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새로운 작전
“교주를 잡으면 되잖아?”
강유라가 아이스 커피를 마시며 말했다.
“뭐?”
“교주를 잡아서 자백을 시키면 다 풀리는 것 아냐?”
필웅과 강유라는 영산 터미널 근처의 다방에 와 있었다.
은신처에서 시연, 장경, 김영지와 이야기를 나눈 후, 필웅은 강유라가 알아낸 것에 대해 직접 들어 보고 싶어서 강유라에게 전화를 걸었다.
강유라는 기껏 사 준 핸드폰을 왜 놓고 다니냐며 한바탕 훈계를 한 후 이 커피숍에서 만나자고 했다. 여전히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쓰고 목도리를 동동 동여맨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다.
“실내에서는 좀 벗으면 안 돼?”
“큰일 날 소리. 아빠의 끄나풀이 어디 와 있을지 모른다고.”
“너무 첩보영화 많이 본 거 아냐…?”
“넌 진짜 삼영의 힘을 몰라도 너무 몰라.”
“뭐, 좋아. 아무튼 네 제안은 두 가지 측면에서 말이 안 돼.”
“왜?”
“첫째. 우리는 교주가 누군지도 모르고, 원로들의 정체도 숨겨져 있는 판에 교주가 어디 있는지 누가 알겠어?
둘째. 교주를 찾는다고 해도, 협조적으로 나올 리가 없잖아. 교주가 잡히고 나면 ‘나를 잡은 선물이다. 삼영과의 비리를 전부 폭로해 주지!’라고 할 줄 알았어?”
강유라는 볼멘 표정으로 말했다.
“난 그냥 아이디어를 내 본 거라고.”
“아무튼 너도 이제 끌어 쓸 수 있는 정보는 다 끌어다 썼단 말이지?”
“그래. 이 정도면 상당히 많이 제공한 거라고 보는데?”
“맞아. 그건 고맙게 생각해.”
얼음을 달그락거리며 남은 커피로 장난을 치던 강유라가 갑자기 동작을 멈췄다.
필웅이 의아하게 물었다.
“왜 그래?”
“아니야. 고맙다는 말을 들으니 웃겨서.”
강유라는 왠지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다.
강유라는 여전히 필웅의 시선을 피하면서 천천히 빨대로 얼음을 돌렸다.
얼음이 녹아 남은 커피가 점점 연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커피의 색은 그다지 크게 변하지 않았다.
필웅은 유심히 유리로 된 커피잔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강유라는 문득 그의 시선을 느끼고는 필웅을 마주 보았다.
“뭘 그렇게 열심히 봐?”
“녹아든다… 섞인다….”
필웅은 강유라의 질문을 듣지 못했는지 혼자 영문 모를 소리만 중얼거리고 있었다.
* * *
“교단으로 들어갑시다.”
필웅이 결연한 표정으로 시연과 김영지, 장경에게 말했다.
김영지가 뜨악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뭐라고?”
“교단으로 들어가자구요. 어차피 외부에서는 교주며 원로가 누군지 뭘 하고 있는지 알아내는 데 한계가 있지 않습니까? 교단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어요.”
“미쳤어? 교단은 우리 모두의 신원을 알고 얼굴도 알아. 거기 가서 ‘사실 전 교단에 흥미가 있었습니다’ 하면 ‘아 그렇군요, 어서 오십시오’ 할 것 같은가?”
김영지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말했다.
시연도 필웅에게 말했다.
필웅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연히 그런 식으로는 안 되죠. 제가 조필웅이라는 건 누가 봐도 알 것 아닙니까?”
“아! 변장을 하면 어떻슴까? 김영지 씨 변장 좀 하는 것 같던데!”
“변장은 말 그대로 변장이지 변신이 아냐. 교단에 소풍 갔다 올 건가? 잘못하면 그들 사이에 섞여 며칠을 지내야 할 수도 있는데 그렇게 오래 가는 변장술 따위는 없어.”
장경의 제안에 김영지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내뱉었다.
필웅이 그들을 보며 결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제게 한 가지 생각이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필웅은 그들에게 자신의 계획을 들려주었다.
“에에?”
“진짜 그런 게 될까?”
시연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다른 좋은 방법 있는 사람?”
필웅의 질문에 세 사람은 끄응 하며 신음소리를 냈다. 이미 시도해 볼 만한 것은 대부분 시도해 본 탓이었다.
교단 본부는 물론 교단과 관련된 회사까지 탈탈 턴 후임에도 확실한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 증인들은 입을 꾹 닫고 있거나 사라지고 없었다. 물론 그들 자신이 증인이 될 수도 있었지만, 과연 얼마나 신뢰성이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래서, 네가 직접 갈 생각이야?”
시연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들었잖아. 나 아니면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안 될까?”
“생각할 시간이 없어. 지금 이 순간도 이 자들은 자신들의 흔적을 지워가고 있을 거야. 어쩌면 이미 국외로 도망쳤을지도 모르지.”
필웅이 크게 숨을 들이키며 심호흡을 했다.
그가 제안한 계획이지만, 그로서도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만큼 위험부담이 있을 수밖에 없는 계획이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하는 거겠지.’
필웅은 걱정스러워하는 시연의 표정을 보면서도, 굳게 마음을 다잡았다.
* * *
황대산은 구속적부심을 신청한 상태였다. 그에 대한 구속이 정당하지 않으니 풀어달라는 것이었다.
원칙적으로 검사로서 필웅이 거기에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했다.
대신 필웅은 황대산을 찾아갔다.
“뭡니까?”
황대산은 예상했던 대로 까칠한 태도로 필웅을 맞았다.
“거래를 하러 왔습니다.”
“뭐라구요?”
필웅을 외면하며 돌아앉아 있던 황대산이 흘끗 그를 쳐다보았다. 약간이나마 관심이 생긴 눈치였다.
“이번 구속적부심에서 당신이 풀려날 수 있게 도와주죠.”
“갑자기 왜 이러는 겁니까?”
황대산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었다.
“당신이 손수 나를 잡아 처넣고는 지금 장난하자는 겁니까?”
“이렇게 하지 않으면 당신들의 주의를 끌 수 없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필웅은 침착하게 시연과 사전에 짜 둔 대사들을 끄집어냈다.
분명 황대산은 당연히 처음엔 필웅을 믿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니 그가 듣고 싶은 말을 듣게 해 줄 필요가 있었다.
다행히 그들이 알고 있는 황대산은 그렇게 머리가 잘 돌아가는 타입은 아닌 것 같았다. 처음 체포됐을 때도 자포자기하고 자신의 범행을 자백해 버릴 정도로 유약한 면도 있었다.
일단 눈앞의 이익을 들이밀고 거래를 요청하면 황대산은 들어줄 수밖에 없을 거라는 것이 시연의 판단이었다.
게다가 교단에서 어떤 위치인지 알 수 없는 송도영과는 달리 황대산은 원로라는 신분이 있었다.
그런 이유에서 필웅은 그나마 사적인 친분이 있는 송도영보다는 대신 황대산에게 접근한 것이었다.
“도통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 원하는 게 뭐요?”
황대산은 툴툴대면서도 호기심이 동하는지 필웅에게 물었다.
“당신네 교단과 함께 일하고 싶습니다.”
“우리 교단과 함께 일하고 싶다는 사람이 날 이렇게 잡아넣는다고?”
황대산이 분통을 터뜨리며 손에 채워진 수갑을 들어 올려 보였다.
“그 점은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필웅이 짐짓 침울한 표정으로 말하고는, 황대산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낮은 목소리로 은근하게 말했다.
“이 건을 조사하기 전까진 당신들의 사업에 얼마나 흥미로운지 몰랐으니까요. 이렇게 전도 유망한 사업을 하고 계셨다면 진작 얘기를 해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황대산은 잠시 필웅의 말에 고민하는 듯하더니, 잠시 후 은근히 뻐기는 말투로 말했다.
“뭐, 사람은 실수할 수도 있지요.”
“그렇죠? 잘만 되면, 제가 공소를 취소해서 재판을 아예 없던 것으로 할 수도 있습니다.”
“정말입니까?”
황대산이 급하게 반색을 하며 물었다.
“그럼요. 일단은 화해의 제스처로, 이번 구속적부심에 대해서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겠습니다. 곧 풀려나올 수 있을 겁니다.”
“그거 고맙군요.”
황대산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지만, 입가에서 스믈스믈 미소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필웅도 미소가 흘러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느라 입가가 들썩들썩하고 있었다.
며칠 후.
황대산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문을 열었다.
일요교회 부지에 자리 잡은 사무실이었다.
사무실 안에 별다른 집기는 없었지만, 여러 사람이 모여 앉아 있다는 점은 달랐다.
“7원로입니다.”
황대산은 나지막하게 인사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세 사람이 낡은 소파에 둘러앉아 있었다.
한 사람은 많아 봐야 30대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여자였다. 왠지 모를 농염한 기운이 맴돌고 있는 미인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마주 보는 이들의 위쪽으로, 온화한 인상의 중년 남자가 앉아 있었다.
황대산의 인사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온화한 인상의 남자만이 미소를 품은 채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보내왔을 뿐이었다.
“7원로, 고생 많았다고 들었네.”
“걱정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자네가 죄송할 게 무엇이 있나, 다 내가 덕이 부족한 탓이지.”
“당치도 않습니다.”
남자의 말은 부드러웠지만 왠지 모르게 황대산은 굳은 표정으로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손님은 어디 계시죠?”
여자가 비로소 입을 열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여기 있습니다.”
열린 문틈으로 새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내 목소리의 주인공, 조필웅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때까지 지루한 표정을 짓고 있던 여자의 얼굴이 필웅을 보자 갑자기 흥미진진하다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온화한 인상의 남자는 천천히 필웅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어서 오십시오.”
그를 살펴보던 남자가 일어나 반갑게 그를 맞았다.
옆에 앉아 있던 여자도 미소를 띄우며 함께 일어났다.
남자가 손짓으로 필웅에게 자신의 맞은편에 있는 의자에 앉으라고 권했다.
“이거, 소개가 늦었습니다.”
면목 없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남자가 말했다.
“영산에서 작은 교회를 하고 있는 서춘주라고 합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이 자가 교주인가?’
필웅은 속으로 생각했다.
본인이 ‘제8요일 교단’의 교주라고 한 적도 없고, 그가 구슬린 황대산 역시 단지 교단의 높은 분이 나오실 거라고만 얘기했을 뿐이었다.
‘대놓고 당신이 교주냐고 물어보면 쓸데없는 의심을 살 수 있다. 일단은 다음 기회에 알아봐야겠군.’
생각을 마친 필웅도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반갑습니다. 조필웅 검사라고 합니다.”
“예,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습니다. 아주 능력 좋으신 검사님이시라고.”
서춘주는 말하며 허허 웃었다.
“이거, 저희 교단 사람들이 변변치 못하게 폐를 끼쳐서 송구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폐라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당장 여기 저희 7원로만 봐도 그렇습니다. 제가 높으신 분들 신경 쓰이지 않게 조용히 일 처리하라고 한 것을 오해해서 다른 여자 검사님을 불편하게 해 드린 모양입니다.”
서춘주의 말투는 온화했지만 명백히 황대산을 꾸짖는 것이었다.
황대산은 박제처럼 서서 사시나무 떨듯 떨고만 있었다.
“이런, 그런 오해가 있었나 보군요.”
“예, 저희가 검사님들을 납치하고 가둘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서춘주가 허허 웃으며 두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그런데 여기 이분은?”
필웅이 그제서야 발견했다는 듯 남자의 옆에 선 여자를 돌아보며 물었다.
“아, 소개가 늦었군요. 저희 3원로입니다.”
남자의 소개에 여자는 안 보는 척하면서 계속해서 필웅을 힐끔힐끔 훔쳐보고 있었다.
‘뭐지? 신경 쓰여 죽겠네…….’
필웅은 여자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일단은 베일에 가려져 있던 원로들과 교주의 얼굴을 알게 된 것부터가 큰 수확이었기에, 그저 잠자코 있었다.
“그러고 보니…….”
서춘주가 손바닥을 마주 비비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와 사업을 같이 해 보고 싶다고 하셨다고…”
“그렇습니다.”
옆에 서 있던 여자, 3원로가 노골적으로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가 당신의 뭘 믿고 당신과 거래를 해야 하죠?”
“3원로.”
서춘주가 그의 입을 막으려는 듯 엄하게 그를 불렀다.
3원로는 입을 닫았지만 여전히 흥미롭다는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서춘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3원로가 말하는 바도 일리는 있습니다. 아무래도 저희가 쉽게 사업 파트너를 결정하지는 않으니까요.”
필웅이 미심쩍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다면…?”
“한 가지 조건 하에 거래를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뭐지요?”
서춘주가 허허 웃으며 다시 손바닥을 비볐다. 뭔가 이야기를 꺼내기 전의 습관인 모양이었다.
그의 입에는 미소가 어려 있었지만, 눈빛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그 조건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