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독 같은 건 안 탔으니 안심해
3원로는 개인적으로 필웅에게 관심이 있는 모양이었다.
3원로는 어디선가 필웅이 듣도 보도 못한 싱글몰트 위스키를 가져오더니 필웅에게 따라주었다.
“그래서, 검사님.”
3원로가 은근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 열심히 사는 거에요?”
“뭐라구요?”
필웅이 슬쩍 위스키 향을 맡아 보고는 잔을 내려놓았다.
뭘 탔는지도 모를 술을 덥썩 받아 마실 수는 없는 일이었다.
3원로는 그런 그를 보고 씩 웃더니 같은 병에서 위스키를 따르고는 쭉 들이켰다.
“독 같은 건 안 탔으니 안심하세요.”
필웅은 찝찝한 표정으로 잔을 들어 슬쩍 한 모금만 마셨다.
“아직 질문에 대답 안 하셨는데.”
“왜 이렇게 열심히 사냐구요?”
“그래요.”
3원로가 잔을 들고 일어서 천천히 그의 앞에서 서성이기 시작했다.
“영산에 오기 전에 한 일들 들었어요. 재벌들이랑 싸우면서 여럿 잡아넣었다고. 아, 강무완 사장님의 아들도 잡아넣었다면서요?”
“딱히 재벌과 싸우려고 한 건 아니고, 어쩌다 보니 잡아들인 마약사범이 강 사장님의 아들이었을 뿐입니다.”
필웅은 신중하게 말을 고르며 대답했다.
어쨌든 여기서 다음 목표는 강무완 사장이라고 친절하게 알려 줄 필요는 없었다. 적어도 같은 편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 중요했다.
3원로가 미소를 지으며 의자를 끌어 그의 옆에 앉았다.
“후회하지는 않나요? 지금의 당신은, 예전의 당신과는 좀 다른 모습인 것 같네요.”
3원로는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눈은 날카롭게 필웅을 주시하고 있었다.
‘일전에는 재벌가고 뭐고 전부 다 잡아들여 넣고는 이제 와서 갑자기 삼영과 연관이 있는 것이 뻔한 자기들과 손을 잡으려고 하는 게 이상하다는 말이겠지.’
필웅은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자기가 생각해도, 강무완이고 강준수고 지경득이고 내로라하는 재벌가의 일원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들여 놓고는 갑자기 손을 잡겠다고 하면 뭔가 수상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했다.
첫 번째 테스트는 그가 순순히 그들의 말을 듣고 강유라를 데려오는지였다면, 두 번째 테스트는 취중진담인 셈이었다.
필웅은 호기롭게 남아 있던 술을 쭉 들이키고는 잔을 탕 하고 내려놓았다.
“지금 절 의심하는 겁니까?”
3원로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빙글빙글 웃으며 술을 한 모금 마실 뿐이었다.
“이상하게 생각되리라는 점 이해합니다. 예전엔 두려울 게 없는 사람처럼 삼영의 지배자들을 잡아넣던 인간이, 갑자기 사업에 끼워 달라고 하니까요.”
3원로는 그가 정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다는 듯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필웅은 짐짓 여유 있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건 몇 년 전의 일입니다. 지금 이 꼴을 보세요. 몇 년 전만 해도 저는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검사였습니다. 매일같이 신문에 제 얘기가 나왔죠.
그때만 해도, 그 모든 명예와 위신이 지속될 줄 알았습니다.”
필웅은 3원로에게 손짓해 술을 더 달라고 요구했다. 3원로는 말없이 술을 더 따라주었다.
필웅은 너무 취하지 않도록 주의하며 술을 약간 더 마시는 척하고는, 화를 못 이기겠다는 듯이 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지금 이 꼴을 보세요. 서울에 살 땐 어디 붙어있는지 알지도 못했던 동네에 처박혀 있단 말입니다. 아마 전 영영 서울로 복귀할 수도 없겠죠. 처음엔 정직, 다음엔 좌천. 이제는 지긋지긋합니다. 이기지 못하는 싸움에는 이제 지쳤어요.
명예 따위 다 필요 없고 다 때려치우고 돈이나 벌고 싶네요. 아시다시피 공무원 봉급 따위로 돈 벌긴 글렀으니까.”
돈만 밝히는 타락한 검사처럼 보이게끔 최대한 신경 써서 말했다.
필웅은 취한 사람처럼 고개를 푹 떨궜다.
하지만 눈은 여전히 몰래 3원로의 반응을 지켜보고 있었다.
3원로는 마침 필웅 쪽을 보고 있지 않았다. 무언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
잠시 후, 3원로가 입을 열었다.
“어리석은 사람이군요. 애초에 삼영을 상대로 이길 생각을 하다니.”
“그래도 지금은 깨닫지 않았습니까.”
3원로가 슬쩍 그를 보며 웃고는 필웅의 잔에 자신의 잔을 가볍게 부딪혔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하지만, 그 실수를 돌이킬 능력이 있는지는 사람마다 다르지요.”
필웅은 술을 마시는 척하면서 입에 머금었다가, 살짝 뱉으면서 소매로 입을 닦는 척했다.
‘더 이상 술을 마시면 위험해.’
필웅은 마른 침을 삼켰다.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어떻게든 그녀를 구슬려서 교단이 삼영과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인지 아주 사소한 단서라도 알아내야 했다.
쉽지는 않겠지만, 교단의 고위직과 대면할 수 있는 기회가 흔한 것은 아니었다.
‘이용할 수 있는 기회는 최대한 이용해야 해!’
“저… 그런데.”
필웅이 일부러 약간 취한 듯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밀수해 오는 물품이 뭡니까?”
3원로는 잔을 들어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느릿느릿하게 대답했다.
“뭐… 이것저것. 그때 가서 보시면 되지 않겠어요?”
“3원로님.”
필웅이 진지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저는 지금 밀수하려는 물품이 묻지도 않은 상태에서도 밀수를 도와 드리겠다고 이미 약속했습니다. 이제는 적어도 그 물품이 무엇인지, 어디다 쓸 것인지 정도는 알아도 되지 않겠습니까?”
3원로가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입을 열지는 않았다. 필웅은 답답함을 느꼈다.
그때, 필웅은 무엇인가가 그녀에게서 흐릿하게 나타나는 것을 발견했다.
‘이건… 크리미널 아카이브?’
하지만 집중해서 보지 않으면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만큼 흐릿한 영상이었다. 이제까지는 여러 사람과 함께 있거나, 강유라가 끌려가는 등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필웅은 술을 마시는 척하면서 열심히 크리미널 아카이브를 읽어 보려고 노력했다.
“무슨 생각해요?”
필웅이 아무 말이 없자, 3원로가 조용히 말을 건넸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필웅은 말끝을 흐리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3원로님이 교단의 재산을 관리하고 있는 건가요?”
3원로의 그걸 왜 묻냐는 듯 빤히 필웅을 마주 보았다.
“그런 편이죠. 그건 왜요?”
“부동산도요?”
3원로의 얼굴에 미미한 동요의 기색이 지나갔다.
“물론 부동산도 있죠.”
‘시도해 볼 만하겠군.’
필웅은 속으로 생각하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가 3원로의 크리미널 아카이브에서 읽어낸 것은 단지 ‘부동산 사기’라는 낱말뿐이었다.
물론 대단한 사건도 아니고, 피해자가 여러 명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마도 그래서 크리미널 아카이브가 제대로 나타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교단의 사업 실무를 맡은 고위직에게서 나타난 것이라면 얘기가 달랐다.
어쩌면 그녀가 교단의 부동산으로 사기를 칠 계획인지도 몰랐고, 예전에 이미 사기를 친 전력이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둘 중 어느 것이든, 교단의 사업을 관장해야 하는 고위직이 교단의 부동산을 가지고 장난질을 칠 가능성이 있다는 건 별로 알리고 싶은 사실이 아니겠지.’
“부동산으로 돈을 불리는 방법을 꽤 잘 알고 계신 것 같던데요.”
필웅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떠보기 시작했다.
3원로의 표정에 경계심이 떠올랐다.
“무슨 얘기죠?”
“그렇잖아요. 주인 몰래 부동산을 판다거나, 부동산을 이중으로 판다거나.”
3원로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술잔을 기울였다.
그러나 침묵이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 말에 어느 정도 흔들렸다는 의미임을 필웅은 직감할 수 있었다.
한동안 이어지던 침묵을 3원로가 어렵게 스스로 깼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잘 모르겠군요.”
“아, 별 건 아닙니다.”
필웅이 술잔을 들어 술잔에 담긴 호박색의 액체를 감상하면서 말했다.
“아무래도 교단도 당신이 어떻게 돈을 버는지 알고 싶을 것 같아서요. 물론…”
필웅은 일부러 뜸을 들이다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당신이 돈을 번다고 교단도 돈을 벌게 되는 건 아니겠지만요.”
3원로가 재미있다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지금 협박하는 건가요?”
“서로 얻어갈 게 있는 거래라고 해 두죠.”
“재밌네요.”
3원로는 일어나더니, 머리를 풀고 테이블에 앉아 다리를 꼬며 필웅을 바라보았다.
“내가 교단의 돈을 빼돌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근거는?”
“당신의 태도가 이미 모든 걸 말해주고 있지 싶은데요.”
“무척 설득력 있네요.”
3원로는 필웅의 예상만큼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상황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좋아요. 뜨뜻미지근한 샌님보다는 권모술수에 능한 계략가 쪽이 더 마음에 드니까.”
3원로가 갑자기 허리를 숙여 필웅의 넥타이를 잡아당겼다.
필웅은 초연한 척하려고 애썼다. 그녀의 짙은 향기가 갑자기 더 진해진 듯했다.
“궁금한 걸 말해 봐요.”
필웅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먼저, 밀수하려는 물품.”
“일종의 약품이에요. 국내에서 아직 사용 허가가 나지 않은.”
“그런 걸 왜 밀수하려고 하는 거죠?”
“내 차례에요. 애인 있어요?”
필웅이 눈을 깜빡거렸다.
“뭐요?”
“애인 있냐구요. 물론 크게 상관은 없지만.”
“없습니다. 이제 대답해 주시죠.”
3원로가 큭큭 거리며 웃었다.
“이상한 데서 당황하는 걸 보니 재밌네. 약품을 어디다 쓰겠어요? 복용하려고 들여 오는 거지.”
“그러면 왜 허가도 나지 않은 약품을 밀수하는 겁니까?”
“이봐요, 검사님. 정식으로 허가받기를 하나하나 기다려서 수입하면 얼마나 오래 걸리는지 알아요? 지금도 이 약이 필요한 사람들은 널렸다구요.”
필웅은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어쨌든 밀수 약품에 대한 수요는 얼마든지 있다. 설령 허가가 국내에서 나지 않은 약품이라고 해도 효과만 있다면 어떻게든 손에 넣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넘쳐날 것이다.
그러나 필웅은 왠지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들었다.
“그게 답니까?”
3원로는 필웅의 넥타이를 더 세게 잡아당기며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다른 궁금한 건 없어요? 슬슬 지루해 지려고 하네.”
필웅은 더 이상 그녀에게 얻어낼 정보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웅은 조용히 그녀의 손을 잡아 밑으로 잡아 뺐다.
“일단 오늘 궁금한 건 다 알아본 것 같군요. 그럼 전 취해서 이만.”
3원로가 뭐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필웅은 재빨리 일어서 거의 달려가듯 방에서 뛰쳐나갔다.
뒤에서 뭐라고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필웅은 강철 같은 신경으로 무시했다.
‘일단 대충 뭘 갖고 오려는지는 알겠어. 하지만 왜?’
겨우 허가받지 않은 약품을 들여오기 위해 이렇게까지 연막을 친다는 것이 필웅으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분명 뭔가 더 있어… 대체 그게 뭘까?’
필웅은 해결되지 않는 궁금증을 가진 채 은신처로 돌아갔다.
* * *
필웅은 교단 사무실에서 있었던 일을 모두에게 이야기했다.
“교단이 강유라를 데려갔다면, 단순히 강유라를 삼영에 ‘모셔다드리려고’ 잡아간 건 아닐 수도 있어.”
김영지가 낮은 목소리로 우울하게 말했다.
필웅이 긴장해서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지금 교단의 원로들은 기본적으로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수상한 놈들이니까.”
김영지는 한숨을 쉬었다.
필웅은 온갖 변장에 능하고 서슴없이 사람을 죽이는 당신이야말로 가장 수상한 인물 아니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넘어왔지만, 간신히 말을 삼켰다.
“혹시 어디에 강유라를 구금하고 있을지 의심 가는 곳은 없슴까?”
장경이 참지 못하고 다급하게 물었다.
“미안하지만 딱히 없군. 알다시피 교단의 세력은 전국 곳곳에 퍼져 있고, 위장 회사도 수십 개야. 그중 어디에 강유라를 가둬놨을지 누가 알겠나?”
“그런”
“그런데 그 여자가 어디에 잡혀있는지에 왜 그렇게 신경을 쓰는 거지?”
김영지가 묻자 장경도 그러고 보니 이상하다는 듯 필웅을 돌아보았다.
“사실 찝찝한 건 사실이지만 설마 삼영과 손을 잡은 교단이 그 여자를 해코지할 리도 없지 않겠슴까?”
필웅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자신이 유추하고 있는 삼영과 교단과의 세력 관계를 설명했다.
“그렇지 않아요. 삼영이라고 모두 한패가 아니라는 건 강유라가 삼영에서 쫓겨나온 시점에서 분명해졌습니다. 지금 교단이 손잡고 있는 건 그 강유라를 쫓아낸 강무완, 강중민이 이끄는 삼영이에요.
강무완은 강유라를 죽일 생각까진 없을지 몰라도 강유라를 잠재적인 위협이라고 생각하는 인물입니다. 지난번엔 가택연금 정도로 끝났지만 이번에도 그 정도로 정리될지 알 수 없어요.”
“하지만 그건 뭐 즈그들 집안싸움인 것인디, 우리가 관여할 필요까지 있겠습니까?”
그의 무신경한 말에, 필웅은 조금 충격을 받았다.
필웅은 장경의 말에 반박하려다가, 시연과 김영지의 표정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들 역시 내키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지 않냐는 표정이었다.
“지금…우리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강유라가 어떤 식으로 희생되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