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교단과 만나다
강유라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냥 가면 되는 거잖아? 날 죽이겠다는 것도 아니고.”
필웅도 떨떠름하게 수긍했다.
“내 생각이긴 하지만… 죽이려면 굳이 단순히 너를 만나게 해달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 같아.”
“내 생각도 그래.”
“하지만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는 것도 사실이야. 그래도 갈 거야?”
강유라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달리 방법이 없잖아? 네가 다른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했지만, 그 방법이 있기나 한지 찾기까지 얼마나 걸리는지 알 수도 없는 거고.”
“그렇긴 하지만….”
“아, 정말 답답하네!”
강유라가 테이블을 탕 하고 쳤다.
필웅이 움찔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차피 내가 조건을 받아들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날 만나러 온 거 아냐? 내가 받아들여 주겠다는데 뭐가 문제야?”
“사실 네가 별다른 대가 없이 조건을 받아들이리라고는 예상 안 했거든.”
“누가 대가가 없대?”
필웅이 상체를 약간 앞으로 숙이며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대가가 뭔데?”
“내가 삼영에 복귀하기 위해 내가 요구하는 걸 전부 다 들어줄 것.”
“전부 다? 그건 범위가 너무 넓잖아.”
필웅이 난색을 표하자, 강유라가 혀를 차며 말했다.
“안심해. 사람을 죽여 달라거나 납치하라는 등 무리한 걸 시키지는 않을 테니까. 어쨌든 나도 나름 위험을 감수하는 건데, 넌 그 정도 약속도 못 해 주겠다는 거야?”
강유라가 그렇게까지 이야기하니 필웅으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좋아. 그렇게 하지.”
“딜!”
강유라는 남은 커피를 한입에 털어 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장소랑 시간은 따로 알려줘.”
강유라는 짐짓 쿨하게 내뱉고는 다방을 나섰다.
하지만 그녀의 어깨는 불안감과 두려움으로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괜찮겠지…?’
* * *
다음 날 밤.
강유라와 필웅은 일전 필웅이 방문했던 교단의 사무실에 와 있었다.
잠시 후 교단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전에도 본 적 있는 3원로라 불리는 여자와 다른 남자였다.
남자는 안경을 쓰고 있었고, 체구가 매우 건장하지는 않았지만 무척 단단해 보였다.
필웅이 물었다.
“서춘주 님은 어디 계십니까?”
남자가 피식 웃으며 안경을 고쳐 썼다.
“당신이 함부로 부를 이름도 아니고, 이런 자리에 부르면 나오시는 분도 아니시다.”
“거래를 제안한 건 당신이 아니잖습니까?”
필웅이 긴장한 채로 반박했다.
3원로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왜 이렇게 딱딱하게 구실까~? 우리, 초면도 아니잖아요?”
“이건 신뢰의 문젭니다.”
“오늘 서춘주 님은 바빠서 못 오세요. 아니면 저희랑 거래하는 게 싫으신 건가?”
3원로가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필웅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강유라는 3원로에게서 짙게 풍기는 향수 냄새에 질겁을 하면서 약간 뒤로 물러났다.
“뭐야, 이 싸구려 향수 냄새는?”
그러자 3원로가 매섭게 강유라를 째려보았다.
“이분이 강유라 씨인가요?”
“그래.”
강유라가 대신 대답했다.
“반가워라~ 그런데 예의는 어디다 두고 오셨을까? 삼영에서 쫓겨나면서 놓고 나오셨나?”
3원로는 화사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지만 그 내용은 누가 봐도 조롱이었다.
강유라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나는 짐 놓고 올 데라도 있지, 너희들은 놓고 올 데도 없어서 이런 거적때기 같은 곳에서 지내는 것 아니야?”
“뭐라구?”
마침내 3원로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지며 강유라에게 다가오려는 순간, 필웅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만. 약속대로 강유라를 만나게 해 줬으니, 당신들도 거래를 이행하세요.”
3원로는 잠시 물끄러미 필웅을 쳐다보다가, 뒤에 서 있던 남자에게 턱짓했다.
남자는 아무 말 없이 다가와 강유라의 팔을 덥석 잡았다.
“뭐… 뭐 하는 짓이야?”
강유라가 당황해서 팔을 빼려고 했지만, 남자의 손은 집게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필웅도 그 남자의 팔을 잡으며 그를 노려보았다.
“무슨 짓입니까?”
남자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거래의 조건을 이행 중이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강유라를 만나게 해 주면 된다면서요!”
“나야말로 무슨 소린지 묻고 싶군. 강유라를 넘겨주는 대가로 거래하겠다고 한 거 아니었나?”
남자가 차분하게 되묻자, 강유라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조필웅! 너!”
필웅은 당황해서 외쳤다.
“아니야, 난!”
“아무튼 강유라 씨를 여기까지 데리고 와 준 건 감사해 두도록 하지.”
남자는 가볍게 목례까지 해 보이고는 강유라를 끌고 가기 시작했다.
강유라는 악을 쓰면서 저항했지만, 남자는 강유라를 질질 끌다시피 하며 사무실 뒤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손 놔!”
필웅이 외치며 달려가 남자를 덮쳐 쓰러트렸다.
아니, 쓰러트리려고 했다.
필웅은 달려가는 힘의 관성으로 충분히 그를 넘어트릴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남자의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남자는 자신의 허리에 매달린 필웅을 무심하게 내려다보다가, 몸을 틀어 팔꿈치로 그의 등을 강하게 내리찍었다.
“컥!”
필웅은 극심한 고통을 느끼며 남자의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남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강유라를 끌고 가기 시작했다.
“조필웅! 어떻게 된 거야!”
강유라는 바둥거리면서도 애타게 필웅을 불렀다. 필웅은 간신히 바닥을 짚고 일어섰다.
“거기 서!”
필웅이 다시 달려나가려는 순간, 어느새 다가온 3원로가 그의 발을 걸었다.
필웅은 급하게 달려나가려다가 크게 고꾸라지고 말았다.
“크윽!”
튕겨져 나가는 힘이 더해져 격한 고통 속에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필웅의 앞에 3원로가 다가와 앉았다.
“검사님, 강유라가 어떻게 되든 관심도 없으시면서 왜 이러세요?”
3원로가 딱하다는 듯이 필웅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필웅은 그녀의 손을 쳐냈다.
3원로가 약간 뒤로 물러서자, 필웅도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남자에게 얻어맞은 등허리가 아직도 아파왔다.
필웅이 이를 악물고 쏘아붙였다.
“강유라가 문제가 아닙니다. 이건 거래의 조건을 일방적으로 바꾸는 것 아닙니까!? 정작 거래를 제안한 사람은 오지도 않고.
분명 강유라를 만나게 해 주기만 하면 된다고 해놓고는 강유라를 어디로 끌고 간 겁니까?”
“일단 만나게만 해 주시면 그다음은 저희가 알아서 처리한다는 뜻이었죠~ 거짓말이 아니라 약간의 생략이 있었던 거랄까요?”
3원로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강유라를 어떻게 하려는 겁니까?”
“그건 검사님이 걱정하실 일이 아니지 않나요?”
3원로는 뒤에서 낡은 철제 의자를 하나 끌어다가 필웅의 앞에 가져다주었다.
필웅은 3원로를 한 번 노려보고는 말없이 의자에 앉았다.
3원로도 미소를 띠며 그의 앞에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필웅은 생각을 가다듬었다.
‘강유라를 아예 잡아가 버린 건 예상 외지만, 일단 교단은 나와 거래를 할 생각이 있기는 한가 보군.
강유라에게는 미안하지만, 일단 이 기회를 잡고 나서 강유라를 어떻게 구해낼지 생각해 보자.’
“뭐, 좋습니다. 어차피 강유라가 어떻게 되든 내가 알 바는 아니니까요.”
“그렇게 나오셔야죠.”
3원로는 싱글싱글 웃으며 대답하고는 고혹적인 눈빛으로 필웅을 바라보았다.
“나는 우리 검사님이랑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얘기도 있고 말이에요.”
“개인적인 얘기라구요?”
말하면서 3원로는 필웅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샅샅이 훑어보았다.
필웅은 뱀이 온몸을 타고 오르내리는 기분이었다.
3원로는 기분 좋게 흐흥 하고 웃고는 말했다.
“일단 우리 비즈니스 이야기를 해 볼까요?”
“그러시죠.”
3원로는 담배를 꺼내더니 들고 있던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그리고는 한 번 담배를 깊게 빨고는, 후우 하고 연기를 뱉어냈다.
금세 필웅의 눈앞에 연기가 자욱해졌다. 필웅은 인상을 쓰며 손으로 연기를 흩어냈다.
“담배 안 좋아하시나 봐요?”
“남이 피는 건 싫어합니다.”
“이기적이시네.”
“난 적어도 상대가 싫어하는데 굳이 그 앞에서 담배를 피우지는 않으니까.”
필웅이 으르렁댔다.
3원로는 들은 체 만 체 하며 다시 담배를 깊게 빨아들였다.
“후우. 구체적으로 우리 사업 중에 뭘 같이 하고 싶은 거죠? 아동복지사업? 나무 심기?”
“장난치러 온 겁니까?”
“얘기를 안 하시면 저야 검사님이 어디에 관심이 있으신지 알 수 없죠~”
3원로는 빙글빙글 웃으며 놀리는 말투로 말했다.
필웅은 끄응 하면서 입을 열었다.
“뭔가를 밀수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필웅은 신중하게 단어를 하나하나 골라가며 말했다.
만일 처음부터 마약 이야기를 꺼내면 너무 경계심을 높일 우려가 있었다.
처음에는 사업을 구체적으로 알지 못한다는 인상을 주는 편이 낫다는 것이 시연과 김영지의 생각이었다.
“밀수?”
“시치미 떼지 마시죠. 이미 저희도 밀수 건에 대한 정황증거는 다 파악해 둔 상태입니다. 그 내용물을 구체적으로 확인하지 못했을 뿐.”
“흐으음~ 뭐, 좋아요. 저희가 밀수를 한다고 치죠. 거기에 검사님이 무슨 도움을 줄 수 있나요? 짐이라도 나르시게요?”
필웅은 짜증스럽게 대답했다.
“제가 왜 더 뭘 해야 하죠? 강유라를 데려오는 대가로 사업에 끼워 주기로 한 거 아닙니까?”
“그 부분도 생략이 있었달까? 사업에 참여하실 수 있게 고려는 해 보겠다고 한 거죠~ 아동복지사업이라면 얼마든지 끼워 드릴 수 있는데.”
필웅은 쯧 하고 혀를 차며 어쩔 수 없다는 듯 대답했다.
“항만에 아는 지인이 있습니다. 항만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게 해 드리죠. 만약 세관 통과 과정에서 뭔가가 적발되더라도, 적당히 무마될 수 있도록 손을 써 드리겠습니다.”
3원로가 비로소 흥미가 동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제야 좀 말이 통하는 것 같네요. 그럼 수익 배분은?”
“밀수로 벌어들인 돈을 5:5로 나누죠.”
“7:3.”
“6:4.”
“좋아요.”
필웅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필웅은 당연히 수익의 분배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만일 위험한 사업에 참여하겠다고 하면서, 수익 분배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티를 내면 누가 봐도 수상할 것이었다.
그래서 필웅은 적당히 숫자를 부르고 마지못해 양보하는 그림을 만들어낸 것이다.
“다음 물량이 3일 뒤 밤 12시에 영산항으로 들어올 거에요. 잘 처리될 수 있게 도와주시면, 6:4 외에 보너스도 챙겨 드릴 수 있어요.”
3원로의 제안에는 거침이 없었다.
필웅의 생각에 아무래도 이 사업과 관련해서는 3원로가 결정권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다행히 타겟을 제대로 물은 것 같군.’
필웅은 짐짓 태연한 척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개인적인 이야기란 건 뭡니까?”
필웅이 문득 3원로가 처음에 한 얘기를 떠올리고 물었다.
“술이나 한잔 하면서 얘기하면 어때요?”
3원로가 눈을 빛냈다.
‘무슨 미친 소리야?’
필웅은 속으로 어이없다고 생각했지만, 한편으로는 3원로가 술에 취해 의외의 정보를 흘릴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려웠다.
어쩌면 3원로의 크리미널 아카이브를 읽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최근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만약 나영전이 알고 있는 미래에서 크게 사건이 되지 않은 경우라면 크리미널 아카이브를 읽을 수 없는 경우가 있는 듯했다.
제8요일 교단만 해도 필웅이 이렇게 파고들지 않았다면 사건이 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기에, 이제까지 제8요일 교단의 관계자들을 만날 때에도 크리미널 아카이브가 뜨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좋습니다.”
“응접실로 가시죠.”
3원로가 눈웃음을 지으며 사무실에 연결된 다른 방에 향하는 복도로 필웅을 안내했다.
필웅은 대충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그녀를 따라나섰다.
‘3일이라면 별로 긴 시간이 아니군.’
필웅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3일 동안 어떻게 밀수되는 제품들을 압수할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강유라는 어떡하지?’
물론 당장은 그저 가둬 두는 것으로 끝날 수도 있겠지만, 그 후에 무슨 일이 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교단이 떽떽거리는 강유라에게 싫증이 난 나머지 아예 영원히 조용히 시키면 어떨까 하고 생각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분명 강유라가 교단에 의해 감금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니, 오히려 경찰에게 이를 신고하는 편이 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오히려 교단을 자극해서 강유라가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필웅은 머리를 거칠게 흔들었다.
‘가만… 강유라가 어떻게 될지를 내가 왜 걱정하는 거지?’
필웅은 갑작스럽게 스스로에게 의아함을 느꼈다.
비록 최근 어쩔 수 없이 서로 협조하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강유라 역시 필웅 그리고 시연의 적이었다.
만일 강유라가 강무완을 대체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그저 노회하고 엄격한 악당이 교활하고 젊은 악당으로 바뀌는 것뿐이었다.
차라리 여기서 강유라를 내버려 두고, 기세를 몰아 강씨 일가를 전부 다 소탕하는 것이 더 합리적인 선택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강유라도 정말 강무완과 똑같은 인간인 걸까?’
필웅은 왠지 모르게 강유라를 구해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떨쳐내기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