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약해지는 강유라 강해지는 조필웅
강유라는 자신이 살고 있는 빌라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불필요하게 임대인과 접촉하는 걸 피하기 위해, 강유라는 영산 시의 부동산을 하루 둘러본 후 차명으로 빌라를 한 채 사버렸다.
단독주택을 살 수도 있었지만, 인구가 그다지 많지 않은 영산 시의 특성상 단독주택에 나타난 새로운 이웃은 오히려 눈에 띌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강유라는 들고 왔던 캔커피를 다 마신 후 아무렇게나 던져 버렸다. 그러나 강유라는 문득 자신의 집 방바닥을 돌아보았다.
‘이거… 이러면 안 되는 거겠지?’
이미 각종 쓰레기들이 바닥에 한가득이었다.
빌라 전체가 강유라의 것이었으니, 강유라는 집이 더러워지면 다음 집으로 가는 식으로 매일 집을 바꾸어 자기는 했다.
하지만 이제 그런 생활도 슬슬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청소부라도 불러야 하나? 하지만 내가 여기 산다는 걸 누군가에게 들키고 싶지는 않은걸.’
강유라는 자신이 청소를 한다는 생각 따위는 꿈에도 하지 못한 채 고민스러워하며 그나마 깨끗한 방의 침대에 드러누웠다.
강유라는 며칠 전 필웅이 한 말을 떠올렸다.
고맙다는 말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고맙다고 생각한다고 했던가?’
강유라는 살면서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물론, 간혹 식탁 밑의 강아지에게 뼈다귀를 던져 주는 것처럼 그녀가 거느린 직원들에게 보너스를 툭툭 던져 줄 때면, 짐짓 감격한 표정으로 감사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강유라는 그들의 마음이 진심이라고 믿을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그렇게 앞에서는 감사하다고 말하던 사람들도, 뒤에서는 그녀를 흉보고 있었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인간이란 필요할 때만 감사하다고 하는 존재인걸.’
강유라는 필웅도 별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필웅도 그녀가 정보를 주지 않았다면 고맙다는 말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웅에게 처음으로 들은 고맙다는 말에 왜 갑자기 기분이 묘해졌는지 강유라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정말… 정말 삼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강유라는 요즘 약해지는 자신을 추스리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처음 영산에 왔을 때만 해도, 이런 깡촌에 있어야 하는 건 기껏해야 며칠, 길어야 몇 주일 거라고 생각했다.
필웅을 전적으로 믿은 것은 아니었다. 그녀 자신도 삼영 내부에 자신의 사람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들이 내부에서 쿠데타를 도모해서 그녀에게 손을 내밀어 준다면, 그녀도 손쉽게 삼영에 복귀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 과정에서 조필웅과 정시연같이 꼴 보기 싫은 ‘정의의 사도’들에게 빚을 지워 주는 것도 재미있겠다고도 생각했다.
그러나 사태는 그녀의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갔다. 그녀가 그래도 자신의 편이라고 믿었던 임원들은, 그녀의 연락을 받자 어색해하며 연락을 회피하거나 대놓고 거부감을 드러냈다.
사람을 믿지 않는 강유라였지만, 한편으로는 인간이란 이익을 주면 그만큼의 보상은 할 것이라고도 믿는 그녀였다.
그럼에도 그녀가 약속한 수많은 이익과 그때까지 줘 왔던 이익들 앞에서도 그녀를 외면하는 삼영의 임원들에게 그녀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실무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수많은 삼영의 임직원들 중에서 그녀의 연락을 받고 움직여 준 것은 한 손으로 꼽을 정도에 불과했다. 그마저도 점점 연락이 끊겨가고 있었다.
‘개자식들, 그래도 내가 해 준 게 얼만데!’
강유라는 그래도 자신이 공정하게 부하들을 대해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쨌든 자신의 사람이라고 생각되면 나름 보너스도 챙겨 준 편이었고, 개인적인 격려도 이따금 해 주었다.
그러나 그녀가 삼영그룹의 사장이라는 직위를 잃자,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차가운 냉대뿐이었다.
처음에 그녀는 필웅의 도움은 부차적인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런 상황이라면 그녀가 자력으로 재기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었다.
‘아빠와 할아버지를 전부 다 일선에서 몰아내지 않는 한 말이지.’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강무완과 할아버지 강중민의 비리들을 밝혀내 그들을 실각시키는 것 외에, 그들을 일선에서 물러나게 할 방법은 없었다.
아직 아버지 강무완도 정정했고, 강중민은 물러나 앉은 척하면서도 뒤에서 그룹의 실세들을 조종하고 있었다.
강유라 스스로도 그룹 내의 모략에 익숙한 편이라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언제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그들보다 한 수 위였다.
그런 그들에게, 실질적으로 타격을 준 적이 있는 사람은 조필웅이 유일했다.
강유라는 아직도 강무완이 처음 구속되던 날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날 처음으로 그녀는 그녀가 삼영그룹의 권좌에 오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외로 강무완의 수완은 여전히 뛰어났다.
구속된 후에도 그는 끊임없이 싸웠고, 결과적으로 현재는 자유롭게 세상에 나와 있었다.
강유라는 말없이 얼마 전 충동적으로 산 차의 차키를 바라보았다.
오로지 내구성과 튼튼함만을 고려해 산 차였다. 강유라는 그만큼 외부로부터의 공격과 신변의 안전에 집착하고 있었다.
-띠리리리
핸드폰이 울렸다. 오직 조필웅과 그녀만이 서로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는 핸드폰이었다.
강유라는 황급히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야?”
강유라는 마음에도 없이 툴툴댔다.
“할 얘기가 있어.”
“뭔데? 해.”
“전화로는 좀 그래. 만나서 얘기해 줄게.”
“그래. 그럼.”
강유라는 전에 없이 필웅의 목소리가 침울하다는 것을 느끼고는 의아해했다.
필웅이라면 일이 풀리지 않을 때 분노한 적은 있어도 슬퍼하거나 의기소침해하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강유라는 의문을 지우지 못한 채 물끄러미 차키를 바라보았다.
문득 미국에서 유학할 때, 아마추어 카레이스 대회에 나갔던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는 그냥 별생각 없이 재밌었는데.’
강유라는 피식 웃고는, 약해지니 별생각을 다한다 생각하며 차키를 집어 들고 집을 나섰다.
* * *
필웅이 불러낸 곳은 한적한 다방.
필웅은 그녀를 불러 놓고 10분째 아무 말도 없었다.
강유라는 커피에 남은 얼음으로 장난을 치며 몰래 필웅을 훔쳐보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할지 망설이는 거 같아서 시간을 주려고 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대머리 아저씨와 아줌마가 앉아 있었다.
커피도 한 번 리필했지만, 두 번째 잔도 거의 다 마셔가고 있었다.
강유라는 답답해하며 짜증을 냈다.
“뭐야? 사람 불러 놓고. 테이블 구경하러 나왔어?”
필웅이 드디어 뭔가를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부탁할 게 하나 있어.”
“부탁?”
“응. 너만이 들어줄 수 있는 부탁이야.”
강유라는 흥미를 느끼면서 테이블 앞으로 상체를 숙였다.
“무슨 일인데?”
“조금 어려운 부탁이야.”
“10분쯤 들였으면 됐지 않아? 아직도 뜸 들이는 거야?”
“미안. 사실은….”
필웅은 그러고도 한동안 말을 꺼내지 못하고 주저했다.
잠시 후, 필웅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얼마 전, 제8요일 교단의 교주를 만났어.”
“뭐?! 진짜?! 대단한데? 어떻게 만난 거야!”
필웅은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대고 말했다.
“야야! 목소리 낮춰! 거래를 하자고 꼬드겼지.”
상체를 거의 필웅 쪽으로 넘어온 유라가 다시 자세를 갖춰 앉았다.
“그 말을 그렇게 쉽게 믿고 널 교주한테 데려다줬다고?”
“물론 그걸 위해 성의 표시는 했지. 문제는….”
필웅이 크게 심호흡을 했다.
“네 말대로 그들이 나를 100% 믿지는 않아. 그들이 다른 조건을 요구해 왔고, 그 조건을 받아들이면 나를 거래 파트너로 인정하겠다고 했어.”
“그게 뭔데? 그냥 받아 주면 안 돼?”
“그게… 그 조건은 너에 관한 거야.”
강유라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나에 관한 거?”
“그래. 교단은… 너와 만나게 해달라고 요구하고 있어.”
강유라가 벌떡 일어섰다.
“뭐라고?!”
“교단은 이미 내가 너와 접촉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것 같아. 하지만 아직 네가 어디에 있는 지까지는 찾지 못한 것 같더라고.”
“그래서?”
강유라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만, 한편으로는 다리가 풀려오는 것도 느꼈다.
강유라는 풀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래서! 날 불러낸 거야?”
이번에 필웅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무슨 소리야?”
“날 그놈들한테 갖다 바치려고! 그러려고 날 굳이 불러냈다는 거 아냐?
10분 동안 조용했던 건 그놈들을 기다리기 위해서였던 거지? 자, 이제 내가 누구한테 가면 돼? 저기 대머리 아저씨? 아니면 저기 잡지 보고 있는 아줌마?”
강유라가 표독스럽게 차례로 다방 구석에 각각 자리 잡은 사람들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그러나 지목을 받은 아저씨와 아줌마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필웅도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무슨 헛소리야? 내가 언제 널 갖다 바친다고 했어?”
침울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강유라가 힘없이 고개를 들었다.
“아니야?”
“크흠, 뭐. 적어도 네 의사에 반해서는 아니야.”
강유라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잘 이해가 안 돼. 교단이 나를 만나자고 했다며?”
“맞아.”
“그냥 만나게 해 주면, 교단에 너를 받아들여 주겠다는 거고?”
“정확히는 교단의 일원으로 받아 준다기보다는 파트너로 인정하겠다는 거지만, 뭐 취지는 비슷해.”
“그런데 나를 끌고 가지 않겠다고?”
필웅이 한숨을 쉬었다.
“강유라, 너야 네가 이득을 볼 수만 있다면 네 친구고 주변 사람이고 전부 다 팔아먹을 수 있는 위인이지만 나는 그런 나쁜 사람이 아니야. 모든 사람이 너랑 똑같이 행동할 거라고 생각하지 좀 마.”
강유라는 여전히 잘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멍하니 필웅을 바라보고 있었다.
필웅은 그 모습을 잠시 딱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다가 말을 이었다.
“내가 여기 온 건, 당장 너를 잡아다 팔아먹겠다는 게 아니라 네 의사를 묻기 위해서야.
방금 설명한 것처럼, 네가 협조해 준다면 우리는 교단에 관한 정보를 더 쉽게 얻을 수 있을 거야. 만약 네가 협조해 주지 않는다면 또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 하겠지만,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또 성공할지도 알 수 없지.
이건 네 선택이야. 내가 교단과 삼영을 사로잡을 증거를 찾을 수 있다는 걸 믿고 교단에게 가든지, 아니면 얼마나 오래 걸릴지 모르는 다른 방법을 찾는 한이 있어도 교단으로부터 도망칠지.”
“하지만”
강유라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만약 교단 사람들을 만나러 갔는데 나를 죽이면 어떡해? 그럼 아빠랑 할아버지가 삼영에서 물러나도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잖아.”
“네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널 죽일 수 있는 사람들이야?”
강유라는 지난 몇 개월 동안의 일을 떠올렸다.
만일 그녀의 존재 자체가 방해라고 여겼다면 강무완이나 강중민이 그녀를 죽이는 데 별 거리낌은 없었을 것이다. 즉, 원하기만 한다면 강유라를 죽일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그들은 대신 그녀를 가둬 두기만 했다. 만일 죽이려면 진작에 죽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강유라는 조금 자신 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적어도 당장은, 그렇진 않을 것 같아.”
“그렇다면 삼영과 협력 관계에 있는 교단도 섣불리 네 목숨을 위협하지는 못할 거야.”
“그러니까 결국은 내가 불편한 녀석들을 만나 줘서 널 도울 것인지 아니면 넋 놓고 시간을 낭비하고 있을 것인지 선택하라는 거네?”
조금 여유를 되찾은 강유라가 날카롭게 물었다.
필웅은 마지못해 대답했다.
“맞아.”
“그럼 생각할 필요도 없지. 내가 직접 가겠어.”
“그래, 역시 무리… 뭐?”
필웅이 자포자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순간 놀라서 물었다.
“정말 가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