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한 가지 시도해 볼 만한 방법이 있지
“기억하시죠? 저 황대산 전도삽니다. 아, 저희 내부적으로는 황대산 원로라고 불리고 있지만요.”
필웅과 장경은 긴장하여 뒤로 몇 발짝 물러섰다.
하지만 안쪽에서도 이미 건장한 사내들이 하나둘씩 나타났다.
앞뒤로 포위당한 형국이었다.
필웅은 이를 갈며 물었다.
“이게 무슨 짓이지? 당신, 우리가 누군지 몰라?”
필웅은 마지막으로 권위에 매달려 보기로 했다.
물론 시연을 납치한 시점에서 이미 이 자들이 검찰이나 경찰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점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만에 하나 시연의 신분을 알지 못하고 납치했을 수도 있으니, 혹시 지금이라도 자신이 검사라는 것을 일깨워주면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물론 알죠. 조필웅 검사님과 박장경 형사님 아닙니까?”
황대산 원로가 능글맞게 킬킬대며 웃었다.
필웅은 속으로 낙담했다. 이미 자신들의 신분을 알고도 이렇게 위협을 가하는 자들이라면, 검사라고 해서 자신들을 봐줄 리 만무했다.
“당신들 지금 대한민국 검사를 협박하겠다는 건가? 이게 다 무슨 짓이지?”
필웅은 그래도 지지 않고 외쳤다. 겁을 먹었다는 인상을 줘서는 안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런 저희가 뭘 했다고 그러십니까? 아직은 아무 것도 안 했습니다만.”
황 원로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뒤의 사내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사내들이 하나둘씩 굳은 얼굴로 필웅과 장경에게 다가왔다.
“물론 지금부터는 뭘 좀 해야겠지만 말입니다.”
장경이 재빨리 총을 꺼내들어 공포탄을 쏘았다.
-탕!
사내들이 처음으로 경계하는 표정을 지으며 조금씩 물러섰다.
“이제부터는 진짜 실탄이야! 당장 비켜! 그리고 정 검사님을 이리로 모셔와!”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사내들은 처음에는 움찔했으나, 이내 서로를 마주보더니 슬금슬금 필웅과 장경에게 걸어오는 것이었다.
장경은 오히려 그런 그들의 태도에 당황해 버렸다.
“뭐야? 이 새끼들, 내가 못 쏠 것 같아?”
사내들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침묵한 채 바위처럼 서서히 그들에게 다가올 뿐이었다.
장경은 이를 악물고 가장 앞에 선 남자의 다리를 겨냥했다.
-탕!
“크윽!”
남자가 다리를 부여잡고 쓰러졌다. 사내들이 다시 한 번 멈춰섰다.
장경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 때 뿐이었다.
사내들의 표정이 더욱 결연해지더니, 이제는 아예 쓰러진 자신의 동료를 내버려 두고 필웅과 장경에게 달려오기 시작했다.
“어엇?”
필웅과 장경이 미처 피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한 육중한 남자가 장경의 허리를 잡고 그대로 쓰러졌다. 필웅도 뒤에서 다가온 누군가에게 어깨를 잡혔다.
“이 새끼들, 이거 안 놔?!”
쓰러져서 남자의 밑에 깔린 장경이 소리를 질렀지만 남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필웅과 장경은 거칠게 반항했지만, 건장한 십여 명의 남자들을 이겨낼 도리가 없었다.
장경은 쓰러진 와중에서도 남자들이 방금 보인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마치 로봇 같은 움직임이었어.’
동료가 쓰러졌음에도 잠시 멈춰섰을 뿐 다른 남자들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총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마저도 잊은 듯했다.
황 원로가 킬킬대며 붙잡힌 필웅과 장경에게 다가왔다.
“거, 처음부터 협조적으로 해 주셨으면 이렇게 험하게까지는 안 했을텐데 말입니다.”
누군가가 젖은 수건 같은 것으로 필웅의 코와 입을 막았다. 마취제를 적신 수건인 듯했다.
필웅은 고함을 지르다가, 이내 죽은 듯이 눈을 감았다.
장경 역시 정신을 잃었다.
황 원로는 만족스럽게 그들을 내려다 보다가, 턱짓으로 필웅과 장경을 옮기라고 지시했다.
남자들은 아무 대답 없이 필웅과 장경을 들쳐메고 어딘가로 내려가는 계단으로 향했다.
* * *
“콜록, 콜록!”
필웅은 거칠게 기침을 하며 깨어났다.
필웅은 잘 떠지지 않는 눈을 필사적으로 열었다.
필웅은 시멘트로 된 바닥에 누워 있었다. 무척 좁은 방, 아니 감옥이었다. 필웅은 비로소 벽의 한 면이 쇠창살로 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필웅은 무거운 머리를 부여잡고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뭔가 띵한 느낌이었다. 코 언저리에 아직도 포름 알데히드 마취제의 독한 냄새가 남아 있었다. 필웅은 소매로 거칠게 코 주위를 슥 훔쳤다.
감옥에는 그밖에 없었다. 장경은 다른 곳에 가둬진 모양이었다. 필웅은 아마도 시연도 이 감옥 어딘가에 갇혀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물론, 시연이가 아직 살아있다면 말이지만…’
필웅으로서는 그들이 자신을 죽이지 않고 감옥에만 넣어둔 것을 다행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이 왜 시연을 납치했는지, 왜 필웅과 장경을 죽이지 않고 그대로 감옥에만 넣어두었는지를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러니 자신과 달리 시연이 무사하지 않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려웠다.
‘만약 시연이가 무언가 정보를 가지고 있고, 그 정보를 빼내거나 누설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협박 중인 거라면?’
필웅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이 자신에게 무언가 바랄 것이 있는지 알기 어려웠다. 그러나 시연이 무엇을 알고 있는지 필웅은 알지 못했다. 시연이 그들이 원하는 어떤 정보를 갖고 있었을 수도 있었다.
필웅은 초조함을 참지 못하고 감옥을 이리저리 살펴 보았다.
투박하게 지어져 있지만, 그렇다고 뜯어내고 도망갈 수 있을만한 구조도 아니었다.
“박 형사님!”
필웅은 혹시나 해서 몇 번 장경을 불러 보았다. 하지만 장경이 갇힌 곳은 적어도 이 근처는 아닌 모양이었다.
필웅은 바닥에 털썩 주저 앉았다.
“한밤중에 더럽게 시끄럽구만.”
필웅은 깜짝 놀라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섰다.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목소리는 분명히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누, 누구십니까?”
목소리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누구시냐구요! 대답하세요!”
“잠 좀 자게 조용히 좀 해.”
귀찮아하는 듯한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들려왔다. 필웅이 창살 쪽으로 가까이 다가가 빠르게 주위를 살폈다.
그러자 맞은 편의 창살 안쪽에 앉아 있는 형체가 눈에 들어왔다.
“당신, 왜 여기에 갇혀 있는 거죠? 누굽니까?”
“너야말로 누구야?”
어둠 속에서 한 남자가 나타나며 짜증스럽게 물었다. 50살 정도로 보이는 늙수그레한 남자지만, 체격은 다부져 보였다.
“저는 서울남부지검…아니, 영산지청에서 일하는 조필웅 검사라고 합니다.”
“검사? 검사가 이런 데를 왜? 아.”
남자가 의아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다가 갑자기 뭔가를 깨달은 듯 고개를 들었다.
“당신도 제8요일 교단을 조사하고 있나?”
“뭐라구요? 아닙니다.”
“그럼 왜 여길 잡혀 들어와 있는 건가?”
남자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제 친구가 여기 잡혀 있습니다. 혹시 본 적 없습니까? 30대 정도 여잔데 키는 이 정도에 눈가에 눈물점이 있고…”
“여자는 본 적 없어.”
남자가 딱 잘라 말했다. 필웅은 실망감에 창살을 잡고 그대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남자는 말없이 그런 필웅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친구 걱정할 때가 아닐텐데.”
필웅도 창살 너머의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고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제 소개를 했으니 당신 얘기도 해보죠. 당신은 왜 여기 갇혀 있습니까?”
남자는 바로 대답을 하지는 않았다. 바로 대답을 해도 될지 고민 중인 모양이었다.
침묵을 지키던 남자는, 한 번 고개를 흔들고는 나지막히 말했다.
“해서는 안 되는 얘기들을 했지.”
“해서는 안 되는 얘기?”
“그래. 사람들은 자기가 감추고 싶은 이야기를 떠들어 대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아.”
“누가 감추고 싶은 얘기인 겁니까? 이 교회와도 관련이 있는 겁니까?”
“교회? 하.”
남자가 피식 웃었다.
“이걸 교회라고 한다면 이 감옥도 호텔이지.”
“이 교회에 관한 게 맞나 보군요. 다시 한 번 묻죠. 당신은 누굽니까?”
남자의 눈이 어둠 속에서 형형하게 빛났다.
“내 이름은… 김영지. 한 때 이 교회의 최고 원로였던 사람이다.”
“최고 원로?”
필웅은 기도원에서 황대산이라는 자가 스스로를 원로라고 칭했던 것을 기억해 냈다.
“일반 교회의 장로 같은 겁니까?”
“비슷하지. 하지만 원로의 힘은 일반 교회의 장로와는 달라. 일반 교회의 장로라고 해서 신도들에게 이래라 저래라를 할 수는 없지만 제8요일 교단에서 원로란 사실상의 법이지.”
“그리고 최고 원로라면, 그 원로들의 우두머리에 해당하는 직위겠군요?”
“그래.”
“그런 사람이 왜 이런 감옥? 같은 데 갇혀 있는 겁니까? 여기에 온지 얼마나 됐죠?”
“글쎄. 몇 개월 정도 된 것 같군.”
필웅은 입술을 씹었다. 아무래도 여기 들어온 사람들을 쉽게 빨리 내보내지 않는 모양이었다. 재수 없으면 그나 시연, 장경도 여기서 몇 개월동안 썩을 수도 있었다. 누군가가 실종되어 난리가 나더라도 이를 감출 수 있는 힘을 가진 집단인 것 같았다.
김영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최고 원로가 됐을 때만 해도 이 지경까지는 아니었지. 외부인들이 보기에 수상한 교리를 가진 수상한 집단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래도 교주를 믿었어. 처음에는 정말로 사람들을 현실 세상의 어려움으로부터 구원해 주는 게 목적이라고 했으니까.”
필웅은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변질되기 시작하더군. 내부적으로 교주에게 반대하는 인물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고, 수상한 집단과 수상한 밀매를 하기 시작했어.”
“수상한 거래라면…?”
“혹시 근처의 일요교회를 가 본 적 있나?”
“예.”
“일요교회에서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도 아나?”
필웅은 일요교회에 잠입했을 때 봤던 쓰레기봉투, 그리고 그 안에 가득 담겨져 있던 주사기들을 떠올렸다.
“무슨 약품 같은 걸 조제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김영지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잘 봤군.”
김영지는 잠시 말을 멈췄다.
잠시 후, 침묵을 깨며 그가 입을 열었다.
“일요교회는 불법 마약 제조에 손을 대고 있네.”
“마약이라구요?!”
필웅의 목소리가 자기도 모르게 커졌다.
“처음엔 작은 밀매에서 시작된 일이었어. 낮은 농도의 마약을 밀수해서, 예배 전에 가공을 거쳐 마약으로 향을 피우는 거지. 그러면 사람들은 쉽게 흥분 상태에 빠지게 되고, 그런 경험을 종교적 체험이라고 착각하게 되는 거야.”
“그런!”
“처음엔, 그래. 그냥 단순한 사기였지. 하지만 점차 거래량이 커지다보니 누군가가 욕심을 내기 시작했어.
이 정도 규모의 마약을 들키지 않고 밀수할 수 있다면, 차라리 제조법을 알아내서 직접 생산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야.”
“그런 미친 짓을 교단 내부에서 허락했단 말입니까?”
“나를 비롯한 기존 원로들은 반대했지만, 새로 원로로 즉위한 자들은 그렇지 않았어. 그들은 이미 종교 그 자체에는 관심이 없었지. 그들에게는 교단도 돈벌이를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던 거야.”
필웅은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유괴사건으로 시작된 일이 점점 규모가 커지고 있었다.
‘신흥 종교집단이 사실은 마약 판매상이라니…!’
“그 때 강력하게 반대했던 원로들은 하나씩 축출당했지. 새로운 마약 사업 때문에 교회는 점점 더 커져갔어. 전국 각지의 주요도시에 대형 교회가 세워지기도 했고.”
“영산의 교회도 그 때 세워진 겁니까?”
“영산의 일요교회는 일종의 본점 같은 거야.”
김영지가 뭐가 우스운지 킬킬대다가 말을 이었다.
“말하자면 여기는 제8요일 교단의 예루살렘 같은 곳이지.”
필웅은 착잡한 마음으로 그의 말을 듣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기서 몇 개월 동안 있으면서 탈출할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까?”
“탈출이라…”
김영지가 자리에서 일어나 창살로 가까이 다가왔다. 필웅은 비로소 그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얼굴은 꾀죄죄하고 수염으로 덮여 있었지만, 눈빛만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한 가지, 시도해 볼 만한 방법이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