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그녀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이 새끼 누구야?”
“아까 잡아 온 놈인 것 같은데?”
경비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제압 당한 필웅을 내려다 보았다.
이미 사태를 전부 해결했다고 생각했는지 필웅을 바라보며 그들은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어떻게 탈출한 거야?”
“모르겠는데. 아무튼 다시 집어 넣자고.”
경비는 케이블타이 같은 것을 꺼내 필웅의 손목을 뒤로 돌려 묶었다.
그들이 필웅을 막 일으켜 세운 순간이었다. 갑자기 위층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경비들은 불안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다가, 다시 위를 올려다 보았다.
“뭐지…?”
그들이 무슨 사태인지 알게 되는 데에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계단에서 성난 수감자들이 밀려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어…어?”
필웅을 잡고 있던 경비 하나는 당혹감에 말을 더듬더니 그대로 필웅을 버려두고 도망쳐 버렸다. 그 때까지 필웅을 잡고 있던 다른 경비는 어쩔 줄을 모르고 멍하니 필웅을 잡고 있다가, 수감자들의 분노한 표정을 마주하자 역시 혼비백산해 도망가 버렸다.
수감자들은 성난 함성을 지르며 그대로 필웅을 지나쳐갔다. 필웅은 주위의 수감자들을 재빨리 살펴 보았지만, 시연과 장경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필웅은 손목이 뒤로 묶인 채 엉거주춤한 자세로 위층으로 향했다. 위층의 감옥 문이 대부분 열려 있었다. 김영지가 성공한 모양이었다.
그 때 감옥 하나에서 장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형사님!”
필웅이 반갑게 외쳤다. 마지막 감옥 문을 연 김영지도 복도 저편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검사님! 아니 근데 손은 왜 묶여 있는 검까?”
“사정이 좀 있어서, 이것 좀 잘라 주실래요?”
“가만 있어보자…”
장경은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다가 교도관용 책상을 하나 발견했다. 책상 서랍을 뒤져 보니 낡고 녹슨 가위 하나가 나왔다.
“잠깐만 기다리십쇼.”
장경은 한참이나 낑낑대며 필웅의 손을 묶고 있는 케이블타이를 잘라냈다.
“시연이는 못 보셨습니까?”
“못 봤는데요. 저 아저씨가 감옥 문 열고 다니는 건 봤는데…”
장경이 슥 턱짓으로 김영지를 가리켰다.
“저 아재는 누굽니까 근데?”
“일단 시연이를 먼저 찾아 보죠.”
그 때 김영지가 연 마지막 감옥 문에서 누군가가 비틀대며 걸어나왔다.
시연이었다.
“시연아!!”
필웅은 자기도 모르게 한달음에 뛰어가 시연을 품에 안았다.
시연은 약간 어지러워하면서도 간신히 필웅을 알아보고는 힘없이 입을 열었다.
“필웅이…?”
“다행이다…다행이야.”
필웅은 그렇게 시연을 품에 꽉 안고서, 그러지 않으면 시연이 사라지기라도 할 듯 시연의 등과 머리카락을 연신 쓸어내렸다.
김영지가 별꼴을 다 본다는 듯 옆에 서서 그들을 지켜보다가 말했다.
“이봐 고만하고! 이제 슬슬 우리도 도망가야 할 것 같은데. 저 놈들이 외부에서 다른 경비들이라도 불러 들여오면 여기서 탈출할 방법이 없어져.”
필웅은 그 말을 듣고 퍼뜩 놀라 안고 있던 시연을 풀어 주고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시연아, 일단 여기서 나가서 이야기하자. 어디로 가면 됩니까?”
김영지를 향한 물음이었다. 김영지가 손가락으로 복도 끝을 가리켰다.
“저 쪽에도 비상 출구가 있는 것 같더군. 아직 건물 안에 경비들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니 저기로 나가자고.”
필웅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정신없어 하는 시연의 손을 붙잡고 출구를 향해 달렸다. 장경과 김영지도 그들의 뒤를 따랐다.
출구의 문은 다행히 열려 있었다. 덜컹 하는 육중한 소리를 내며 철문이 열렸다.
어느새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었는지, 햇살이 문을 연 그들에게 쏟아져 내렸다.
“자, 저기로 갑시다.”
필웅이 밤에 처음 기도원을 잠입할 때 이용했던 후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기도원 영내에서 아직도 풀려나온 수감자들이 소동을 피우고 있는지 그들을 쫓아 오는 경비는 보이지 않았다.
일행은 후문을 열고 몰래 밖으로 나가는데 성공했다.
* * *
장경은 차에 시동을 켜서 최대한 빨리 기도원 주변에서 벗어났다.
한숨을 돌린 장경은 비로소 피칠갑을 하고 있는 김영지를 의심스럽게 쳐다봤다. 필웅도 그런 장경의 시선을 느꼈지만, 일단 시연에게 말을 걸었다.
“시연아, 괜찮아? 어떻게 된 거야?”
시연은 강력한 마취제에 당했는지 아직도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쥐고 말했다.
“잘 모르겠어. 네 집에 할 얘기가 있어서 찾아갔었는데, 누군가가 뒤에서 습격했어. 벗어나려고 했는데 마취 같은 걸 당해서… 그러고 나서는 눈을 떠보니 여기였는데…”
“누군가 대화를 한 사람은 없었어?”
“아.”
시연이 비로소 뭔가 생각이 난듯 작게 탄성을 질렀다.
“그러고 보니 감옥에 누가 찾아왔었어.”
“누구야?”
“황대산인가? 자기가 제8요일 교단의 원로라고 했어.”
필웅이 물었다.
“무슨 말을 한 거야?”
시연은 인상을 쓰며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아무래도 갇혀 있는 동안 계속 마취제나 수면제에 당한 모양이었다.
“그게 그러니까 제8요일 교단을 더 이상 파헤치지 말고, 얌전히 거기서 한동안 갇혀 있으라는 얘기였어.”
“그게 다야?”
“응. 그 후엔 풀어주겠다고”
“다른 얘기는 없이?”
시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른 건 얘기하지 않았어.”
시연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다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네가 거길 들어와 있다니 좀 놀랐어.”
“네가 여기에 갇혀 있다는 것까지 알고 잡힌 건 아냐.”
필웅은 어떻게 그와 장경이 건물에 갇혀 있게 되었는지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랬구나”
“넌 무슨 이야기를 하러 온 거야?”
계속해서 김영지를 힐끔힐끔 노려보고 있던 장경이 볼멘 목소리로 말했다.
“검사님, 잠시만요. 같이 있길래 데리고 나오기는 했지만 이 사람은 누굽니까? 이 사람 앞에서 그런 얘기를 해도 되는 겁니까?”
김영지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누가 누굴 데리고 나와? 내가 당신들 데리고 나온 거야.”
“뭐요?”
필웅이 장경을 만류하며 그가 원래 제8요일 교단의 원로였다는 것과, 교단에 반기를 들어 갇혀 있었다는 것을 설명해 주었다.
장경은 여전히 미심쩍다는 듯 물었다.
“그러니까 제8요일 교단의 고위층이라는 겁니까?”
“고위층이었지.”
그 때 시연이 끼어들었다.
“잠시만요. 김영지라구요?”
“그래.”
“당신이 혹시 kyj60인가요?”
필웅과 장경은 처음 듣는 이야기에 어리둥절해서 시연과 김영지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김영지는 잠시 고민하다가, 한숨을 내쉬고 대답했다.
“그래, 그게 나다.”
“kyj60? 그게 뭔데?”
필웅이 물었다. 시연이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kyj60은 PC통신에서 누군가가 사용하는 ID야. 그 ID의 주인은 제8요일 교단의 정체와 교단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갖고 있어.
그가 쓴 게시글을 보고 나는 일요교회가 제8요일 교단 소속 교회라고 의심하게 됐고, 그걸 경고해 주려고 갔다가 납치를 당한 거야.”
필웅이 김영지를 돌아보았다.
“당신이 그 글들을 쓴 겁니까?”
김영지는 귀찮다는 듯 대답했다.
“그래.”
“그 글이 발견되서 교단에게 감금된 겁니까?”
“맞아. PC통신이나 인터넷이라고는 하나도 모르는 놈들일 줄 알았는데 아니더군.”
“당신이 한 말들을 입증할 만한 자료가 있습니까?”
“있었지. 하지만 갇힐 때 뺏겼어. 아마도 일요교회 내부의 은밀한 장소 어딘가에 숨겨져 있겠지.”
김영지는 그 말을 끝으로, 눈을 감더니 이내 코까지 골면서 잠이 들어 버렸다. 새벽 내내 펼친 대활극에 몸이 피곤한 모양이었다.
필웅이 시연에게 말을 건넸다.
“제8요일 교단이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야? 김영지 씨한테는 대략적으로밖에 듣지 못했어.”
“그게…”
시연은 자신이 인터넷에서 본 것들을 말해 주었다.
“제8요일 교단은 외관상으로는 합법적인 종교단체 같은 모습을 갖추고 있어. 하지만 그 내부는 사실상 군대나 범죄 조직과 다름이 없지. 위계질서가 엄격하고, 원로라고 불리는 사람들에 의해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처음에는 일부 개인들에 대한 살인이나 방화 등을 지시했다는 혐의 정도였는데, 요새는 밀수 같은 보다 조직적인 범죄에 개입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어. 심지어 정재계와도 연줄이 있는 것 같아.”
김영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만 있었다.
필웅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김영지에게 들은 마약 제조 이야기를 떠올리고, 그 이야기를 장경과 시연에게도 들려주었다.
시연은 크게 놀랐다.
“마약 제조? 그렇게까지 중범죄에 손대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아무튼, 김영지 씨가 인터넷에 올린 이야기는 그게 다야. 하지만 만약 증거가 없다면…”
“그냥 허튼 소리로 치부해 버릴 수도 있겠지.”
“응. 일단 외관상으로는 멀쩡한 종교단체처럼 보이니까…”
필웅은 고민에 빠졌다.
일단 오늘은 탈출했지만, 이미 그들은 필웅과 시연의 거처를 모두 알고 있었다. 앞으로도 또 이런 일을 벌이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그들로부터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교단 전부를 일망타진해야 할 것이었다. 하지만 교단을 일망타진하기 위해서는 증거가 필요했다.
“일요교회를 털어야겠어.”
필웅이 입을 열었다. 시연도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계속 이렇게 도망다닐 수는 없어.”
“하지만 무슨 구실로요? 종교단체를 수사하는 건 쉽지 않을 건디요.”
장경이 우려스럽다는 듯 말했다.
“우리가 바로 그 증인이잖아요?”
시연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한 두 명도 아니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감금당했는데, 그 중에서도 우리를 도와줄 사람이 있을 거에요.”
장경도 턱을 쓰다듬으며 수긍했다.
“그렇군요. 우리만 이야기하면 설득력이 좀 떨어질 수도 있으니 그 사람들까지 전부 참고인으로 불러서 조사를 하면…”
“그러면 제대로 된 범죄 전체를 밝혀낼 증거도 찾을 수 있겠죠.”
장경은 비로소 안심이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참, 형사님. 당분간 이 사람과 저희가 숨어 지낼 만한 곳이 있을까요?”
“예? 검찰에서도 안전가옥을 운영하고 있지 않습니까?”
“가급적 검찰이나 경찰으로부터 자유로운 장소에 숨어 있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김영지 씨 말대로라면 현지 검찰이나 경찰 내부에도 교단의 끄나풀이 있는 것 같아요.”
필웅은 적당히 둘러댔다. 사실 그가 이 근처에 시연을 머물게 하고자 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미래에서 본 기사에 따르면 시연이의 시체가 한강변에서 발견되었다고 했어. 그렇다면 서울에서 멀리 떨어트려 놓을수록 안전하겠지… 오히려 이 영산이 시연이에게는 더 안전한 장소일지도 몰라.’
“흠…”
그런 필웅의 생각을 알 턱이 없는 장경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제 사촌동생이 근처에 사는데 거긴 어떨까요?”
“사촌동생이요?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면 위험할 것 같은데…”
“아, 지금은 유학 때문에 나가 있어서 집은 비어 있슴다. 1-2개월 정도는 괜찮을 거에요.”
“유학이요?”
“예. 미국에서 무슨 의사? 약사? 그런 거 준비한다고 하던디. 곧 돌아온다고 하긴 합디다.”
“그래요? 잘 됐군요. 그럼 일단 거기로 가시죠.”
장경은 알았다고 대답하고는 핸들을 돌렸다.
‘이 사건들이 시연이의 죽음과도 관련이 있는 걸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만일 필웅도 같은 곳에 잡혀서 그녀를 구출하지 않았다면, 그녀를 회유할 수 없음을 깨닫고 교단이 극단적인 방법을 취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일단은 시연이를 구했다는 데 만족해야 하나?’
필웅은 근심어린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마음 속에 또 하나의 새로운 질문이 떠오르고 있었다.
‘교단 그리고 재단. 이 모두가 삼영과 연관이 있는 것들이라면, 교단과 재단은 무슨 관계인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