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탈출계획
“방법이 있다구요?”
필웅이 반갑게 물었다. 그러나 잠시 후 필웅은 이상한 점을 하나 깨달았다.
“그런 방법이 있다면 왜 애초에 탈출하지 않은 겁니까?”
김영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내가 여기서 탈출한다고 해도 그 놈들로부터 빠져나갈 방법이 없어. 그 놈들의 세력은 어디에든 미쳐 있지. 영산의 공무원들 중에도 그 놈들한테 매수당한 놈들이 수도 없을 거야.”
필웅은 불현듯 송 조사관을 떠올렸다.
‘설마 아니겠지.’
“그러니 나는 여기서 탈출해도 안전을 보장 받기 어려워. 그렇지만 누가 봐도 명백히 그 놈들과 사이가 안 좋은 듯한 검사 나리와 함께라면 얘기가 다르지. 그래서 시도를 해 봐도 좋겠다고 생각한 거야.”
필웅은 어느 정도 납득했다.
만약 김영지가 말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섣불리 경찰이나 검찰에 도움을 요청하더라도 오히려 정보가 새 나가 다시 붙잡힐 가능성이 있을 것이었다.
“좋습니다. 제가 뭘 하면 됩니까?”
“뭘 할 필요는 없어. 여기서 나가면 나를 안전하게 보호해 주기만 하면 돼.”
“알겠습니다.”
“좋아.”
김영지는 목을 가다듬더니 우렁차게 소리를 질렀다.
“이 놈들아! 밥 안 주느냐! 밥!”
그의 노쇠해 보이는 얼굴과 마른 체격에도 불구하고, 그의 목소리는 천둥처럼 컸다. 어찌나 목소리가 큰지 순간 그의 체격조차 평소보다 커 보일 지경이었다.
‘최고 원로 자리는 목청으로 얻는 건가…’
“밥 갖고 와!”
그 후로도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로 김영지가 여러 번 고함을 쳤다.
그러자 어두운 복도 저 편에서 누군가가 쟁반을 들고 나타났다.
“거 원로님, 조용히 좀 하십쇼. 때 되면 어련히 알아서 갖다 드릴걸 왜 이렇게 보채시는 겁니까?”
흰 옷을 입은 남자가 투덜대면서도 공손하게 쟁반을 받쳐 들고 김영지가 갇힌 방 쪽으로 다가왔다.
김영지는 어느새 침상에 누워 있었다.
“나이가 들어 제대로 운신도 못하는 나를 굶겨 죽일 셈이냐, 이 놈들아!”
“아, 알았으니까 소리 좀 그만 지르세요.”
남자가 쟁반을 창살 밑의 구멍으로 집어 넣으려고 하자 다시 한 번 김영지가 고함을 질렀다.
“허리를 다쳐서 움직이지도 못하는데 나보고 그걸 스스로 먹으라는 거냐! 이 접시물에 코 박고 죽을 개 같은 놈들! 하늘이 무섭지도 않느냐! 네 놈들은 8번째 지옥에 떨어져 영원히 불탈 것이다! 이 오라질 시정잡배 놈들아!”
그 후로도 한참이나 김영지는 온갖 패악스러운 욕설을 쏟아냈다. 듣고 있던 필웅까지 귀를 막고 싶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욕설들이었다. 얼빠진 표정으로 귀를 막고 있던 남자가 다 포기했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원로님, 규정상 참회의 방에 들어가면 안 되는 거 아시지 않습니까?”
“그럼 참회 중인 죄인을 굶겨 죽이라는 규정도 있더냐? 개소리 그만하고 당장 들어와! 애초에 나같이 허리 다쳐 누워 있는 다 늙어빠진 죄인이 뭐가 무섭다고 밖에서 달달 떨면서 염병을 하고 있는 게야!”
김영지가 불호령을 내리자, 남자는 잠시 우물쭈물대며 고민하더니 허리춤에 매달린 열쇠를 꺼내 들었다.
“휴, 이번 한 번 뿐입니다.”
남자가 창살 문을 열고 김영지의 감옥 안으로 들어갔다. 필웅은 어두운 쪽에 서서 몰래 그 장면을 지켜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남자는 쟁반을 들고 누워 있는 김영지의 머리 쪽으로 이동했다.
남자가 자리에 앉아 쟁반에 놓인 숟가락을 꺼내 든 순간이었다.
김영지는 번개같이 남자의 허리춤에서 열쇠를 잡아채 그대로 남자의 목을 찔렀다.
“크헉!?”
불의의 습격에 당황한 남자는 피가 분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목을 부여잡고 컥컥댔다. 김영지는 담담하게 그 모습을 지켜 보다가, 남자가 그로부터 열쇠를 빼앗으려고 하자 창살 틈으로 열쇠를 던졌다.
열쇠는 정확하게 필웅의 창살문 앞에 떨어졌다.
“컥…당신…!”
남자가 분노에 차 김영지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필웅은 재빨리 손을 뻗어 열쇠를 쥐려고 했지만, 손가락 반 마디 정도가 모자랐다.
‘제발… 제발 좀만 더!’
김영지의 컥컥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남자도 피칠갑을 한 상태였지만, 체구가 족히 김영지의 두 배는 되었기에 그런 남자가 무게를 실어 김영지를 깔아뭉개자 저항할 방도가 없는 모양이었다.
필웅은 거의 어깨가 빠질 정도까지 힘겹게 창살 밖으로 팔을 내밀었다.
‘제발…!’
그런 필웅의 손 끝에 열쇠가 닿았다.
필웅은 재빨리 열쇠를 낚아채 자신의 창살 문을 열고, 김영지의 감옥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김영지의 눈이 거의 뒤집혀지기 직전이었다.
미친듯이 필웅은 옆에 놓인 철제 쟁반을 들어 남자의 뒤통수를 내리쳤다.
“크억!”
남자는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넘어졌다. 김영지는 목을 감싸쥐며 괴롭게 신음소리를 흘리다가, 넘어져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남자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러고는 옆에서 젓가락을 집어 남자의 목덜미에 다시 한 번 찔러넣었다.
“푸흡!”
남자의 입에서 왈칵 피가 흘러나왔다. 비명조차도 지를 힘이 없는듯 남자는 그대로 무너졌다.
필웅은 피를 뒤집어써 악귀 같은 형상을 하고 있는 김영지의 모습을 보고 그때서야 아연실색해서 소리쳤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김영지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뭐가 말인가?”
“사람을 죽이다뇨…? 죽일 필요까진 없지 않습니까!”
김영지는 바닥에 침을 탁 뱉었다.
“무슨 개똥 같은 소린지 모르겠군. 이 놈들이 상황 설명 잘하면 아 그러시군요 하고 순순히 우리를 보내줄 놈들 같은가?
정신 똑바로 차려. 여기는 호랑이굴이야. 호랑이굴에 들어와 호랑이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거야.”
김영지는 남자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플라스틱 경찰봉을 집어 들었다.
“뭐 하는 겁니까?”
“나가면서 뭘 더 마주칠지 모르는데 당연히 무장을 해야지. 산책 나온 줄 아나?”
김영지는 한심하다는 듯 이죽거리면서 감옥 밖으로 나왔다.
“자, 이제 내 신변의 안전을 약속해 줘야겠어.”
“사람을 죽여 놓고 말입니까?”
“빌어먹을, 답답한 소리 좀 그만해. 이 놈을 죽이지 않으면 당신도 1년이고 10년이고 여기서 죽치고 앉아 있어야 할 수도 있었다고.
이 놈들이 하는 짓을 막으려면 극단적인 수단도 취할 수 있어야 해. 상대가 반칙을 끝없이 하고 있는데 혼자 선비처럼 규칙 다 지키다가 뒤통수 맞을 건가?”
필웅은 떫은 표정으로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
“좋습니다. 신변의 안전을 보장해 드리죠. 다만 저도 지금 조직에서 물을 먹고 있는 상황이라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군요. 그나저나 허리는 괜찮은 겁니까?”
“그걸로 충분해. 허리 다쳤다는 건 당연히 거짓말이지, 검사라는 양반이 참 잘도 속는군.”
김영지는 대답하고는 조심스럽게 복도 쪽으로 향했다.
“내 기억에 이 쪽에 비상출구로 향하는 문이 있어. 그 쪽으로 나가면 바로 밖으로 나가는 계단이 있을 거야.”
필웅이 우뚝 멈춰섰다. 김영지가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가다가 필웅을 문득 돌아보고는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뭐 하는 거야?”
“그냥 나갈 수는 없습니다.”
“뭔 소리야?”
“제 동료들이 여기 붙잡혀 있습니다.”
“지금 이게 할리우드 액션 영화인 줄 알아? 우리만 빠져나가기도 벅찬 상황인 거 보면 모르겠어?”
“제 동료들 둘 다 어느 정도 싸울 줄 아니 같이 탈출하면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저는 그들과 같이 나가지 않으면 여기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김영지는 혼자 뭐라고 욕지거리를 중얼거리더니,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저었다.
“휴~ 알았어. 네놈이 나가야 나도 안전하게 숨어 지낼 수 있을 테니까.”
김영지는 한 쪽을 가리켰다.
“여기서 한 층 더 올라가면 다른 감옥들이 있지. 아마 거기에 잡혀 있을 거야.”
“그럼 빨리 올라가죠.”
“멍청한 소리. 그곳에도 경비들이 따로 있을 거야. 최대한 조심스럽게 살펴 보고 올라가야 해.”
“하지만 이 층엔 경비가 별로 없었지 않습니까?”
“여긴 최하층이라 나와 너밖에 수감자가 없으니까. 이 위는 네 동료들을 비롯해서 교단에 반기를 든 수감자들이 바글바글 들어차 있을 거야. 당연히 감시인원도 더 많겠지.”
“그럼 어떡하죠?”
김영지는 필웅이 그 때까지 들고 있던 열쇠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 열쇠.”
필웅은 자신이 열쇠를 들고 있었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가 문득 손에 들고 있는 열쇠를 내려다 보았다.
“그 열쇠는 마스터키야. 애초에 감옥이나 교도소 같은 걸 전문적으로 운영하는 놈들도 아니고 머리도 나쁘다 보니 감옥별로 열쇠를 맞춘 게 아니라 마스터키를 맞춰서 경비들에게 나눠준 것 같더군. 이걸로 다른 층의 감옥들도 열 수 있어.”
“그래서요?”
“그래서요라니? 위층에 갇혀 있는 사람들을 전부 풀어줘야지. 그러면 대소동이 일어날 거고, 네 동료들도 쉽게 구할 수 있을 거야.”
“그게 가능할까요?”
“쉽진 않겠지. 하지만 네놈이 고집을 부렸으니 방법은 네놈이 생각해 봐.”
김영지는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경찰봉을 만지작거렸다.
필웅은 다시 입술을 물어뜯으며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한다?’
일단 경비들의 눈을 피해 감옥 문을 전부 열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아마도 다른 층에는 경비들이 더 많을 것이고, 문을 몇 개 열기도 전에 발각당할 가능성이 높았다.
필웅은 한 가지 생각을 떠올리고는 물었다.
“혹시 올라가는 길이 저기밖에 없습니까?”
“반대편에 하나 더 있지.”
필웅이 결심을 내리고는 나지막히 말했다.
“제가 미끼가 되겠습니다.”
경찰봉만 만지작거리고 있던 김영지가 필웅의 말에 흥미롭다는 듯 그를 돌아보았다.
“네가?”
“예.”
“잘 할 수 있겠어?”
“해 봐야죠.”
“좋아.”
김영지가 혀를 내밀어 입맛을 다셨다.
“확실하게 시선만 끌어 준다면 가능할지도 모르겠군. 아마 내가 아는 녀석들도 몇 명 있을테니, 그런 녀석들을 먼저 풀어준다면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릴 수도 있겠어.”
“그럼 전 반대편으로 올라가겠습니다.”
“그래.”
김영지는 무심하게 대답하고는 다시 계단참의 동향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계단 근처에는 경비가 다가오진 않은 모양이었다.
필웅은 복도의 반대편으로 돌아갔다. 조금 걷다 보니 김영지가 말한 낡은 계단이 하나 보였다. 필웅은 조심스럽게 위를 올려다 보고, 경비가 없는 것을 확인하면서 위로 올라갔다.
위층에도 아래층과 같이 감옥들이 즐비했다. 필웅은 일개 종교단체가 갖고 있는 시설에 이렇게 많은 감옥이 있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필웅은 으스스한 기분을 느끼며 발을 뗐다.
필웅은 ㄱ자형으로 꺾이는 복도의 끝으로 이동했다. 필웅이 슬쩍 고개를 내밀어 보니, 복도는 ㄱ자로 꺾인 후 긴 직선 형태로 이어져 있었다. 길다란 복도에는 경비들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감옥들은 조용했다.
필웅은 주위를 살펴 보았다. 쓰레기통이 하나 보였다.
필웅은 굳게 마음을 먹고는 쓰레기통을 들어 복도의 꺾어지는 쪽으로 다가갔다. 그 후, 심호흡을 한 필웅은 쓰레기통을 있는 힘껏 집어던졌다.
-와당탕!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철제 쓰레기통이 안에 든 것들을 잔뜩 토해냈다. 돌아다니던 경비들이 멈춰 서서 그 쪽을 바라보고 일제히 달려갔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선 그들과 필웅의 눈이 마주쳤다.
“어…?”
“저 놈 누구야?”
“잡아! 이쪽이다!”
필웅은 재빨리 아까 올라오면서 봐 둔 올라가는 계단으로 향했다. 소리를 듣고 더 위 층에 있던 경비들도 이 쪽으로 달려오는 듯했다.
경비 하나가 계단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필웅은 뛰어 올라가면서 그대로 속도를 실어 온 몸으로 경비의 가슴팍을 잡고 밀었다.
“으악!”
경비가 그대로 계단참을 굴러떨어졌다. 필웅은 뒤에 경비들이 제대로 쫓아오고 있나 확인한 후 계단을 올라갔다.
“저 새끼 잡아!”
경비들이 외치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필웅은 한 층을 올라가 그대로 복도를 내달렸다. 여기저기서 화가 난 경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필웅은 뒤를 돌아보며 달리다가 누군가와 부딪혀 넘어졌다. 필웅이 간신히 일어서니, 그와 부딪힌 경비가 놀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 보았다.
“잡았다!”
뒤에서 그를 쫓던 경비가 필웅의 어깨를 거칠게 잡아 일으켜 세웠다. 필웅은 강하게 팔을 내저으며 저항했지만, 이내 달려온 다른 두 명의 경비가 그를 잡아 누르기 시작했다.
‘젠장! 김영지는 뭘 하고 있는 거야!’
필웅은 최대한 시간을 끌기 위해 막무가내로 발버둥을 치다가, 문득 김영지가 자신을 여기에 버려 두고 도망갔을 수도 있다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필웅은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그러면서 김영지가 약속을 지켰기를, 그리고 제 때에 감옥문을 열었기를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