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청소나 해놔
송도영 조사관이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그게 어떻게 가능하다는 겁니까? 다른 물증이 없잖아요?”
“다른 증거는 없어도, 자백이 있지 않습니까.”
“자백만으로 유죄판결을 받을 수 없다는 걸 제가 검사님한테 또 설명해 드려야 합니까?”
송 조사관은 노골적으로 비웃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필웅은 담담했다.
“누가 송도영 피고인의 자백이라고 했습니까?”
“그게 무슨…?”
필웅은 조금 떨어져 옆에 앉아 있는 황대산을 가리켰다.
“피고인 본인의 자백만으로는 물론 유죄 판결이 불가능하죠.
하지만 공범인 피고인의 자백은 어디까지나 피고인이 아닌 타인의 자백이니 공범의 자백도 별도의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황대산은 이미 송도영 당신이 내막을 알고 협조했다고 자백했습니다. 결국 송도영 피고인에 대한 증거에는, 송도영 피고인 본인의 자백뿐만 아니라 황대산 피고인의 자백도 포함되는 거죠.”
송도영이 그제야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도 증거이론을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한 가지 사실을 간과해 버린 것이었다.
피고인 본인의 자백만 유죄 판결의 증거가 된다면, 유죄 판결을 내릴 수 없다. 따라서 다른 증거가 더 추가되어야만 한다.
이는 소위 ‘자백보강법칙’이라고 불린다.
자백만으로는 부족하니 항상 보강 증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피고인 본인의 자백이 아닌 공범의 자백은 ‘피고인 본인의 자백’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즉, 공범인 피고인의 자백은 피고인의 자백과는 별개의 증거가 되어 보강 증거가 될 수 있다.
송도영은 고개를 떨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검사 측 신문은 여기까지입니다.”
필웅은 그를 차가운 눈빛으로 내려다보다가 자리로 돌아왔다.
재판이 끝나고, 송도영 조사관이 끌려 나가면서 필웅을 보며 히죽히죽 웃었다.
필웅은 불쾌한 표정으로 물었다.
“뭐가 웃깁니까?”
“아뇨… 그냥. 영감님이 이걸로 다 해결됐다고 생각하시는 게 우스워서요.”
필웅은 하 하고 코웃음을 치고는 송도영 조사관에게 다가갔다.
“정말 그렇게 생각합니까?”
“예?”
“잘 들어요.”
필웅은 송도영 조사관의 귀에 입을 가져다 댔다.
“신성한 종교의 이름을 내걸고 그 뒤에서 약이나 빨아대는 너희 쥐새끼 교주님도 너랑 같은 감방에 처넣어 주지. 그 안에서 예배드릴 수 있게 청소나 잘 해놔.”
송도영 조사관이 눈을 크게 뜨며 뭐라고 말할 것처럼 입을 벌렸지만, 필웅은 관심 없다는 듯 그를 외면하며 법정 경위에게 그를 데리고 나가라고 손짓했다.
사무실로 향하며 필웅은 생각했다.
‘한 가지는 해결했어. 이제 잔챙이가 아니라 몸통을 칠 차례다. 박 형사님이 잘 해주셨으면 좋겠는데…’
필웅은 성공적으로 재판을 마무리 지었지만 그래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쉽게 얼굴을 드러내고 전면에서 활동했다는 점에서 송도영이나 황대산은 잔챙이에 불과했다. 비록 황대산이 원로라고는 하지만, 아마도 직급이 가장 낮은 부류일 가능성이 높았다.
실제로, 황대산의 말이 사실이라면 황대산은 교주 본인을 몇 번 본 적도 없다고 했다.
물론 교주의 정체를 감추기 위한 거짓말일 수도 있지만, 시연도 한참 신문을 해 보더니 거짓말은 아닌 것 같다고 했다. 황대산은 정말 교주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는 것 같았다.
황대산이 필웅과 시연을 납치한 것도 그저 ‘위에서 시켰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 위가 누구인지는 끝끝내 말하지 않았다.
‘생각보다 굉장히 비밀스러운 조직이야.’
필웅은 생각했다.
‘아무리 말단이라도 엄연히 원로인데, 해야 하는 일 외에는 불필요한 정보를 일체 주지 않고 있어.
어쩌면 다른 원로를 사로잡아도 비슷할지도 모르겠군. 최고 원로 정도가 아니면 교단 전체의 일을 구석구석 알고 있는 자는 없을지도 몰라. 하나하나 잡아서 퍼즐을 맞출 수밖에 없는 건가.’
필웅은 도대체 교단이 꾸미는 것이 무엇일지, 삼영이 거기서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인지 몹시 궁금해졌다.
‘마약 제조, 폭탄 테러, 처음엔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서라고 생각했지만, 겨우 그 정도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필웅은 고민에 빠져 사무실로 돌아왔다.
“영감님! 안녕하십니까!”
누군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인사했다. 아직 앳되어 보이는 선한 인상의 남자였다.
필웅은 깜짝 놀라면서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뭐, 뭡니까? 누구세요?”
“헛! 죄송합니다!”
남자는 황급히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이번에 송도영 조사관님 사건 때문에 새로 조사관으로 배정됐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 예. 그래요. 씩씩하시네요.”
필웅은 얼떨떨하게 인사를 받고는 자신의 책상 위에 자료를 올려놓았다.
필웅은 피로감을 느끼며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눈을 질끈 감았다.
“저… 황대산이나 송도영 외에 다른 관련자들은 후속 기소하실 겁니까?”
필웅도 황대산이나 송도영에게 만족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황대산이나 송도영을 제외한 다른 교단의 간부들을 알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당연히 실제 배후의 흑막이라고 할 수 있는 간부들도 잡아넣어야겠지만, 누군지 알지도 못하고 증거도 없는 자들을 잡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필웅은 여러 차례 송도영과 황대산의 크리미널 아카이브를 읽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로부터는 별다른 정보를 읽어낼 수 없었다. 지나치게 말단이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었고, 혹은…….
‘조필웅이 건드리지 않았다면, 미래에서는 사건이 될 수 없는 일이었을 수도 있지.’
생각해 보면 송도영과 황대산이 구속당한 건 어디까지나 조필웅이 이 일에 깊게 관여했기 때문이었다.
필웅이 일요교회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면 시연도 제8요일 교단의 존재를 몰랐을 것이고, 추가로 조사를 해보지도 않았을 것이며, 따라서 납치당할 일도 없었다.
‘그리고 시연이가 납치되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까지도 제8요일 교단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겠지.’
어떤 이유이든 간에, 크리미널 아카이브를 통해 정보를 얻어낼 수 없다는 건 여러모로 불편한 일이었다.
‘너무 쉬운 길에만 익숙해진 건가.’
필웅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필웅은 잡생각을 마치고, 고민 끝에 대답했다.
“글쎄요. 황대산이나 송도영은 계속해서 배후를 주장하고 있지만 그게 누군지, 존재는 하는 건지 아직은 모르는 일이니까요.”
조사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필웅은 왠지 모르게 피곤해진 기분으로 서류를 마저 정리하기 시작했다.
필웅은 그러고 보니 기도원에서 탈출 후 한 번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사실은 기도원에서 탈출하기 전에도, 매일 같이 송도영에게 끌려다니거나 야근에 빠져 있어서 푹 자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검사님, 저 박장경임다!”
“아, 형사님. 삼일유통 압수수색은 어떻게 됐나요?”
“쓸만한 자료가 좀 있는 것 같습니다!”
필웅은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정말요?”
“예. 압수한 물품 목록은 작성하는 대로 보내드리겠슴다.”
‘좋았어!’
필웅은 주먹을 불끈 쥐며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일요교회는 온갖 증거들을 깨끗이 없애버리면서도 교회의 헌금 장부는 미처 수거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필웅이 교회의 장부를 조사해 삼일유통까지 이를 추적해 올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송도영, 황대산. 그다음 타겟은 누가 될까?’
필웅의 꽉 쥔 주먹이 희열로 살짝 떨렸다.
* * *
필웅과 시연은 집으로 돌아와 장경, 영지와 마주 앉았다.
필웅이 먼저 황대산과 송도영의 재판이 진행된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니까 그놈들은 어쨌든 잡혀 들어가겠군.”
“그자들은 말단인 건가요?”
“황대산은 원로 중에서는 말단이고, 송도영도 들어보지 못한 이름이군. 아마 교단 입장에서는 자르고 버릴 꼬리 정도로 생각하고 있을 거야.”
김영지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필웅은 예상은 했지만 조금 실망했다.
“당신이 알고 있는 다른 원로의 정보는 없습니까?”
“없어. 일단 교단은 원로들끼리 잘 알지 못해. 황대산이나 이원필은 비교적 오래된 원로여서 내가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다른 원로들은 다 어딘가에서 새로 나타난 놈들이라 잘 모르겠군.”
“최고원로인데 이름 정도는 알 거 아닙니까?”
“개인적으로 친분이 없는 원로들끼리는 서로의 직함을 부르지. 나도 이원필과 황대산을 제외한 다른 원로들은 2원로, 3원로 식으로 불렀을 뿐이야. 얼마 전 새로 취임한 4원로가 굉장한 싸움꾼이라는 소문은 들었지만 그것뿐이지.”
필웅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두 손을 들었다.
“할 수 없군요. 좋습니다. 일단 지금까지 우리가 알아낸 것들을 정리해 보죠.”
필웅이 말하며 어디선가 구해 온 화이트보드를 벽에 기대놓고 자신이 아는 것들을 써 내려 가기 시작했다.
“먼저 제8요일 교단은 마약 밀수와 제조에 손을 대고 있습니다. 관련 자금들은 먼저 홍삼슈퍼마켓이나 심신수련원 같은 껍데기 회사를 거쳐 세탁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강유라가 확인해 준 바에 따르면, 삼일유통에서 상당한 자금이 재단으로 흘러 들어온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 압수수색 결과에 따르면 삼일유통은 동시에 물품 조달도 맡은 것 같은데, 무슨 물품인지는 검사 결과를 기다려 봐야 할 것 같군요.
결국, 삼일유통은 물품 조달을 맡고, 제8요일 교단은 상대적으로 눈에 띄지 않는 종교단체라는 이름 뒤에 숨어 직접 마약 제조와 판매를 기도하고 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럼 뭐가 문젭니까? 당장 덮쳐버리죠!”
장경이 흥분해서 외쳤다.
시연은 필웅이 그린 도표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아니에요. 물론, 현재까지 발견된 증거들을 보면 이런 추측을 할 수는 있어요.
하지만 오늘 삼일유통으로부터 압수한 물품들 중에도 마약 제조와 직접적으로 연관 지을 수 있는 자료는 없었어요. 그러니까 결국 마약 제조와 이 패거리들을 연결할 결정적인 단서가 부족한 거죠.”
김영지가 시연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을 꺼냈다.
“그렇긴 하지만, 삼일유통이라는 회사가 교단과 연결된 것 자체가 이상한 것 아닌가?”
시연은 고개를 저었다.
“교단과 삼일유통과의 관계도 분명하지 않아요.
분명 우리가 봤을 때 수상한 거래이긴 하지만, 삼일유통은 그냥 종교단체에 기부를 했을 뿐이라고 잡아뗄 수 있어요. 또 아직 교단이 마약을 제조하고 팔았다는 물증이 없으니 교단이 마약 제조 및 판매책이라고 몰아세울 만한 결정적인 증거도 부족해요.”
“그럼 여기서 대체 뭘 더 찾아내야 하는 거야? 이미 내가 알고 있는 건 다 말해 줬고, 당신들이 해 볼 수 있는 것들도 다 시도해 본 것 아닌가?”
김영지가 짜증스럽게 물었다.
“솔직히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시연이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무언가 결정적인 것이 필요했다. 이제까지 삼영그룹이 이리저리 빠져나온 행태를 볼 때, 애매한 증거들로는 삼영과 그 주인을 구속하는 데 실패할 가능성이 컸다.
‘애매한 증거들만으로는 괜히 독만 올릴 뿐이야. 뭔가 더 확실한 증거가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