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생각보다 시간이 없어
장경과 필웅은 이내 일요교회가 보이는 공터 근처에 도착해 차를 댔다.
“너무 가까이 가면 들킬 수도 있으니 여기서 내려서 걸어가시죠.”
장경의 제안에 필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평일에 인적이 드문 곳이니 갑자기 차가 나타나면 납치범들의 이목을 끌 우려가 있었다.
‘그 놈들이 여기 있다면 말이지만.’
필웅과 장경은 허리 높이까지 자란 풀들을 헤치고 일요교회 쪽으로 접근했다.
필웅이 처음 교회를 왔을 때는 미처 인식하지 못했지만, 일요교회의 부지는 생각보다 컸다. 교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용도를 알 수 없는 건물들도 여러 개 있었다. 게다가 어떤 건물에는 철조망까지 쳐져 있었다.
게다가 이미 어둠이 서서히 깔리기 시작해서, 군데군데 자리잡은 조명에 비춰지는 모습은 더욱 음산해 보였다.
“이거 교회 맞슴까?”
장경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필웅도 교회를 와보지 않았다면 동일한 의문을 품었을 것이었다.
필웅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전에 왔을 때는 못 느꼈는데, 확실히 교회 치고는 알 수 없는 건물들이 많네요.”
필웅과 장경은 덤불 속에서 나와 조심스럽게 한 건물의 뒷편으로 이동했다. 거대한 박스며 짐들이 건물 뒷편에 가득 쌓여 있어서, 누군가의 눈에 띄지 않게 숨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일개 교회에 무슨 짐이 이렇게 많은 겁니까? 인형 눈 붙이는 부업이라도 하는 건가…”
장경이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필웅도 아까부터 뭔가 위화감이 들었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화기애애하게 북적대는 주말의 일요교회에는 딱히 이상한 느낌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 보이는 일요교회는 교회라기보다는 오히려 수상한 공장에 가까워 보였다.
장경은 이리저리 주위를 둘러 보다가, 필웅의 어깨를 툭툭 치고 한 쪽을 가리켰다.
“저기, 저거. 혹시 저게 그 놈들 차 아닙니까?”
창고 같은 건물 옆에 트럭 한 대가 서 있었다. 푸른 색의 포터. 차량번호도 일치했다.
“맞습니다, 저겁니다!”
필웅이 자기도 모르게 뛰쳐 나가려고 하자, 장경이 그를 황급히 만류했다.
“아따, 검사님. 지금 튀어 나갔다가 들키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 이럽니까. 대낮에 사람을 납치할 정도로 간땡이가 부은 놈들인디.”
“그렇군요.”
필웅은 다시 건물의 그늘 뒤로 돌아가 웅크려 앉았다.
“그럼 어떡하죠?”
“일단 저 놈들이 몇 명이나 되는지 알아야 할 것 같은데…”
그 때 어디선가 말소리가 들려왔다. 두세 명 정도가 떠드는 소리였다.
“그 여자는 어떻게 됐어?”
“뭘 어떻게 돼, 잡아다가 창고에 넣어놨지.”
필웅의 눈이 크게 떠졌다. 장경도 숨을 죽이고 벽의 그늘에 착 붙어 귀를 기울였다.
“근데 진짜 이래도 되는 건가?”
“뭐가?”
“뭐긴, 사람을 납치했잖아.”
그러자 다른 남자들의 재밌다는 듯 킬킬대는 소리가 들렸다.
“아, 너 여기서 일한지 얼마 안 됐다고 했지?”
“한 1개월 됐지.”
“그래서 이렇게 덜덜 떠는구만. 야 임마, 이런 일은 깔끔한 편이야. 납치했다는 건 어쨌든 당장 죽일 필요는 없다는 거잖아? 진짜 사람 죽일 때가 좀 힘들지.”
말하는 남자의 목소리에는 왠지 으스대는 듯한 느낌이 묻어 있었다. 다른 남자가 깜짝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사람 죽여 봤어?”
“죽여 봤지. 여기서 일하면 심심찮게 있는 일이야.”
“저 여자도 죽여야 되나?”
“아직 죽이라는 지시는 없었으니까. 원로님이 오셔서 판단하시겠지.”
필웅이 가만히 대화를 들어 보니, 아무래도 그들은 말단 부하인 것 같았다. 그들은 누군가로부터 단순히 시연을 납치하라는 지시를 받았고, 시연이 왜 납치되었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떤 계획이 있는지는 알지 못하는 상태인 듯했다.
“하아~ 그나저나 심심하네.”
“심심하면 순찰이나 돌아.”
“알았어. 이따 보자고.”
대화를 마치고 한 남자가 필웅과 장경이 숨어 있는 쪽으로 걸어 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일을 별로 겪어 보지 못한 필웅은 순간 경직되었다. 그러나 장경은 이미 숨을 곳을 찾아두고 다급하게 필웅을 손짓해 불렀다.
“검사님, 이 쪽!”
필웅이 소리가 난 쪽으로 다가가 보니, 장경이 이상한 봉지 같은 것이 잔뜩 들어 있는 쓰레기함에 들어가 있었다.
“어서 이리로 들어오세요, 빨리!”
남자가 다가오는 발걸음이 점점 가깝게 들렸다. 필웅은 길게 생각할 틈도 없이 일단 쓰레기함 안으로 몸을 던졌다. 장경은 재빨리 그러나 조용하게 쓰레기함 위의 뚜껑을 닫았다.
밖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순찰을 도는 남자가 쓰레기함의 바로 앞에 서 있다는 것을 필웅은 느낄 수 있었다. 왠지 모르게 남자는 쓰레기함 앞에서 계속해서 얼쩡거리고 있었다.
“무슨 소리가 난 것 같았는데…”
남자는 그 후로도 한참 동안 옆의 짐 같은 것을 뒤졌다.
그리고 그가 쓰레기함의 뚜껑을 열어 보려던 순간…
“어이! 뭐해?”
누군가가 남자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까 남자와 대화를 나누던 다른 남자인 듯했다.
“어? 여기 순찰 좀…”
“순찰은 됐고, 빨리 와! 원로님이 곧 오신대!”
“아 그래?”
남자는 헐레벌떡 뛰어갔다. 이윽고 인기척이 완전히 사라지자, 장경은 조심스레 뚜껑을 열었다.
“간 것 같죠?”
“아마 누군가 중요한 인물이 온 모양입니다.”
장경은 쓰레기함에서 나와 옷을 털다가 쓰레기함 안의 내용물을 기웃거렸다.
“뭐 보십니까?”
“아뇨. 쓰레기들이 뭔가 다 깨끗해서요. 보통 쓰레기 하면 느껴지는 물컹물컹한 감촉도 별로 없고.”
“으엑…”
필웅이 비위가 상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장경은 아랑곳하지 않고 쓰레기들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보통 쓰레기는 아무 생각 없이들 버리기 때문에 오히려 결정적인 단서가 될 만한 것들이 섞여 나오기도 한단 말임다.”
장경이 좀 커 보이는 검은색 비닐 봉지를 뜯어 열었다.
“이건…?”
장경의 몸이 긴장으로 굳었다. 필웅은 뭔가 하고 다가와 안의 내용물을 확인했다.
“주사기…?”
수십 개, 아니 수백 개는 될 법한 빈 주사기들이 잔뜩 안에 들어 있었다.
“교회에서 주사기 같은 걸 이렇게 많이 쓸 이유가 있습니까…?”
“없겠죠…?”
필웅과 장경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그 옆의 봉투를 뜯었다. 그 옆의 봉투도, 그 옆의 봉투에도 모두 주사기와 알 수 없는 의료도구들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이게 대체 다…?”
필웅은 점점 이 교회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교회같지 않은 건물들, 거기다가 주사기까지. 애초에 교회가 맞는지조차 의심스러웠다.
건물 너머가 시끌시끌해졌다.
그들이 말한 ‘원로’가 도착한 모양이었다. 여러 대의 차량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인적이 없던 교회가 왁자지껄해졌다.
“이런 빌어먹을…”
장경은 험악하게 중얼거렸다. 이미 사람이 이렇게 많이 모인 이상, 그들의 시선을 피해서 건물들을 뒤지고 다니며 시연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그들 앞에 나서서 공손하게 혹시 여자분을 한 명 납치하시지는 않으셨냐고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었다.
“어떡하죠?”
필웅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장경은 잠깐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일단…돌아가야 할 것 같슴다.”
“뭐라구요?!”
“쉿, 목소리 낮추십쇼. 검사님도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지금 밖에 그 놈들 패거리가 수십 명씩 득시글거리고 있어요. 검사님 싸움 잘 하십니까?”
“시연이보다는 못할걸요…”
“그렇죠. 사실 설령 싸움을 잘한다고 해도 저 놈들 머릿수에다가 무슨 무기를 들고 있는지 모른다는 점을 생각하면 정면대결은 좋은 생각이 아님다.”
“그럼 어쩌자구요? 저 놈들이 시연이를 해치기라도 하면…!”
“그럴 것 같지는 않슴다. 아까 그 놈들 이야기 들으셨지 않습니까? 정 검사님을 해치려고 했으면 사실 일단 시내에서 납치해서 바로 죽이면 그만이었을 검다. 아니면 번거롭게 납치하는 대신 좀 더 인적 드문 곳에서 습격했을 수도 있고.
그런 걸 굳이 어딘가에 잘 모셔두고 있다는 건, 적어도 당장은 정 검사님을 해칠 마음이 없다는 거겠죠.”
“그 놈들을 어떻게 믿습니까?”
장경도 불만스럽게 말했다.
“저도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는 않지요. 하지만 대안이 없지 않습니까? 저 놈들이랑 정면대결을 할 수도 없고, 들킬 때까지 건물을 하나하나 뒤지고 다닐 수도 없고.
일단 돌아가서 정보를 좀 더 모아서 돌아와야죠. 필요하면 지원도 불러서.”
“정보라면?”
“뭐 건물 구조라거나 용도 그런 걸 미리 물어볼 만한 사람 없습니까?”
장경의 물음에 필웅은 불현듯 송 조사관을 떠올렸다.
하지만 필웅은 동시에 송 조사관에게 그런 것을 물어봐도 되는지 조금 주저되었다. 애초에 일요교회를 소개해 준 것도 송 조사관이었다. 그도 한 패가 아니라는 보장이 없었다.
“떠오르는 사람이 있기는 한데, 확신이 들진 않는군요. 일단 얘기하신 대로 여기서 빠져 나가는 게 좋겠습니다.”
“아까 들어왔던 길로 나가죠. 다행히 저 놈들의 관심이 누군지 모를 방문객한테 집중된 듯하니.”
장경이 손짓을 하며 다시 풀숲으로 몸을 숨겼다. 필웅은 몇 번이고 힐끔힐끔 뒤를 돌아보며 조용히 장경의 뒤를 따랐다.
‘미안해, 시연아. 금방 다시 돌아올게!’
무거운 발걸음을 떼며 몇 번이고 필웅은 속으로 외쳤다.
* * *
필웅은 집으로 돌아와 장경에게 송 조사관에 대해 이야기했다.
장경은 생각에 빠져 있다가 물었다.
“그러니까 그 송 조사관이라는 사람이 애초에 일요교회를 소개시켜 준 사람이라는 거죠?”
“예. 그래서 그 사람에게 이런 일을 물어봐도 될지 잘 모르겠습니다.”
장경도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냥 물어보기에는 뭔가 찝찝하긴 합니다. 근데 그 교회가 사실은 교회를 가장한 수상한 집단이라고 하더라도, 그 수많은 일반인들이 다 공범은 아닐 거란 말임다.”
“그럴 수도 있죠.”
“그리고 사실 송도영인가? 그 사람 말고는 당장 다른 정보원이 있는 것도 아니구요.”
필웅은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한 시가 급한 반면 그들이 이용할 수 있는 정보원은 사실상 송도영밖에 없었다.
필웅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어떻게 보면 당장 손해볼 게 없을 것 같기는 합니다. 그 놈들도 시연이를 납치했으니 우리가 그 사실을 모를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거고, 오히려 우리가 접촉해 오기를 기대하고 있을 수도 있겠죠.”
“그러고보니 그 놈들한테 따로 연락은 없었습니까? 납치를 했으면 보통 그 이유가 있을텐데 대가를 요구하지도 않는다는 게 이상하긴 하군요.”
필웅은 장경의 지적에 비로소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시연이 납치당했다는 사실에 너무 흥분해서 지금까지 깨닫지 못하고 있던 사실이었다. 보통 누군가를 죽이는 대신 유괴했다면, 그에 대한 대가를 요구해 오는 게 정상이었다.
‘물론 시연의 부모님이 계시긴 하지만, 가진 것도 없는 분들이고 시연이와 자주 연락을 하는 사이도 아니니 가족에게 금품 따위를 요구할 목적은 아닐 거야.’
무엇보다 시연의 부모님은 필웅과도 아는 사이여서 만약 무언가 요구가 있었다면 필웅에게도 이야기하고 상의했을 터였다. 하지만 필웅은 이미 시연이 사라진지 한참 됐는데도 시연의 부모님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것이 없었다.
“만약 다른 사람에게 대가를 요구하는 게 아니라면요?”
“?”
“만약 다른 사람에게 대가를 요구하기 위해 납치한 게 아니라, 시연이 본인에게 요구사항이 있어서 납치한 것이라면요?”
장경은 무슨 소린가 하고 필웅을 돌아보다가 아 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아! 그렇지만 그럴 거면 굳이 납치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처음엔 그냥 대화를 시도하려고 했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시연이가 완강히 거부하자, 일단 그곳에서는 대화를 이어가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납치한 것 아닐까요? 물론 이삿짐센터 직원처럼 분장한 거나 박스를 미리 준비해 왔다는 점에서 처음부터 납치도 염두에 둔 것 같긴 합니다만…”
“가능성이 있군요.”
장경이 수긍했다. 필웅은 순간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만일 다른 사람에게 대가를 요구한다면 그 대가를 받을 때까지는 인질인 시연이를 해치지 않았겠지. 하지만 시연이 본인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고, 시연이가 계속해서 거부한다면?’
필웅의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생각보다 시간이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