들어와 오점순을 제압했다.

조사관들이 그녀의 팔을 붙잡고 책상에 엎드리게 했는데도 오점순은 계속해서 기세등등하게 외쳤다.

“두고 봐! 왕국이… 왕국이 이 땅에 내린다!”

필웅은 발버둥 치면서도 악을 쓰는 것을 멈추지 않는 오점순을 잠시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신문실을 나왔다.

‘이거야 원, 압수한 물품의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군. 그래도 약간은 효과가 있었던 것 같은데…. 나중에 다시 시도해 보자.’

* * *

필웅의 사무실.

조사관은 이미 퇴근한 후였다.

필웅은 자기의 책상 앞에, 강유라는 구석에 마련된 소파에 앉아 있었다.

강유라는 소파에 앉아 말없이 커피를 마셨다.

30분째였다. 필웅은 이것저것 서류를 정리하다가, 그녀를 보고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안 가냐?”

강유라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설명해 봐.”

“뭘?”

“그놈들이 갑자기 나를 납치한 이유에 대해서.”

“말했잖아. 나도 정말 몰랐다니까? 나도 그냥 너를 만나게 해달라고 들은 게 다야.”

“그런데 다짜고짜 나를 납치했다?”

“그래. 나야말로 묻고 싶다. 그놈들이 네게 뭔가 더 얘기한 건 없었어?”

“날 아빠한테 돌려보낸다고 했어.”

필웅이 조금 긴장하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래? 이번 거래에 대해서 뭔가 더 얘기한 건 없어?”

강유라가 그를 보지도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조필웅.”

“응?”

“내가 아빠한테 돌아간다는 게 무슨 뜻인 줄 알아?”

필웅의 얼굴에 의혹이 떠올랐다.

“무슨 뜻인데?”

“사회적으로 죽는 거야. 그냥 돼지우리의 돼지처럼 던져 주는 먹이만 받아먹다가, 어딘지 알 수 없는 감옥 같은 집에서 생을 마치게 되겠지.”

필웅은 할 말을 잃었다. 일전에 본 적 없던 침울함이 강유라에게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거 유감이네.”

“조필웅. 나에게는 지금이 유일한 전환점이야. 내가 그나마 자유로울 때 아빠와 할아버지를 실각시키지 못하면, 내게 남은 길은 죽음보다 못한 삶밖에 없어.”

전에 없이 비장한 강유라의 말투에 필웅도 자신도 모르게 진지해졌다.

“알고 있어.”

“나는….”

강유라는 한숨을 내쉬더니 잠시 말을 끊었다.

“나는… 네가 필요해.”

집중해서 듣고 있던 필웅은 순간 당황했다.

“뭐?”

“너의 능력, 너의 직위, 너의 끈질긴 근성. 그 모든 게 지금 나에게 절실해. 그러니까 물을게.”

강유라가 비로소 천천히 필웅을 돌아보았다.

필웅은 강유라가 더없이 지쳐 보인다고 생각했다.

강유라가 천천히 입을 뗐다.

“솔직히 말해 봐. 나를 갖고 거래한 게 아니라고.”

“아니라니까.”

“내 눈을 보고 말해.”

필웅이 강유라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그럼 됐어.”

강유라가 코트를 집어 들며 일어섰다.

필웅이 황당해하며 물었다.

“됐어?”

“응. 됐어.”

“야, 이럴 거면 애초에 왜!?”

“그냥.”

강유라가 문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다가 말했다.

“그냥 궁금했어. 너희들은 내가 믿어도 되는 사람들인지.”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아니, 잠깐만! 그래서 이 거래나 교단의 계획에 대해서 뭔가 얘기 들은 게 있냐고?”

강유라는 말없이 고개를 흔들고는, 대답 없이 사무실 문을 나섰다.

필웅은 망연자실하게 그녀가 나간 문 쪽만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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