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그렇다면 시연은 안전하겠지
필웅은 다시 한번 물었다.
“우리도 그놈들처럼 꼭 사람 목숨을 수단으로 써서 목적을 달성해야 하겠습니까?”
김영지가 변명하듯 대답했다.
“뭐 꼭 그렇다기 보다는… 일단 우선순위를 조정할 수밖에 없다는 거다. 솔직히 강무완도 제 자식인데 강유라를 죽이기야 하겠나?”
“하지만 얼마든지 다른 방식으로 해칠 수는 있습니다! 평생 가둬 놓을 수도 있단 말입니다. 단지 강유라를 만나게만 해 달라고 해서 그렇게 약속하고 데려간 건데, 마치 우리가 강유라를 함정에 빠트린 꼴이 됐잖습니까!”
“그게 대체 우리와 무슨 상관이지? 설령 그게 함정이면 또 어때? 애초에 그 여자도 사실은 한패가 아니라는 보장도 없지 않나?”
김영지와 필웅의 언성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잠깐만요.”
시연이 두 사람의 앞을 가로막으며 끼어들었다.
“결국 지금 문제는, 우리에게 남은 3일이라는 시간 동안 강유라 구출과 밀수 현장 급습이라는 두 가지 일을 다 처리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다는 거잖아요?”
필웅과 김영지, 장경이 차례로 서로를 마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럼 두 가지 일을 한 번에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장경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예? 그런 게 가능합니까? 우리는 일단 강유라가 어디 잡혀있는지도 모르잖슴까.”
시연의 말을 들은 필웅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가, 입을 열었다.
“계획이 있기는 합니다.”
필웅은 말을 꺼내놓고도 망설였다.
‘이 계획은 너무 위험해. 하지만 두 가지 문제를 한 번에 처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야.’
필웅은 잠시 시연을 돌아보았다.
시연을 위험에 처하게 하는 방법은, 어떤 방식이든 별로 내키지 않았다.
‘잠깐…’
필웅은 문득 2020년대에서 봤던 시연의 기사를 떠올렸다.
‘시연이의 사체가 한강변에서 발견됐다고 했었어. 만약 시연이가 영산에서 죽음을 맞게 된다면, 위험하게 시신을 그 멀리까지 운반해야 할 이유가 없지.
오히려 시연이가 영산에 있는 한, 시연이는 안전해. 계획이 잘만 된다면 시연이가 위험에 빠질 일도 없을 거고.’
필웅은 탐탁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시연의 사체가 한강변에서 발견됐다는 사실로 인해 시연이 한강에서 멀리 떨어진 이 시골, 영산에서는 안전할 수도 있다는 점을 다시 한번 되새겼다.
고민을 마친 필웅이 자신의 계획을 모두에게 털어놓았다.
김영지가 고개를 저었다.
“놀라울 정도로 미친 계획이군.”
필웅이 이어 뭐라고 하려는 순간, 김영지가 말을 이었다.
“나는 하겠어.”
“진심입니까?”
필웅이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김영지가 어깨를 으쓱했다.
“솔직히 생각 같아선 이렇게 번거롭게 할 게 아니라 밀수 현장을 덮치는 데 더 공을 들여야 할 것 같긴 하지만, 굳이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겠다고 박박 우기니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하지만 이건 너무 위험하지 않슴까? 강유라를 구하기 위해 또 다른 위험을 새로 만들어내는 꼴이잖아요?”
“이봐, 형사 양반. 원래 원하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해서는 위험을 감수할 줄 알아야 하는 거야. 위험하지 않으면서 원하는 모든 것을 얻는 방법 따위는 없어.”
김영지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며 내뱉었다.
필웅은 입술을 조용히 깨물었다. 그리고는 시연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시연이 가장 위험해지는 계획이었다. 필웅은 시연의 의사에 반해 계획을 추진할 생각은 없었다.
“정말… 괜찮겠어?”
시연은 짐짓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씩 웃어 보였다.
“괜찮아. 나도 강유라 그 여자가 이대로 잡혀가 버려서 생사불명이 되는 꼴을 보고 싶진 않거든. 어쨌든 요새는 도움도 조금 받았고…”
모두가 필웅을 바라보았다.
필웅은 자신의 결단만이 남았음을 깨달았다.
필웅은 나직하게 말했다.
“좋습니다, 해 보죠.”
* * *
영산항.
필웅은 초조하게 손을 비비며 입김을 불고 있었다.
유독 추운 날이었다.
그때 저 멀리 3원로가 다부진 체격의 일꾼들을 여럿 데리고 나타났다.
“일찍 오셨네요.”
3원로가 먼저 그를 알아보고는 인사했다.
하지만 필웅을 보는 눈빛은 싸늘했다. 지난번 필웅이 도망치듯 빠져나간 일을 잊지 않은 모양이었다.
필웅은 모른 척 가볍게 턱짓으로 인사했다.
“물건은 언제 들어오는 겁니까?”
“성질도 급하셔라. 이제 10분 이내에 배가 도착할 거에요.”
3원로가 주위를 둘러보며 대답했다.
“약속하신 대로 항구는 비워 놓으셨겠죠?”
필웅은 지난 며칠간 항만관리공사를 설득하느라 애를 먹었던 것을 떠올렸다.
항만관리공사 측은 영장도 없이 단지 수사를 위해 특정 부두의 경계를 완화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입장이었다.
그럼에도 필웅은 마약 수사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하게 밀어붙여 간신히 1시간의 말미를 받을 수 있었다.
“여차하면 저희가 바로 진입할 겁니다.”
항만관리공사의 실무자는 단단히 주의를 주었고, 필웅은 알았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주어진 시간은 1시간 정도…. 그 안에 계획을 전부 마쳐야 해.’
필웅은 손을 불안하게 쥐었다 폈다 하면서 긴장을 풀기 위해 노력했다.
“항만은 비워져 있어요. 짐을 내리는 데 필요한 시간 정도는 확보해 놨습니다.”
“좋아요. 이번 건이 성공하면 검사님과 더 깊은 관계를 맺는 것도 고려해 볼게요.”
3원로가 깊은 관계라는 단어에 강세를 두며 말했다.
필웅은 별말 없이 3원로와 뒤에 늘어선 장정들을 슥 둘러보았다.
몇몇은 무언가를 숨긴 듯 등허리 쪽의 옷이 불쑥 튀어나와 있었다.
‘설마 무기인가? 생각보다 저항이 거셀지도 모르겠군.’
필웅은 침을 꿀꺽 삼키고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슬슬 나타날 때가 됐는데.’
필웅이 주위를 자꾸 이리저리 살펴보자 3원로가 웃는 얼굴로 그러나 새침한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 더 오실 손님이라도 있으신가 봐요?”
“예? 그럴 리가요. 이렇게 사람이 없는 항구는 처음 나와 봐서 신기해서 그런 겁니다.”
필웅이 약간 당황해서 둘러댔다.
다행히 3원로도 곧 도착할 배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는지 더 캐묻지는 않았다.
그때, 저 멀리 희뿌연 새벽 안개 속에서 배 한 척이 모습을 드러냈다.
3원로가 필웅에게 저쪽을 보라는 듯 배 쪽으로 손가락을 뻗었다.
필웅도 배를 발견하고는, 숨죽여 배가 선착장에 정박하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배가 정박 작업을 마치고 완전히 정지했다.
“자, 시간이 얼마 없으니 얼른 작업 시작하세요.”
3원로가 일꾼들을 독려하며 배에서 짐들을 내리기 시작했다.
그때 누군가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하아압!”
그 누군가는 재빨리 일꾼들 하나에게 다가가 멱살을 잡고 바닥에 팽개쳤다.
다른 일꾼들이 그 모습을 보고 두 눈이 휘둥그레져서 하나둘 그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복면을 쓴 형체는 그 후로도 두어 명을 더 쓰러트리고는 3원로에게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느새 배에서 내린 다른 일꾼들까지 가세해 그를 덮쳐왔다.
“잡았다!”
건장한 남자 둘이 양쪽에서 팔을 붙잡자 그 형체도 어쩔 수 없이 그 자리에서 멈춰섰다.
“이거 놔! 안 놔!?”
다른 남자가 다가와 거칠게 복면을 벗겼다.
복면 아래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시연이었다.
“시연? 네가 어떻게 여길…!”
필웅이 당황한 목소리로 외쳤다.
3원로는 그를 흘긋 돌아보더니 차갑게 말했다.
“뭐죠, 이건? 심심할까 봐 마련한 막간극인가요?”
“아니, 이건… 전 모르는 일입니다. 저 멍청이가 여길 어디라고…!”
3원로는 여전히 의구심이 가득한 눈초리로 시연과 필웅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시연에게 뚜벅뚜벅 걸어갔다.
“혼자 여길 들이닥치다니 배짱도 좋네요. 이것도 조필웅 검사님과 같이 짠 건가요?”
시연이 악다구니를 쓰며 발버둥을 치다가, 3원로가 다가오자 그녀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조필웅? 하! 저 개자식이 돈에 눈이 멀어서 당신들과 몰래 거래를 시도한 걸 내가 모를 줄 알았어? 저런 썩어빠진 놈이랑 내가 같이 일할 수 있을 것 같아?”
“닥쳐!”
어느새 그녀의 앞으로 다가온 필웅이 시연의 뺨을 세차게 갈겼다.
3원로도 그 기세에 눌려 흠칫하고는 뒤로 살짝 물러섰다.
“네가 운운하는 그 빌어먹을 정의감에 휘둘리다가 내가 이 꼴이 됐는데, 아직도 그 알량한 정의 타령이냐? 지금 내 꼴을 봐!
너야 아직도 서울남부지검에서 잘 나가는 검사 대접받으면서 일할 수 있겠지만 이제 나는 다시 돌아갈 수 없어! 평생 이 냄새 나는 시골 바닥에서 썩어야 한다고!”
“조필웅, 너…!”
“듣기 싫어. 3원로님, 이 여자는 제 눈앞에서 치워 주세요.”
3원로는 약간 넋이 빠진 채로 시연과 필웅의 거친 논쟁을 지켜보다가 필웅의 말에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어… 그래야죠. 얘들아, 이 여자도 끌고 가서 가둬 놔.”
“예.”
이미 시연을 붙잡고 있던 장정들이 그녀를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조필웅! 이 개XX야! 너 내가 지켜볼거야!”
“시끄러워! 이번 일만 끝나면 너 같은 년은 다시 볼 일도 없어!”
시연이 끌려가면서도 악을 쓰자 필웅도 거칠게 쏘아붙였다.
3원로가 재밌다는 듯 필웅을 바라보았다.
“두 분이 이렇게 사이가 안 좋은지는 미처 몰랐네요.”
“전부터 재수 없는 여자였습니다. 일이나 마저 하죠.”
필웅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3원로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남자들에게 턱짓을 했다. 남자들은 묵묵히 짐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때, 항구의 한구석에서는 또다른 누군가가 차에 시동을 걸고 있었다.
* * *
남자들은 시연의 눈을 가리고 입에 재갈을 물린 후 차를 타고 이동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들은 차를 세우고는 뒷좌석에 처박힌 시연을 끄집어냈다.
‘여기가 어디지? 항구에서 좀 이동한 것 같기는 한데… 눈이 가려져 있으니 알 수가 있나.’
시연은 답답해하면서 시각 대신 청각과 후각에 정신을 집중했다.
아직 새벽이슬이 마르지 않는 싱그러운 흙의 냄새, 풀 냄새, 간간이 새소리가 들려왔다.
‘산기슭인 건가? 기도원이나 교회 느낌은 아니야. 또 다른 비밀 아지트인 건가?’
시연은 긴장하면서 어떻게든 주위를 살펴보려고 애썼지만, 워낙에 안대가 두꺼워서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남자들은 그녀를 끌고 가다가, 콘크리트 바닥에 그녀를 내팽개쳤다.
“아야!”
시연이 비명을 지르자, 남자들은 킬킬거리며 안대와 재갈을 풀어주었다.
“얌전히 있어. 오늘 거래 끝나면 천천히 귀여워해 줄 테니까.”
시연이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것도 없는 빈방이었다. 기도원같이 사람들을 가두는 목적만으로 지어진 곳은 아닌 듯했다.
남자들은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남자들이 멀어지면서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원, 요샌 여자들이 더 거칠다니까.”
“그러니까. 여기 가둬 놓은 다른 여자도 밥을 주려고 할 때마다 식판을 다 엎어 버린다며?”
“그럼 그 여자는 지금까지 밥도 한 끼 안 먹은 거야?”
“뭐 우리가 알 바는 아니지. 어, 김씨. 3원로님이 시키셔서 한 명 더 데리고 왔어.”
“아, 그래? 좀더 쉬다 가지 그래.”
“안돼. 오늘 물건 들어오는 날이야.”
시연을 데리고 왔던 남자들의 목소리는 그 후로 들리지 않았다. 이미 돌아간 모양이었다.
그때, 간수인 듯한 남자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 당신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