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완전기억능력
희주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네. 그중 하나는 일요교회에서 되게 높은 사람이라던데.”
필웅이 긴장해서 좀 더 가까이 다가와 앉았다.
“그래? 혹시 이름을 얘기해 주지는 않았어?”
희주는 두 손을 관자놀이에 가져다 대었다. 예의 ‘무언가를 떠올리는’ 포즈였다.
“이원필이에요.”
“이원필이라고?”
“네. 이원필이라는 사람이었어요.”
희주는 확신에 차서 대답했다.
“그 친구가 알려 준 거니?”
“알려줬다기보다는 그 사람인 것 같다고 지나가듯이 얘기한 거죠.”
‘이원필이라…? 교단에서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 인간인지는 모르겠지만, 역시 이 리조트는 제8요일 교단과 관련이 있는 건가.’
“그래. 힘들었을 텐데 이제 좀 쉬렴.”
희주가 아무 말 없이 필웅을 말똥말똥 올려다보았다.
“왜?”
“부모님 오실 때까지만 같이 있어 주면 안돼요?”
필웅은 아차 싶었다. 희주는 막 사고를 겪어 취약한 상태였다.
어린아이가 아는 사람도 별로 없는 사고 현장에서 그나마 얼굴이라도 아는 누군가와 함께 있고 싶어 하는 건 당연했다.
“그래. 그러자.”
“아저씬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온 거에요?”
“아, 그냥. 이런저런 일.”
희주가 잠시 먼발치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일요교회에 관한 거, 조사하려고 온 거 아니에요?”
필웅은 아무 생각 없이 희주의 이야기를 듣다가,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희주를 돌아보았다.
“뭐?”
“네가 어떻게 그걸…?”
필웅은 자기도 모르게 반문하고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희주는 별말 없이 발을 까딱거리다가 대답했다.
“첫째, 이 리조트에서 일하는 사람 중에는 일요교회에서 일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니 이 리조트는 일요교회와 관련이 있다.
둘째, 아저씨는 며칠 전 사라진 친구를 찾고 있었고, 아저씨가 돌아온 후 일요교회 사람들이 여러 명 체포됐다.
셋째, 아저씨가 여기에 와 있다.
그러니까 아저씨는 일요교회를 조사하고 있는 거잖아요?”
필웅은 뭔가 말을 꺼내려다가, 할 말을 잊은 듯 입을 벙긋거리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고를 막 당한 고등학생에게 들으리라고 기대한 내용이 아니었다.
필웅은 약간 소름이 끼쳤다.
“너… 도대체 그걸 어떻게….”
혼란에 빠진 필웅의 입에서 나온 건 결국 아까 한 말과 똑같은 말뿐이었다.
희주는 그를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좁아터진 영산에서는 약간의 관찰력과 주의력만 있으면 누구나 알 만한 사실인데. 게다가….”
희주가 그제야 필웅을 돌아보며 천진난만하게 말했다.
“만약 정말로 우연찮게 근처에 있던 게 아니라면, 우리 부모님은 아직 영산에서 오는 중인데 아저씨는 벌써 여기 와 있을 리가 없잖아요?
아저씬 소식을 더 빨리 접할 수 있었던 거죠. 그냥 뉴스에서 보다요.”
“너 도대체 뭐야? 정말 그냥 고등학생 맞아?”
희주가 피식 웃었다.
“정말 그냥 고등학생이 아니면 수련회 같은 걸 왔겠어요?”
“너 설마 일요교회… 아니, 제8요일 교단 소속이니?”
필웅이 약간 경계심을 드러내자, 희주는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제8요일 교단? 그게 일요교회가 속한 교단인가 보죠?
그것보다 아저씨 진짜 검사 맞아요? 내가 제8요일 교단 사람이면 무너지는 건물에서 아슬아슬하게 도망쳐 나오는 이상한 짓을 하겠어요?”
희주의 말은 당연히 타당했다. 하지만 필웅은 희주가 어떻게 그렇게 정확하게 필웅의 정곡을 짚은 수가 있는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필웅의 혼란스러운 표정을 잠자코 지켜보던 희주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조금 이상해 보일 수도 있겠죠.”
필웅이 얼떨떨하게 동의했다.
“조금은?”
“나는 사실 희귀한 질환을 하나 갖고 있어요.”
“질환이라니?”
희주는 머리가 지끈거린다는 듯 머리를 문지르며 대답했다.
“완전기억능력이라는 병이에요.”
필웅이 혼란스러워하며 물었다.
“완전기억능력이라고? 본 걸 모두 기억하는 능력?”
“맞아요.”
“그런데 그게 왜 병이지? 아니, 그것보다 그거랑 내가 여기에 온 목적을 꿰뚫어 본 거랑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야?”
희주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사람들이 추리소설을 보면서는 범인을 맞춰도, 일상생활에서는 왜 추리를 못 하는지 알아요?”
나영전일 때나 조필웅일 때나 법학서적 외엔 별로 독서에 흥미가 없던 필웅이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글쎄? 모르겠는데.”
희주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설명을 이어갔다.
“사람들은 계속 앞에서 봤던 것들을 까먹거든요. 추리소설에선 놓친 단서가 있다면 다시 앞으로 돌아가 꼼꼼히 책을 읽으면 돼요.
하지만 현실에서는 책장을 앞으로 넘기는 능력 같은 건 없으니까요. 책장을 앞으로 넘겨 볼 수만 있다면, 바보가 아닌 이상 앞뒤의 이야기를 짜 맞추는 것 정도는 쉬워요.”
“그래서…….”
필웅은 미심쩍다는 듯 자기도 모르게 희주의 머리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바라보면 희주가 갖고 있는 능력이 뭔지 파악할 수 있기라도 하다는 듯이.
“너는 책장을 앞으로 넘겨 볼 수 있다는 거구나.”
“정확해요.”
“나에 대한 책장을 앞뒤로 넘겨 보면서 이야기를 맞춘 거고.”
“그렇죠.”
필웅은 그제서야 조금 이해가 가는 것도 같았다.
희주가 언뜻 본 김영수의 인적사항을 기억해 낸 일, 시연을 납치해 간 차량번호를 정확히 기억해 낸 일들이 비로소 이해가 갔다.
필웅은 문득 다시 한번 이상함을 느꼈다.
“네 말대로라면 그건 정말 편리한 능력 아니야? 학교에서 시험 볼 때도 유리할 거고.”
“그게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에요. 아저씨는 컴퓨터에서 파일 삭제해 본 적 없어요?”
“있지.”
“왜 정리하는 거에요?”
“왜냐니? 계속 쌓이기만 하면 너무 복잡하잖아. 아…!”
필웅은 아무 생각 없이 대답하다가 무언가를 깨닫고는 희주를 바라보았다. 희주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이 계속해서 기억을 잊어버리는 건 다 이유가 있는 거라고 그랬어요. 다른 사람들이 다 갖고 있는 기능을 나만 갖고 있지 않은 거죠.
가끔 잊고 싶은 기억들도 있는데, 어떻게 잊는 건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그 기억이랑 연동되는 다른 기억들을 꺼내다 보면 그 기억이 다시 귀신같이 나타나요.”
필웅은 비로소 희주가 자신의 능력을 질환이라고 표현한 이유를 이해했다.
어떤 기억들은, 분명 존재하지 않았으면 하는 경우가 있다.
창피한 기억들, 소위 ‘흑역사’라 불리는 슬픈 기억들, 아픈 기억들.
사람들은 주기적으로 그런 기억들을 머릿속의 휴지통에 넣어 버리고는 자유롭게 살아간다.
하지만 이 아이는 그럴 수가 없었다.
아이콘으로 가득한 바탕화면처럼, 언제든 튀어나올 준비를 하고 있는 기억들을 머릿속에 잔뜩 짊어진 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유용한 능력인 줄로만 알았는데, 어쩌면 힘든 일이겠어.’
필웅은 갑자기 어린 소녀가 안쓰러워 보였다.
오늘의 참혹한 사건도, 다른 사람들은 지금은 힘들겠지만 언젠가는 떨쳐내고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하지만 그 소녀는 평생 이 사건의 기억을 짊어지고 살아야 할 것이다. 오늘도, 내일도, 어쩌면 죽을 때까지도.
필웅은 뭐라고 위로를 건네야 할지 몰라 소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희주가 대신 입을 열었다.
“하지 마세요.”
“뭘?”
“위로 같은 거 하려면 안 해도 돼요. 익숙하니까요.”
“그래. 알았다.”
“아저씨 얘기나 좀 해줘요.”
“내 얘기?”
“일요교회요. 나도 솔직히 일요교회가 수상한 교회라고는 생각하는데, 아저씨가 왜 그 교회를 조사하는지까지는 잘 모르겠어요. 사이비 교회는 많잖아요.”
필웅은 잠시 생각을 하다가 대답했다.
“글쎄. 그 얘긴 나중에 하자. 네가 알면 위험해질 수도 있는 일이니까.”
“흐으음… 아, 우리 엄마 아빠가 온 것 같아요.”
희주는 뭔가 더 묻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걱정스럽게 달려오는 부모님의 모습을 보며 이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 난 이제 가봐야겠구나.”
“네. 잘 가요.”
필웅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희주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고마워요. 나 구해 준 거.”
“고맙긴.”
필웅은 미소를 지으며 희주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몸조심하고. 몸이 회복되면 언제 영산지청에라도 놀러 오렴.”
“그럴게요.”
희주는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필웅도 인사하고는, 장경을 찾으러 리조트의 잔해 쪽으로 향했다.
* * *
“그게 정말입니까?”
필웅이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부산한 사고현장을 곁눈질하던 장경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렇슴다. 오늘 무너진 이 리조트가 웬 수상한 재단 거란 말임다!”
필웅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재단? 재단이라고? 교단이 아니고?’
필웅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물었다.
“그 재단 이름이 뭡니까?”
“교단에서 운영하고 있는 재단이라고 하는 것 같던디. 잠시만요.”
“그래, 그거였어!”
“어이쿠, 깜짝이야!”
필웅이 갑자기 크게 소리를 지르자 장경이 깜짝 놀라 그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갑자기 뭐가 그거란 말임까?”
“형사님, ‘재단’ 기억 안 나요? 김영수 씨 사건에서!”
장경이 멍한 표정으로 필웅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아 하는 탄성을 울렸다.
“아, 그 파출소장이 미친 사람처럼 찾았던…?”
“그래요! 그 재단! 재단은 결국 교단의 하부 조직에 불과했던 겁니다!”
필웅은 이제서야 영산시에 드리워져 있던 ‘재단’이 어디로 연결되어 있는지 알게 된 기분이었다.
필웅은 이제까지 재단이 모든 일의 궁극적인 배후라고 생각했다. 재단이 어떤 다른 단체, 그것도 종교단체의 산하에 있는 조직이라고는 생각조차 해 보지 못한 것이다.
‘왜 지금까지 제대로 찾지 못했는지 이제야 알겠군.’
장경이 들고 있던 서류를 다급하게 이리저리 넘겨 보았다.
“어… 월요부흥재단? 뭐 그런 이름인데요.”
“대표자는 누굽니까?”
“음… 이원필이라는 사람이네요.”
필웅은 잠시 그 이름을 입 속에 넣고 굴려 보았다.
‘아! 아까 희주가 얘기했던…!’
필웅은 리조트에서 이원필이 목격되었다는 사실을 장경에게 말해 주었다.
“원로 중의 하나이거나, 교주 본인일 수도 있겠군요.”
“그러고 보니 교주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네요.”
“나중에 김영지 씨에게 물어보죠.”
“예. 뭔가 알게 되면 또 말씀 드리겠슴다.”
필웅은 대화를 마치고 긴장이 풀려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장경에게 듣기로는, 다행히 조기에 강당에서 학생들을 대피시켜 인명 피해가 크지는 않았다고 했다. 다만, 학생들이 빠져나오는 중에 붕괴가 발생해 몇 명의 사상자는 발생한 모양이었다.
학생들을 대피시키기 위해 필웅보다 앞서 강당으로 달려간 남자 선생도 학생들을 끝까지 대피시키다가 중상을 입은 모양이었다.
사실, 필웅과 희주가 이미 상당히 붕괴가 진행된 건물에서 무사히 빠져나온 것도 기적 같은 일이었다.
필웅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상념을 떨쳐내기 위해 애썼다.
‘이원필은 교단의 중요 인물이겠지. 그러니 이 리조트를 운영할 권한이 있는 걸 거야. 그렇다면 이원필은 왜 여기로 돌아왔지? 폭발은 대체 뭘 위한 거고?’
필웅은 알게 된 사실들을 꿰어 맞추기 위해 노력했지만, 여전히 교단의 목적을 알아낼 수 없어 답답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