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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로 개과천선-108화 (108/151)

108화 자백이 증거가 되려면

“뭡니까, 그게?”

장경이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제8요일 교단에서는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지. 왜냐하면 교단은 이미 우리를 납치했다가 우리가 탈출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에 대비할 시간도 있었기 때문이야.”

시연이 답답하다는 듯 물었다.

“다 아는 얘기 말고 좀 새로운 얘기를 해 줄래?”

“잘 들어봐. 누군가 물증을 갖고 있다면, 그건 이 사건과 관련이 있는 누군가 또는 단체일 거야. 하지만 제8요일 교단 외에도 이 사건과 관련이 있는 인물이나 단체는 얼마든지 있을 거야.”

“그렇겠지?”

“그리고 교단이 직접 지배하는 곳이 아니라면, 아무래도 정보가 더 늦게 전달됐겠지.”

“그런 곳이라면 상대적으로 경계심이 낮을 수도 있겠네.”

“그렇지. 그리고 그런 곳이라면, 우리가 압수수색을 한다고 해도 재빨리 대비할 수는 없을 거야.”

“하지만 그런 곳이 있슴까?”

장경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있죠.”

필웅이 대답했다.

“삼일유통을 치는 겁니다.”

* * *

며칠 후. 영산시 소재 삼일유통 물류창고.

밤인데도 사람들은 무척 분주해 보였다.

물론, 밤낮없이 물건이 오고 가는 물류창고에서 사람들이 밤에도 일하는 것은 보기 드문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뭔가 분위기가 달랐다. 사람들은 왠지 모르게 긴장한 채로 입을 꾹 다물고 짐들을 옮기고 있었고, 작업장은 이상할 정도로 고요했다.

적어도 장경과 일단의 경찰들이 들이닥치기 전에는 그랬다.

“지금 당장 손에 든 짐들 내려놔! 경찰이다!”

장경이 경찰 배지를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짐을 옮기던 사람들은 서로 눈치를 보다가 짐을 땅바닥에 내려놓았다.

책임자인 듯한 남자가 쭈뼛쭈뼛 장경에게 다가왔다.

“저 무슨 일이십니까?”

장경이 어렵게 받아 낸 압수수색 영장을 들이밀었다.

“조사할 게 있슴다. 지금부터 여기에 있는 짐들, 단 하나라도 빼돌리거나 밖으로 꺼내 가면 안 됩니다.”

“아이구, 하지만 배달이 밀려 있는데…”

“어쩔 수 없죠. 금방 끝내 드릴 테니 걱정 마십쇼.”

책임자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물러났지만 눈에는 불안한 기색이 가득했다.

장경은 눈을 부릅뜨고 다른 경찰들에게 손짓을 했다.

‘여기서 뭔가 찾아내지 못하면 진짜 막다른 길인겨.’

장경은 긴장감 속에 장갑을 끼고 물류창고의 사무실로 향했다.

장경과 경찰들은 삼일유통의 창고와 사무실을 한참 헤집었다.

“선배님, 여기 뭔가 있습니다!”

형사 한 명이 장경에게 소리쳤다.

장경이 다가가자 형사는 여러 가지 라벨이 붙은 플라스틱 용기가 가득 담긴 상자를 열어 보였다.

“이게 선배님이 찾으시는 물건 맞지 말입니다?”

한눈에 봐도 수상해 보이는 상자였다. 장경도 상자 안을 들여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것들이 얼마나 있냐?”

“이쪽에 열 상자 정도 있습니다. 그런데 안에 내용물이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요?”

“내용물이 없어?”

장경은 고개를 갸웃했다.

상자 안에 들어 있는 용기들은 누가 봐도 화학 실험 등에 사용하는 물품 같았다.

하지만 압수수색 전에 파악한 바로는 삼일유통이 유통하는 물품 중 화학약품이나 용기, 또는 그와 관련된 것들은 없었다.

‘뭔가 수상하긴 한데’

장경은 멀찍이 떨어져 있던 삼일유통의 책임자를 불렀다.

“이것들은 뭡니까?”

“화학실험에 쓰이는 용기 같은데요.”

“뭔지 잘 모르시나 보네요?”

“어휴, 저희 같은 유통회사에서 유통하는 물품이 얼마나 많은데요. 일일이 다 뭐가 뭔지는 모르죠.”

“이 제품은 어디로 나가는 겁니까?”

“잠시만요. 사실 제가 여기 온 지 얼마 안 돼서요.”

책임자는 사무실로 가서 송장 대장 같은 것을 출력해 왔다.

“월흥무역이라는 데로 가는 것 같은데요.”

“월흥무역이요?”

장경은 인상을 찌푸리며 송장을 낚아챘다.

‘월흥무역이라면… 월흥리조트랑 이름이 너무 비슷하잖아? 우연의 일치일까? 아니면…?’

장경은 고민에 빠진 채 송장과 플라스틱 용기를 모두 압수수색 목록에 올렸다.

* * *

장경이 삼일유통을 압수수색하고 있던 그 시각.

필웅은 은신처에서 막 나서려고 준비 중이었다. 시연이 물었다.

“영산지청 가는 거야?”

“응. 황대산이랑 송도영 건 기소하려고.”

“좀 더 배후를 밝혀낸 후에 기소하는 게 낫지 않을까?”

“어차피 배후를 실토할 리도 없고, 어영부영 시간 끌다가는 잡아 놓은 토끼까지 놓칠 수도 있어.”

필웅이 신발을 신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그냥 꼴 보기 싫은 것도 있고.’

물론 배후를 밝혀내서 일망타진하는 것도 좋지만, 필웅의 의도는 오히려 자신을 배신하고도 시치미를 뚝 떼고 있는 송도영을 하루빨리 단죄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들이 배후를 실토하지 않는다는 것도 분명 사실이었다. 그들을 괜히 잡아두면서 어설프게 배후를 캐물었다가는 수사를 그르칠 위험도 있었다.

시연이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넌 어떻게 할 거야?”

“응? 어떻게 하다니?”

“계속 영산에 있을 거지?”

“글쎄… 그래도 이제 조만간 돌아가 봐야지.”

필웅이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벌써? 조금 더 있는 게 안전하지 않을까?”

시연이 피식 웃었다.

“평생 숨어지낼 수는 없잖아.”

“평생은 아니지. 제8요일 교단을 완전히 뿌리뽑기 전까지만 숨어 있으면 되니까.”

“그게 언제가 될 줄 알고?”

필웅이 시연의 눈을 마주 보았다.

“걱정 마.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시연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리조트에 가보자고 한 게 김영지 씨라며?”

“응. 맞아.”

“왜 그랬는지 알아?”

시연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글쎄… 잘 모르겠어.”

“아무튼 그 후로 별 얘긴 없었던 거지?”

“응.”

“그래. 일단 나는 송도영 먼저 체포하러 가야겠어.”

“조심해.”

“형사님들이랑 같이 갈 거야.”

필웅은 가볍게 대답하고는 집을 나섰다.

* * *

필웅과 관할서 형사 2명은 송도영의 아파트에 찾아가 문을 두드렸다.

“송도영 씨! 안에 있습니까?”

잠시 침묵이 이어지다가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걸쇠는 여전히 채워진 상태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영산서에서 왔습니다. 잠깐 얘기 좀 하시죠.”

“잠시만요.”

송도영이 대답과 함께 문을 다시 닫았다.

형사와 필웅은 잠깐 당황스럽게 서로를 마주 보았다.

문 뒤에서 문을 걸어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 젠장! 송도영!”

형사가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문을 쾅쾅 두드렸다.

필웅은 당장 문을 열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파트니까 문은 하나뿐… 그렇다면?’

필웅은 재빨리 밖으로 뛰어나갔다.

송도영의 집은 2층이었다.

예상대로 송도영은 베란다를 통해 밖으로 탈출하려고 시도 중이었다.

송도영은 베란다에 위태로이 매달려 있다가 1층으로 뛰어 내렸다.

필웅은 착지의 충격에 비틀거리는 송도영에게 달려들었다.

“으악!”

필웅은 송도영을 붙잡고 그대로 넘어지듯 쓰러졌다.

“이거 놔!”

송도영은 발버둥을 치며 필웅을 밀쳐냈다.

“큭!”

그의 필사적인 반항에 필웅은 옆으로 밀쳐졌다. 하지만 송도영도 불안정한 자세에서 필웅을 밀쳐내는 바람에 여전히 비틀거리고 있었다.

필웅은 일전 시연이 해준 말을 떠올렸다.

“보이지? 이렇게 잡고, 등으로 넘겨내듯이 앞으로 당겨 주는 거야. 상대방 몸무게를 이용하는 거지.”

필웅은 재빨리 앞으로 달려가 시연이 알려 준 요령대로 도영의 멱살을 잡고 앞으로 메다꽂았다.

“크헉!”

필웅은 넘어진 그의 위에 재빨리 올라탔다. 이윽고 형사들이 아파트에서 달려 나왔다.

형사들이 다가와 그의 팔목에 수갑을 채웠다.

형사들이 송도영을 일으켜 세우자, 송도영은 적반하장 식으로 필웅을 노려보았다.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는 않을 겁니다, 영감님.”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필웅은 차갑게 대답하고는 형사들이 그를 경찰차에 태우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 * *

며칠 후.

영산지청의 한 재판정.

필웅이 피고인석에 앉은 송도영 조사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금은 송도영과 황대산 원로의 유괴 및 감금에 대한 재판이 열리는 중이었다.

이미 황대산에 관한 증거는 차고 넘쳤지만, 송도영에 관해서는 별다른 증거를 확보하지 못한 참이었다.

그러나 송도영 조사관은 이리저리 빠져나가기 위해 도망 다니다가 결국 덜미를 잡혀 기소당하고 말았다.

그렇게 재판정으로 송도영을 끌고 나오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아직 송도영이 적극적으로 필웅과 시연 등의 납치에 가담했는지에 관한 물증까지는 확보하지 못한 상태였다.

“공범인 황대산은 이미 송도영 피고인이 저에 관한 정보를 제공했다고 자백했습니다. 이래도 계속 그 사실을 부인할 겁니까?”

필웅이 차가운 목소리로 재차 질문했다.

오랜 침묵 끝에, 송도영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제가 정보를 제공한 건 맞습니다.”

송 조사관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하지만 저는 진짜 해코지를 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체포 당시 왜 도망간 겁니까? 잘못한 게 없다면서요?”

“그건 그냥 무슨 일인지 몰라 당황해서 그런 겁니다. 도망갔다고 해서 다 유죄는 아니잖아요?”

필웅은 송 조사관은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송도영은, 자신이 조필웅에 관한 정보를 준 것은 인정했지만 유괴를 공모한 사실은 부인하고 있었다.

송도영이 조심스럽지만 동시에 자신 있게 입을 열었다.

“제가 유괴를 같이 꾸몄다는 다른 증거가 없지 않습니까?”

“지금 정보를 제공했다고 스스로 자백했잖아요.”

필웅이 짜증을 간신히 참으며 쏘아붙였다.

여유를 어느 정도 되찾은 송 조사관이 얼굴에 슬슬 미소까지 띠며 대답했다.

“그렇지만 자백이 유일한 증거일 때, 그 자백은 효력이 없다는 거 잘 아시지 않습니까?”

필웅은 쯧 하고 혀를 찼다.

송 조사관은 증거 이론에 빠삭한 인간이었다.

송 조사관의 말대로, 만일 피고인의 죄를 밝혀낼 유일한 증거가 자백뿐이라면, 그러한 자백은 증거가 될 수 없었다.

과거 수사기관들이 오로지 자백만을 얻어내기 위해 용의자를 고문하고 억지로 자백을 얻어냈던 관행을 방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규정이었다.

“피고인,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군요.”

송도영이 무슨 말이냐는 듯 필웅을 올려다보았다.

“물론 피고인의 자백이 유일한 증거일 때는 유죄를 선고할 수 없겠죠.”

“왜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겁니까?”

“하지만 피고인의 자백만 있더라도 유죄가 선고될 수 있다는 건 잘 알 텐데요?”

“그게 무슨 소립니까?”

“지금부터 보여 드리죠.”

필웅이 증거자료를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으며 말했다.

“’피고인’의 자백만으로 유죄 판결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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