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학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다음 날 오전 10시.
필웅은 자판기 커피를 홀짝이며 호숫가의 벤치에 앉아 있었다.
필웅은 조간 신문을 펼쳐 보았다. 아직은 별다른 뉴스가 없었다.
‘오늘 분명 붕괴 사고가 일어날 거야. 하지만 대체 어디서?’
필웅은 여기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에 조바심이 들었다.
분명 어디선가 사고가 터질 것이다. 그러나 정보를 보다 빨리, 많이 획득하는 것도 중요했다. 혹시 의외의 단서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때, 목도리와 털모자를 둘둘 두르고 선글라스를 낀 사람이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조필웅 씨?”
“알면서 뭘 물어봐. 그리고 그건 내가 물을 말이지. 이렇게 다 가리고 나오면 대체 나보고 어떻게 알아보라는 거야?”
강유라가 목도리를 살짝 내리고 입을 비죽였다.
“우리가 대놓고 만나는 걸 누가 보기라도 하면 안 되잖아.”
“뭐, 좋아. 뭔가 더 알아낸 게 있나?”
“너부터 말해 봐. 아 참.”
시연은 말하다 말고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핸드폰을 하나 꺼냈다.
“이거 갖고 가.”
“이걸 왜?”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직접 봐야 정보를 교환할 수 있다는 건 너무 비효율적이야. 이 핸드폰 번호는 나만 알고 있고, 내 핸드폰 번호도 저장해 놨어.”
그간 핸드폰이 없던 1998년에 머물러 있던 필웅으로서는 격세지감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은 2001년 말이었고 슬슬 핸드폰이 일반인에게도 보급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그러나 필웅은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1998년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미처 이 세계에도 핸드폰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필웅은 새삼 신기함을 느끼며 핸드폰을 이리저리 만져보았다.
“신기하냐? 하긴 촌구석 검사가 이런 걸 어디서 구경이나 해봤겠어?”
강유라가 으스대며 말했다.
“인터넷도 안 되는 고물가지고…….”
“뭐?”
“아무것도 아냐. 일단 잘 알겠어. 얼마 전 일요교회에 대한 압수수색이 있었다는 건 알고 있지?”
“얘기는 들었지.”
“거기서 몇 가지 증거를 발견했어.”
강유라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보여줘.”
필웅은 잠시 수사자료를 강유라에게 함부로 보여줘도 되나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좋아.”
필웅은 압수한 자료 중 회계장부의 사본을 강유라에게 건네주었다.
강유라는 자료를 받아들고 이리저리 살피다가 물었다.
“어디서 나온 거야?”
“일요교회 압수해서 얻은 거야.”
“다른 건 없어?”
“다른 건 없어. 이미 다 정리해 버린 모양이야.”
강유라는 아쉽다는 듯 입술을 조금 비틀었다. 그러고는 장부를 펼쳐 살펴보기 시작했다.
“한 번 살펴봐 봐. 뭔가 알고 있는 게 있나.”
필웅이 말했지만 강유라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유심히 자료를 들여다보고만 있었다.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필웅은 슬슬 지루함을 느끼며 핸드폰을 꺼내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액정은 단색이었고, 문자 기능이 있는지도 의심스러웠다. 필웅은 몇 번 패드를 눌러 보다가 한숨을 쉬고 다시 주머니에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야, 다 봤어?”
필웅이 물었다. 그러나 강유라는 역시 들은 체 만 체 하면서 장부만 들여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필웅이 짜증을 냈다.
“뭘 그렇게 열심히 보는 거야?”
강유라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냥… 글쎄. 정말 별거 아닌 장부 같기도 하고.”
필웅이 혀를 쯧쯧 찼다.
“외관은 멀쩡한 거래처럼 보이지만 이상하다는 걸 모르겠어? 세상에 어느 누가 장부에다가 정직한 거래만 기록해?”
“누가? 정직하고 정상적인 대부분의 사람들…?”
강유라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반문하자, 필웅은 어이가 없다는 듯 강유라를 쳐다보다가 피식 웃었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런 말을 네 입에서 듣게 된다니 우습군. 아무튼 이놈들이 네가 말하는 정직하고 정상적인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닐 거 아냐.”
“그래서? 뭘 발견한 건데?”
강유라가 조바심을 내며 물었다. 필웅이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정보도 주고, 이제는 자료 해석까지 해 줘야 해? 이 거래에서 너는 도대체 뭘 기여하고 있는 거지?”
“핸드폰 줬잖아. 그리고 또 알아? 네 설명을 들으면 네가 미처 발견 못한 걸 이 몸이 발견할지?”
“엄청 뻔뻔하네. 뭐, 좋아.”
필웅은 설명을 시작했다.
“여기 이 자금 들어온 거 보여?”
“에이스 파트너스 주식회사로부터 100만 원? 뭐, 회사 명의로 헌금을 내는 게 이상하기는 한데 금액이 크지는 않잖아?”
“이거 한 건이 아니야. 그 후로 매달 10일 단위로 이상한 출처로부터 자금이 들어오고 있잖아.”
필웅이 몇 건의 기록을 손으로 짚었다.
강유라가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따라가자, 각각 다른 인물로부터 100만 원씩이 입금되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어…?”
“100만 원 한 번이면 교회 규모에 비추어 볼 때 큰돈은 아니지. 하지만 이런 식으로 1년이면 몇천만 원이야.”
“하지만 물론 그것도 큰돈이기는 하지만… 이런 사업을 벌이는 데에는 턱없이 작은 규모 아냐?”
“이것뿐만이 아니야. 지출 내역을 봐봐.”
“지출 내역?”
“지출 대상이 전부 뭔가 이상하잖아.”
강유라는 필웅의 말을 듣고 수입 부분이 아닌 지출 항목을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필웅의 말을 듣고 나서 그 항목들을 보니 뭔가 이상하기는 했다.
“이게 다 뭐야?”
지출 항목이라고 되어 있는 항목들의 지출 규모가 생각보다 컸다. 그런데 그 지출 대상이 하나같이 이상했다.
“버섯재배농장… 홍삼슈퍼마켓… 심신수련원… 이런 데다가 몇억 원씩을 송금한다고?”
“뻔하지. 별도로 사업체를 만들어 놓고 교회에서 그 사업체로 자금을 돌리고 있는 거야.”
“그 말은…?”
“이 사업체들이 뭔가 수상한 일을 벌이기 위한 그릇? 용기? 뭐 그런 걸로 사용되고 있다는 거지. 이 사업체들, 모르긴 몰라도 아마 제대로 사업을 하고 있는 사업체들도 아닐걸? 전부 다 유령회사일 거야.”
“그럼 이 사업체들이 있는 곳을 털어 보면 되겠네!”
필웅이 혀를 끌끌 찼다.
“유령회사라고 했잖아. 이 사업체들의 주소지로 가 봐도 아무것도 없을 거야.”
“그럼 뭐야? 결국 자금 세탁이 이뤄지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그게 누구에게 뭘 위해 흘러 들어갔는지는 아직도 모른다는 거잖아?”
“그래서 지금 당장 이 장부의 활용가치가 높지 않다는 거지. 물론 나중엔 유력한 증거가 되겠지만.”
강유라는 뭔가 결심한 표정으로 필웅에게 말했다.
“이 장부, 나한테 줘 봐. 내가 갖고 있는 자료들이랑 연관점을 찾아낼 수도 있을 것 같아. 여기서 슥 봐서는 무리야. 어차피 사본이라며? 원본은 따로 있을 거 아냐.”
“아무리 사본이라도 그건 좀…….”
“이미 나한테 보여 준 시점에서 아웃 아냐? 그리고, 저놈들은 온갖 반칙하면서 뒤에서 총질하는데 너 혼자 별것도 아닌 규칙 지키려다 벌집 되고 싶어?”
‘강유라의 말대로, 별것 아닐 수도 있어. 하지만 불법과 싸운다는 내가 앞장서서 불법을 저질러도 괜찮은 건가?’
필웅이 얼굴을 손에 괸 채 생각에 빠지자, 강유라는 노골적으로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 싫으면 말아. 정 찜찜하면 내가 훔쳐 갔다고 해. 어차피 네 의사랑 상관없이 안 돌려줄 거니까 결과적으로는 똑같잖아.”
필웅이 그 말에 고개를 들고 강유라를 쳐다보았다.
“뭐……?”
필웅의 의혹에 찬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강유라는 냅다 일어서서 뛰기 시작했다.
필웅은 순간 어안이 벙벙해져서 멀어지는 강유라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벌떡 일어섰다.
“야! 이 미친… 뭐 하는 거야!”
이미 저만치 멀어진 강유라가 신나게 외쳤다.
“아, 그럼 자료 훔쳤다고 기소하시든가!”
필웅도 강유라를 쫓아 한동안 달렸다. 그러나 이미 강유라가 먼저 달리기 시작한데다가 강유라가 놀라울 정도로 잘 달려서 필웅은 이내 추격을 포기했다.
대신 필웅은 전화기를 꺼내 저장되어 있는 유일한 번호를 눌렀다.
- 띠리리리
전화가 연결되지 않았다.
필웅은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약 3분쯤 후, 목소리가 들려왔다.
“헉… 헉… 여보세요?”
“진짜 가지가지 하는구나.”
강유라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필웅은 어이가 없었다. 한때 수없이 많은 회사를 쥐락펴락하던 삼영의 영애가 아니라 장난기 심한 여고생이라도 상대하는 기분이었다.
“대신 다 보고 바로 돌려줘.”
“걱정 마~”
강유라는 경쾌하게 대답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필웅은 김영지로부터 교단에 대해 조금 더 파악해 둬야겠다고 생각하며 발걸음을 돌렸다.
필웅은 김영지와 시연과 함께 머무르고 있는 집에 도착했다.
“어, 왔네?”
먼저 필웅을 발견한 시연이 반갑게 인사했다. 필웅이 반가운 것도 있겠지만 김영지와 둘만 집에 있는 것이 영 어색했던 모양이었다. 장경은 어디론가 나가고 없었다.
“응.”
“어디 갔다 온 거야?”
“강유라 만나러.”
“뭔가 얻어낸 게 있어?”
필웅은 강유라가 회계장부를 보고 들려 준 이야기들을 전달해 주었다.
“허… 그런 게 있었구나.”
“조금 꼼꼼하게 봤어야 했는데, 원하는 자료가 아니라고 생각하니 우리도 너무 안일했나 봐.”
“아무튼 그래도 뭔가 단서가 생긴 것 같아 다행이네. 우리도 한 번 다시 살펴보자. 원본은 갖고 있지?”
필웅은 시연과 대화를 나누면서 슬쩍 김영지의 눈치를 살폈다. 김영지는 묵묵히 TV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필웅은 한 번 헛기침을 한 뒤 김영지에게 은근히 물었다.
“김영지 씨, 당신이 알고 있는 자료 중에 교단이 정확히 삼영의 어느 회사와 결탁하고 있는지 알 만한 자료는 없습니까?”
김영지는 잠시 덥수룩하게 자란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그렇게까지 구체적인 건 몰라. 삼영그룹에 소속된 회사는 수도 없잖아? 단지 의료기기 비슷한 사업이니까 그쪽 계열사가 아닐까 짐작만 할 뿐이지…”
김영지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필웅은 강유라에게 삼영그룹 내 의료사업 부문을 다루는 회사에 대해 좀 더 조사해 달라고 이야기를 전달해 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날 오후.
사무실로 걸려온 전화를 받는 필웅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리조트라구요?”
“예. 월흥 리조트라고, 어젠가 거기로 수련회 간 학생들이 있다던디요.”
‘리조트. 그래. 학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학교가 아닌 ‘건물’이라고만 나타난 이유가 있었어!’
필웅은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다급하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형사님도 최대한 빨리 그쪽으로 와 주세요.”
“그런데 붕괴사고가 난다는 게 뭔 소립니까 당최?”
“전화로 설명하기는 어려워요. 저 먼저 출발하겠습니다.”
필웅은 달력을 돌아보았다. 학생들이 리조트에 도착한 날과 희주가 수련회를 간다고 한 날이 일치했다.
필웅은 안절부절못하다가, 희주의 전화번호를 받아뒀던 것이 기억났다.
‘희주가 없었다면 시연을 찾지도 못했을 거야.’
필웅은 희주의 결정적인 목격담으로 시연을 무사히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을 떠올렸다. 그런 희주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사건 때문에 다쳤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왠지 모를 불안감이 그를 조용히 휩싸고 있었다.
필웅은 재빨리 희주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계속해서 전화벨이 울렸다. 영원 같은 3분이 지났지만,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필웅은 굳게 마음을 먹고 서둘러 택시를 불렀다.
‘아직은 막을 수 있을지도 몰라!’
필웅은 잘근잘근 입술을 깨물었다.
리조트는 영산시에서 1시간 정도 거리에 있었다.
1시간 정도를 달려 도착한 리조트는, 숲이 우거진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었다.
‘꼭 그 기도원을 보는 것 같군.’
필웅은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리며 초조하게 입술을 핥았다.
서둘러 택시에서 내린 필웅의 눈에 리조트 앞에 몇 명이 선생님들이 모여 회의를 하고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저기요.”
필웅이 빠른 걸음으로 그들에게 다가가 말을 붙였다.
갑자기 나타난 필웅의 모습에 한 남자 선생이 깜짝 놀라 그를 돌아보았다.
“누구시죠?”
“아, 저는 조필웅 검사라고 합니다.”
필웅은 검찰 신분증을 내보이며 빠르게 말을 이었다.
“지금 이 리조트 건물에서 학생들을 대피시켜야 할 것 같습니다.”
“예? 무슨 말씀이시죠?”
“길게 설명할 시간이 없어요. 사고가 발생할 겁니다.”
남자 선생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예?
“사고가 발생할 거라구요. 리조트가 무너질 겁니다. 안에 학생들이 있나요?”
“강당에 학생들이 모여있긴 한데…….”
필웅은 발을 동동 구르며 말했다.
“여기서 이럴 틈이 없습니다. 빨리 학생들을 대피시키세요, 당장요!”
“아니, 그래도 무슨 일인지 설명은 해 주셔야…….”
“학생들이 다치면 책임지실 겁니까?”
필웅이 으르렁대자, 남자 선생은 못 미덥다는 표정으로 강당을 향해 뛰어갔다.
필웅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한숨을 내쉬던 순간이었다.
-콰앙!
갑자기 귀가 멀 듯한 굉음이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