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데
그 주 일요일.
송 조사관은 자신의 차를 끌고 필웅을 데리러 왔다.
교회는 생각보다 시내에서 조금 떨어져 있었다. 송 조사관과 필웅은 차를 약 20분 정도 탄 후 비로소 교회에 도착했다.
교회는 숲의 초입에 지어져 있었다. 근처에 다른 인가나 상가 등이 없어 고요하고 깨끗한 느낌이었다. 필웅은 오랜만에 한껏 맑은 공기를 들이켰다.
“공기가 좋지요?”
송 조사관이 싱긋 웃으며 필웅을 교회로 이끌었다.
“아, 이 분이 말씀하신…”
“예, 저희 검사님입니다.”
“조필웅입니다.”
“검사님, 반갑습니다. 황대산 전도사에요.”
4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인상 좋아 보이는 남자가 다가와 필웅의 손을 잡고 악수했다. 필웅은 겉보기와는 다르게 강한 악력에 조금 당황했지만, 이내 미소를 되찾고 마주 인사했다.
황대산 전도사도 유달리 누런 이를 드러내 보이며 웃었다. 분명 밝은 미소였음에도 필웅은 왠지 모르게 거부감을 느꼈다.
“자, 안으로 들어갈까요? 도영 씨, 검사님 안내 좀 부탁할게요.”
“예, 걱정 마십시오.”
안으로 들어가니 예배당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예배당이 작지는 않았음에도 사람들이 꽉 차 있었다. 도영은 누군가에게 반갑게 인사하고는 필웅을 그쪽으로 이끌었다. 일전에도 몇 번 만난 적 있던 도영의 친구들이었다.
“어이구, 검사님! 오셨습니까!”
“예, 송 조사관님이 한 번 소개시켜 주고 싶다고 해서…”
“잘 오셨습니다. 이 쪽에 앉으세요.”
교회의 청년들이 모여 앉는 구역인 듯했다. 이미 면식이 있던 도영의 친구들 외에도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앉아 있었다.
이런 곳에는 어울리지 않는 세련된 느낌의 미인도 보였다. 그녀는 눈을 들다가 필웅과 눈을 마주치자, 살폿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필웅도 약간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여 인사했다.
예배는 생각보다 평이했다. 종말은 언제든 다가올 수 있으니 매일의 삶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설교가 끝나고, 사람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섰다.
“검사님, 식사 하고 가시죠.”
“예? 아, 저는 오늘 약속이 있어서.”
“잠깐만 있다 가셔도 되는데…”
송 조사관이 아쉽다는 듯이 다시 한 번 필웅에게 권유했다.
“죄송합니다. 오늘 올 손님이 있어서요.”
“그렇습니까? 그럼 어쩔 수 없네요. 제가 시내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안 그러셔도 되는데…”
“어휴, 여기서 버스 타려면 또 한참 나가야 되요. 괜찮으니 같이 가시죠.”
도영은 그렇게 올 때와 똑같이 필웅을 태우고 다시 시내로 차를 몰았다.
“검사님, 다음 주에도 오실 거죠?”
필웅은 오늘 교회에서의 모임을 떠올렸다. 평생 교회를 가 본 적이 없는 그라서 뭔가 낯설고 지루하기도 했지만, 사람들은 괜찮아 보인다고 생각했다.
“예…그럴 것 같네요.”
“잘 됐네요! 다음 주엔 교회에서 식사하고 가시죠. 저희 교회에서 식사도 드리는데 맛도 좋습니다.”
“그러죠. 참.”
필웅이 문득 떠올랐다는 듯 입을 열었다.
“혹시 ‘재단’이라고 아십니까?”
조사관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재단이요?”
“예, 영산에 혹시 좀 규모가 큰 재단 같은 게 있습니까?”
송 조사관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대답했다.
“글쎄요? 허허, 저야 뭐 무슨 복지단체나 교육단체 같은 건 잘 몰라서. 자원봉사라도 하시게요?”
“아뇨, 아닙니다.”
필웅은 정중히 웃어 보이고는 입을 다물었다.
필웅은 과연 송 조사관이 정말 재단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모른 척 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만일 후자라면, 연기대상이라도 줘야겠군.’
어느덧 필웅이 사는 동네에 도착하자, 도영은 손을 뻗어 친절하게 필웅 쪽의 차문을 열어주며 인사했다.
“검사님,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예, 오늘 감사했습니다.”
도영이 차를 몰고 아파트단지를 나가자, 필웅은 몸을 돌려 집으로 향했다. 오늘 올 손님이 벌써부터 기다려졌다.
필웅이 집에 도착하고 30분 정도 지나자,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필웅은 어차피 찾아올 사람이 하나밖에 없다는 걸 알았기에 반갑게 달려가 문을 열었다. 시연이었다.
“필웅아!”
시연은 그를 보자마자 와락 끌어안았다. 필웅은 조금 당황했지만, 이내 어색하게 팔을 그녀의 어깨 뒤로 둘러 몇 번 토닥였다.
잠시 후, 부끄러웠는지 시연은 조심스럽게 필웅을 밀어냈다.
“힘들었지?”
“아니, 뭐. 그냥. 괜찮았어.”
“어디 갔다왔어?”
필웅은 아직 외출복을 갈아입지 않은 상태였다.
“아, 교회를 좀.”
“교회? 너 교회 안다니잖아?”
“같이 일하는 조사관님이 한 번 같이 가보자고 하더라고.”
시연은 안쓰럽다는 눈빛으로 필웅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많이 힘들었구나…?”
“뭐? 아니야.”
“생전 교회도 안 가던 애가 그런 델 다 찾아가고…”
시연은 필웅이 심적으로 너무 힘들어서 교회를 찾아간 것으로 안 모양이었다. 필웅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런 거. 물론 뭐 친구나 사귈까 하고 간 것도 있지만, 조사관님이 워낙 잘해 주셔서 부탁 거절하기가 어렵더라고.”
필웅은 삼영과 재단의 이야기를 꺼낼까 하다가, 아직 교회에서 관련자들을 찾지는 못했기에 좀 더 진척이 생기면 말해 주기로 했다.
“그래? 다행이다! 좋은 분인가 보네.”
“응. 적응하는데 도움 많이 주셨지. 괜찮은 식당도 많이 알려 주시고.”
“그으래?”
시연이 갑자기 눈을 빛내며 필웅의 팔을 잡아 끌었다.
“왜, 왜 이래?”
“왜 이러긴. 나 배고프다고. 영산의 명물을 맛보여 줘야지!”
시연이 다시 한 번 필웅을 잡아 끌었다. 필웅은 오랜만에 다시 서울에서 일하던 시절로 돌아간 기분에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래, 가자. 맛있는 거 사 줄게!”
* * *
“후우~ 배 부르다.”
시연이 배를 문지르며 말했다. 시연과 필웅은 일전 도영이 필웅에게 소개시켜 준 닭갈비 집에서 식사를 했다. 특제 소스로 유명해 인근 도시에서까지 사람들이 일부러 찾아와 먹는 맛집이라고 했다.
식당의 옆에는 호수가 하나 있었고, 그 주위로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었다.
필웅과 시연은 소화도 시킬 겸 산책로를 걷기 시작했다. 날이 쌀쌀해서인지 산책하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다.
“일은 좀 어때?”
시연이 물었다.
“어렵진 않아. 근데 가끔 사무실에서 난동을 부리는 사람들이 있어.”
“검사 사무실에서 난동을 부리는 미친 놈이 있다고? 자기를 기소할 사람인데?”
“가끔 술이 떡이 되서 오는 사람들이 있거든.”
“어휴… 그럼 어떡해?”
“잘 말려 봐야지 뭐.”
“그런 놈들은 그냥 업어쳐 버려야지.”
“어떻게?”
시연은 스스럼없이 필웅의 멱살 부분을 잡고 자세를 보여줬다.
“보이지? 이렇게 잡고, 등으로 넘겨내듯이 앞으로 당겨 주는거야. 상대방 몸무게를 이용하는 거지. 전에 가르쳐 준 거 기억나지?”
“조, 조심해! 넘어가겠다!”
“걱정 마, 엄살은.”
“크흠!”
시연이 킬킬 웃으며 필웅의 옷을 놔주었다.
둘은 한동안 말없이 산책로를 걸었다.
필웅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요새 강무완 사건은 어때?”
몇 번 통화로도 이야기했던 내용이었지만, 필웅은 혹시 그 후 달라진 것이 있나 확인하고 싶었다.
“지지부진해…”
시연은 한숨을 쉬었다. 강무완이 닥치는 대로 증거를 부인하면서 건강을 문제삼아 계속해서 기일을 연기하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언젠가 항소심에서도 판결이 나기는 하겠지만, 과연 그 때가 언제가 될지는 시연도 필웅도 예측하기 어려웠다.
필웅은 아직 강유라를 만난 것을 전화로 시연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전화로 이야기하기에는 왠지 위험하다는 생각도 들었고, 제대로 상황을 전달하기도 어려울 것 같아서였다.
필웅은 조금 망설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얼마 전에 강유라를 만났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산책길을 걷던 시연이 경악에 찬 표정으로 필웅을 돌아보았다.
“뭐!? 어떻게? 왜 얘기 안 했어?”
“전화로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아서. 감시당하고 있는 것 같았어.”
필웅은 영산으로 오는 버스에서 강유라를 만난 이야기와 그녀가 왜 그동안 연락이 닿지 않았는지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래서… 너네 집에서 잤다고?”
이상한 포인트에서 반응하는 시연을 보며 필웅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밖에서 잤어.”
“진짜 뻔뻔하다 걔.”
“뭐… 하루 이틀도 아니고. 아무튼 강유라 말로는 이제까지 강무완이 쳐 온 사고들과는 비교도 안되게 거대한 계획이 있다고 했어.”
“그 말을 믿어?”
“딱히 나한테 거짓말 할 이유도 없잖아?”
시연은 곰곰히 생각하다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다고 치고, 그 후로 연락해 봤어?”
“아니. 나도 바쁘고, 딱히 연락할 필요가 없는 것 같아서 안 했지.”
그 때 산책길 맞은 편에서 거대한 선글라스와 모자를 눌러쓴 여자가 천천히 이 쪽으로 조깅을 하며 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안 그래도 인적이 없는 길이었는데다가, 비싸 보이는 선글라스에 트레이닝복을 걸친 모습이 너무나 이질적이어서 필웅과 시연은 잠시 멈춰서 그 사람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낀 여자는 잠시 우뚝 멈춰서더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 그의 눈에 필웅과 시연이 들어왔다.
“여어, 조필웅!”
여자가 선글라스를 살짝 내리면서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필웅은 잠시 눈을 찡그리며 그 쪽을 바라보다가 아는 얼굴임을 깨달았다.
“강유라?”
“어쩐 일이야? 아, 데이트 중이구나.”
“데이트 아니거든!”
필웅이 과도하게 발끈하자, 시연은 잠시 그를 쏘아보고는 말했다.
“당신이야말로 어쩐 일이죠? 한가하게 산책이나 다닐 상황은 아니라고 들었는데요.”
“아, 나도 가끔 바람은 쐬어야 할 것 아냐! 너희도 처음에 나 못 알아봤잖아.”
강유라가 투덜대며 선글라스를 고쳐 쓰고는 그들에게 다가왔다.
“그래, 영산지청에 적응은 잘 하고 있나?”
“그래.”
“아, 난 집 구했어. 저번에 준 번호는 내 집 전화번호야.”
“별로 궁금하지 않아.”
“되게 쌀쌀맞다? 아, 정검 앞이라 그런거야?”
강유라가 능글대면서 툭 필웅을 쳤다. 필웅은 질색하며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왜 친한 척이야?”
“왜냐니? 우리 영산까지의 고독한 여행도 같이 한 사이잖아?”
“그런 식으로 표현하지 말아줄래?”
“사실이잖아. 정검, 내가 필웅이 집에서 하룻밤을 보낸 건 알고 있지?”
“이미 나는 밖에서 잤다고 다 얘기 했거든.”
“그 말을 믿어?”
필웅이 기어코 짜증을 내며 말했다.
“뭐하자는 거야? 가던 길이나 가.”
강유라가 필웅의 신발에 묻어 있는 흙을 흘끔 내려다보더니 물었다.
“어디 갔다왔어?”
“교회.”
“무슨 교회?”
필웅은 다시 짜증을 내려다가, 그러면 오히려 슬슬 필웅을 긁고 싶어하는 강유라의 장단에 놀아나는 꼴이라는 것을 깨닫고 화를 삭혔다.
“일요교회라고 교외에 있는 교회야.”
그런데 강유라의 반응이 이상했다.
강유라는 빈정대거나 필웅에게 능글대는 대신,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일요교회라고?”
그녀의 반응이 예상과 달랐기에 필웅은 잠시 주저하다가 대답했다.
“그래.”
강유라는 다시 생각에 잠긴 표정이 되었다.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던 필웅이, 길 한가운데에 서서 더 이상 실강이를 하고 싶지 않아 인사를 하려는 순간이었다.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데, 그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