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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로 개과천선-102화 (102/151)

102화 011207

시연은 필웅이 어쩔 수 없이 다시 나가서 사온 바나나 껍질을 신나게 벗기기 시작했다.

“그래서, 형사소송법 제216조가 뭡니까? 저도 경찰 시험 볼 때 본 거 같긴 한디 원체 기억력이 안 좋아서 말임다.”

김영지도 궁금하다는 듯 흘끔 필웅을 쳐다보았다.

필웅이 설명을 시작했다.

“형사소송법 제216조는 영장 없이 압수수색을 할 수 있는 특별 규정입니다. 주로 긴급체포를 할 때 체포현장에 남아 있는 증거들을 압수하기 위해 만들어진 규정이죠. 예전에 진우현 집 압수수색했을 때 기억나시죠?”

“아…”

“예, 그때도 긴급체포하고 영장 없이 압수수색했었죠.”

장경은 비로소 그때의 일이 기억났다는 듯 손가락으로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잘됐네요! 그럼 그 패거리들을 체포한 다음에 현장에서 증거들을 빨리 압수해 버리면 되겠군요! 제가 현지 경찰서에 연락하겠슴다.”

장경이 신나서 전화기가 있는 방으로 뛰어가려다가, 문득 뭔가를 깨달은 표정으로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어… 그런데 검사님. 제가 잘 모르긴 하는데, 영장 없이 긴급체포하려면 그 죄가 좀 큰 죄여야 되는 거 아님까?”

“그렇죠.”

“그런데 납치가 물론 중범죄이긴 합니다만 그 정도는 아닌 거 같은디요…? 살인미수라고 우겨야 되나?”

“살인미수라고 주장하면서 체포했다가, 살인미수가 아닌 걸로 판정되면 압수한 증거들에까지 안 좋은 영향을 미칠 거예요.”

“예? 그럼 이게 지금 가능한 얘깁니까? 긴급체포 요건이 안 맞는 것 같은디요?”

장경이 혼란스러워하며 말했다.

필웅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놈들한테는… 적용할 만한 다른 죄가 있습니다.”

* * *

장경은 차를 멈추고, 뚜벅뚜벅 교회를 향해 걸어갔다.

오늘 새벽 그들의 탈출로 인해 경계가 한층 더 강화된 모양이었다. 험악한 표정을 한 거한들이 이리저리 분주하게 영내를 오가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이 장경을 발견했다.

“어… 어?”

“목소리가 그거밖에 안 돼서 니 친구들한테 들리겠냐?”

장경이 피식 웃으며 한마디 하고는, 거한이 뭐라고 반응하기도 전에 우렁차게 외쳤다.

“야, 이놈들아! 수갑 받으러 와라!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니다!”

영내에서 돌아다니던 거한들이 굳은 표정으로 하나둘씩 그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이놈이 미쳤나…”

거한들이 한자리에 모여들기를 기다리기라도 했던 듯 장경이 기세 좋게 말했다.

“귀찮으니까 한 번에 잘들 들어라.”

“?”

“너희들을 조필웅 외 3인에 대한 특수감금, 특수협박죄의 피의자로 체포한다!

너희들은 변호인을 선임할 수 있고, 니들이 지금 하는 말은 법정에서 불리하게 적용될 수 있다. 알아들었냐, 이 새끼들아!”

“저기, 형사 양반. 말씀 중에 미안한데.”

거한 중 하나가 대놓고 비웃음을 띠며 손을 들었다.

“형사 양반은 팔이 10개라도 되쇼? 우리를 뭐 혼자서 어떻게 체포하실 건데?”

“나도 팔은 2개 밖에 없지.

하지만 내 친구들도 각각 팔이 2개씩이거든.”

그의 말을 신호로, 근처 풀숲에 숨어 있던 인근 경찰서의 경찰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엔 두세 명 같았지만, 점점 수가 늘어나자 거한들은 눈에 띄게 당황하기 시작했다.

장경은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뒷주머니에서 수갑을 꺼내 들었다.

“자, 참고로 내가 제일 덜 아프게 체포해 준다! 나한테 체포당할 사람?”

어쩔 줄 모르며 눈치를 보던 거한 중 하나가, 마침내 결심한 듯 으아아 하고 기합을 지르며 각목을 든 채 장경에게 달려 들어왔다.

“체포 당하려고 달려오는 건 아닌 것 같군. 유감이다.”

장경은 허리춤에 찼던 경찰봉을 빠르게 꺼내고는 거한이 휘두르는 각목을 피한 뒤, 그대로 거한의 다리 부분을 강타했다.

“으악!”

달려오던 가속도에 몽둥이를 얻어맞은 거한은, 그대로 다리를 감싸 쥐며 비명을 지르고는 자리에서 나동그라졌다.

“방금 그놈 달려든 거 봤지? 공무집행방해 현행범이다! 전부 체포해!”

경찰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면서 거한들을 제압하기 시작했다. 거한들도 힘깨나 쓰는 인간들 같았지만, 경찰봉으로 무장하고 수적으로도 우세한 경찰들을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었다.

“이게 뭣들 하는 거야!”

갑자기 어디선가 꼬장꼬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건물 뒤편에서 한 남자가 분노에 찬 표정으로 나타났다.

예전에 장경도 본 적 있는 황대산 원로였다.

황대산 원로가 노발대발하며 씩씩거렸다.

“당신들, 지금 신성한 교회에서 이게 다 무슨 짓이야! 영장도 없이 이렇게 사람 체포하는 거 불법 아닙니까?!”

“형사소송법 제216조에 따라 사형, 무기징역에 해당하는 중범죄를 범한 용의자들은 영장 없이 체포할 수 있는 건 모르나 보군요.”

필웅이 어수선한 가운데 장경의 뒤에서 소리 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와 장경의 모습을 비로소 알아본 황대산 원로는 이를 갈다가 피식 하고 비열한 웃음을 짓더니 말했다.

“검사님, 그게 다 무슨 말입니까? 저희가 무슨 중범죄를 범했다고 그래요? 저희가 사람 죽이기를 했습니까? 테러를 했습니까?

잠시 모시고 이야기 좀 나눠 보려던 걸 신도분들이 조금 오해를 하고 거칠게 다뤄서 화가 나신 것 같은데, 잠시 진정하시고…….”

“아뇨, 신도들이 문제가 아닙니다. 사실 당신이 문제죠.”

황대산 원로의 얼굴에서 불쾌한 미소가 사그라들었다.

“그게 무슨……?”

필웅이 그를 똑바로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외쳤다.

“당신을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에 따른 범죄단체 조직죄의 간부로 체포합니다!”

이미 주변의 신도들의 제압을 끝내 놓고 있던 경찰들이 달려가 황대산 원로를 에워쌌다.

황대산 원로가 비틀거리며 뒤로 몇 걸음 물러서더니, 발악하듯 외쳤다.

“이, 이럴 수가…! 그게 무슨 헛소립니까!”

“당신이 교회를 빙자해 조직원들을 끌어모으고, 온갖 불법적인 일들을 행해 왔다는 증거가 있습니다! 저를 납치한 걸 포함해서요.

범죄단체의 간부는 무기징역 또는 7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도록 되어 있으니, 당신이야말로 이 긴급체포의 진정한 목적입니다! 당장 체포하세요!”

황대산 원로를 에워싸고 있던 경찰들이 그에게 몰려들어 그의 팔을 비틀고는 수갑을 채웠다.

너무나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들에 황대산 원로와 그를 따르는 부하들도 모두 당황해 입만 벌리고 있을 뿐이었다.

“자.”

경찰들이 황대산과 거한들을 이끌고 떠나자, 필웅이 장경을 포함해 압수수색을 위해 남은 몇 명의 경찰들을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한 번 화끈하게 털어 보죠!”

2시간 후.

필웅과 장경은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자료를 담은 상자를 내려다보았다.

자료가 없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기대한 수준도 아니었다.

일전에 봤던 주사기 등도 어느새 치워지고 없었다.

장경이 험악하게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이놈들, 생각보다 날쌘 놈들인디요.”

“그러게요. 생각보다도 자료들을 더 빨리 처리해 버린 것 같군요.”

“일단 회계장부 비스무리한 것들도 몇 개 입수하긴 했는데, 이것들은 그냥 진짜 교회 회계장부 같아서요.”

필웅도 장부를 하나 집어 들고 슥 훑어보았다. 교회 신도들의 헌금 기부 내역 등이 적혀 있는 일반적인 교회 장부 같아 보였다.

필웅은 한숨을 쉬며 장부를 다시 상자에 집어넣었다.

“뭐, 어쨌든 황대산을 체포하는 데 성공했고, 증거들도 없지는 않으니 돌아가서 천천히 한 번 살펴보죠.”

“알겠슴다.”

장경은 경찰들에게 손짓해 증거자료가 들어간 박스들을 옮기라고 지시했다.

필웅은 증거자료를 들고 나가는 경찰들의 뒷모습을 보며, 불현듯 삼영과의 싸움이 다시 시작됐다는 걸 느꼈다.

그동안 수도 없이 강무완이 저지른 죄의 대가를 받게 하려고 노력했지만, 지금까지의 성과는 미미했다.

그러나 제8요일 교단과의 커넥션은 그동안 필웅이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단서였다.

‘아… 그러고 보니 어쩌면?’

필웅은 처음부터 왜 교단이 자신과 시연에게 이토록 흥미를 가지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때는 교단과 삼영 간에 무슨 관계가 있었는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달랐다. 교단은 어떤 식으로든 삼영과 관련이 있고, 그 배후에는 K, 강무완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교단이 기를 쓰고 필웅과 시연의 입을 막으려고 시도한 것도 나름 이해가 갔다.

‘아마 시연이와 내 입을 동시에 막지 않으면 결국 반격을 당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겠지.’

시연과 필웅을 감시하던 그들로서는 시연이 갑자기 제8요일 교단에 관한 것을 알아내고, 필웅에게 이를 알리러 가는 것이 예상치 못한 우발적 사태였을 것이다.

그러니 정교한 계획을 짤 틈도 없이 그렇게 갑자기 시연을 납치한 것일 터였다.

‘그리고 송 조사관이 나를 도와주는 척하면서 함정에 빠트린 거로군.’

필웅은 송 조사관을 의심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기도원에서 그를 기다렸다는 듯이 황대산 원로와 부하들이 나타난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단순히 경계를 하다가 우연히 필웅과 장경을 발견했다기에는, 그들에게는 어떠한 놀라움이나 긴장의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태도는 마치 그 시간에 그 장소에 당연히 있어야 할 사람들을 발견했다는 태도에 가까웠다.

필웅은 머리를 흔들며 송 조사관에 대한 생각을 떨쳐냈다. 물론 괘씸했지만, 지금 당장 처리해야 할 상대는 그가 아니었다.

‘이 모든 건 결국 강무완에게 연결되어 있는 게 분명해. 마약사업이라니, 대체 어디까지 타락하려는 거냐, 강무완.’

필웅은 강무완과의 싸움에서 또 다른 돌파구가 생겼다는 것을 되새기며 말없이 투지를 불태웠다.

“하, 그나저나 시간 참 빠르네요. 벌써 12월 6일이라니.”

장경의 말에 필웅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뭐라구요?”

“예? 시간 참 빠르다구요.”

장경은 대답하고는 다른 경찰들과 함께 자료를 들고 차 쪽으로 이동했다.

‘2001년 12월 6일…?’

필웅은 문득 얼마 전 희주에게서 나타난 크리미널 아카이브를 떠올렸다.

분명 ‘건물 붕괴’라는 내용이었다.

크리미널 아카이브는 대부분 범죄자를 그가 바라볼 때 나타나고는 했지만, 가끔 중요한 피해자를 통해서 나타나는 경우도 있었다.

그때는 당황해서 희주가 범죄자일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주의 깊게 읽지 않았지만, 생각해 보니 희주가 어떤 범죄의 희생양일 수는 있었다.

그리고, 희주의 크리미널 아카이브는 어떤 날짜에 어떤 사고가 발생한다는 점을 알려 주고 있었다.

‘…!? 잠깐!’

필웅은 소스라치게 놀라서 다급하게 자료를 싣는 장경에게 다가갔다.

“영산 주위에 혹시 큰 건물 같은 게 있습니까? 학생들이 많이 들어갈 만한 건물이요!”

“글쎄요? 저도 이 근방은 잘 몰라서. 왜요?”

필웅이 긴장해서 주위를 잠시 둘러보다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건물 붕괴사고가 일어날 것 같습니다!”

“예? 그게 무슨 소립니까? 검사님은 그런 걸 어떻게 아시는 거구요?”

“아무튼 그런 게 있어요. 영산 인근에 학생들이 많이 들어갈 만한 건물 같은 게 있는지 알아봐 주세요!”

장경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일단 알았다고 대답하고는 차를 타고 떠났다.

필웅은 신경질적으로 입술을 깨물기 시작했다.

‘2001년 12월 7일. 내일이지. 2001년 12월 7일…20011207…01. 12. 07!’

011207.

그가 희주의 크리미널 아카이브에서 보았던 수수께끼의 숫자.

그리고 내일은 2001년 12월 7일.

아마도 내일, 어떤 건물의 붕괴사고가 있을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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