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범행 현장은 자택이다
위법수집증거 배제의 법칙.
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수집한 증거는 형사재판의 증거로 쓰일 수 없다는 원칙이다.
하지만 그 조문이 형사소송법에 처음 들어온 것은 2007년경의 일이었다.
즉, 2002년인 현재에는 형사소송법에 명시적으로 위법하게 수집한 증거를 인정할 수 없다는 규정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니 변호인의 주장은 법률에 규정도 없는 내용은 주장하는 셈이 되지만, 규정이 형사소송법에 들어오기 전에도 법원에서는 위법하게 수집한 증거는 증거로 인정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려오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압수수색 절차를 제대로 거치지 않고 수집한 증거들이 그런 식으로 증거에서 탈락하고는 했다.
변호인은 바로 그 판례들에 따라 위법수집증거를 논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검찰 측에서 제출한 증거는 사실상 그 각서밖에 없고, 증인이라는 김철수 씨는 모두가 알듯이 지적 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애초에 자기 이름도 가끔 헷갈리는 사람이 하는 증언을 어떻게 믿을 수가 있습니까?”
판사도 김철수 씨의 존재를 익히 아는 듯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아주 준비를 안 해오지는 않은 모양이군.’
필웅은 한숨을 쉬며 보고 있던 기록을 덮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판사님, 변호인이 무슨 주장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검찰 측에서 제출한 증거는 모두 적법하게 수집한 증거들입니다.”
“거짓말입니다! 검찰 측에서는 압수수색 절차를 거친 적도 없는데, 대체 어디서 그 각서를 손에 얻었다는 말입니까?”
변호인이 다시 한 번 강력하게 소리를 높혔다.
필웅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변호인에게 말했다.
“변호사님, 그렇게 소리 안 질러도 다 들립니다. 압수수색 절차를 거치지 않은 건 압수수색 절차를 거칠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필웅은 각서의 복사본을 높이 들어 올렸다.
“판사님, 변호사님. 이 증거를 잘 봐 주시기 바랍니다.”
“이건 그 각서 아닙니까?”
판사가 필웅에게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맞습니다. 각서의 내용이 아니라, 이 각서를 쓴 사람이 누구인지를 봐 주십시오.”
판사가 무슨 말이냐는 듯 자신이 갖고 있는 사건 기록을 뒤져 각서가 첨부된 페이지를 열었다.
“이건…”
필웅이 의기양양하게 변호인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이 각서는 피고인 김영수와 피해자인 김철수 씨가 작성한 것입니다. 즉, 이 각서는 김영수의 소유물일 뿐만 아니라 당사자인 김철수 씨의 것이기도 하죠. 저희는 당사자인 김철수 씨한테서 이 증거를 제출 받았으니, 압수수색을 거칠 필요가 없던 것입니다.”
변호인이 인상을 쓰며 다시 한 번 소리를 높혔다.
“김철수 씨는 이 각서가 무슨 내용인지도 정확히 모릅니다! 그 서류를 제출하는 게 무슨 의미인지도 몰랐을 거란 말입니다!”
판사는 변호인의 이야기를 듣고 어디 한 번 다시 반박해 보라는 듯 필웅을 바라보았다.
필웅은 혀를 쯧 차며 입을 열었다.
“변호사님, 정말 모르겠습니까?”
“뭐라구요?”
“피고인의 죄명이 뭡니까?”
“당신들이 피고인에게 뒤집어 씌운 수많은 무시무시한 죄명들을 일일이 다시 불러달라는 겁니까?”
“일일이 말해줄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만 보면 되요. 거기에 특수감금이 있죠?”
“사람들간의 자유로운 계약에 따라 숙소를 제공해 준 게 어떻게 특수감금이 됩니까?”
필웅이 어이없다는 듯 대답했다.
“변호사님, 지금 본인이 피해자가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 각서에 서명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게 어떻게 자유로운 계약이 됩니까?”
변호사가 아차 싶은 듯 입을 다물었다. 필웅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공세를 이어 나갔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서, 피고인은 피해자를 특수감금했습니다. 그렇죠?”
“특수감금한 ‘혐의’입니다!”
“아무튼 뭐 그렇다고 치고.”
필웅은 귀찮다는 듯 수시로 악을 써대는 변호인에게 손을 내저어 보이고는 그를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이 사건에서 특수감금의 범행 현장은 바로 김영수의 자택입니다.”
필웅이 말하며 한 걸음 앞으로 내딛으며 변호인의 앞을 서성이기 시작했다.
필웅이 무슨 이야기를 꺼낼지 알 수 없는 변호인은 불안하게 왔다갔다 하는 필웅의 발 끝만 노려보고 있었다.
그 순간.
필웅이 우뚝 변호인의 앞에 멈춰섰다.
“범행 중 또는 범행직후의 범죄 장소에서 긴급을 요하여 법원판사의 영장을 받을 수 없는 때에는 영장없이 압수, 수색 또는 검증을 할 수 있다. 어디서 들어본 얘기 아닙니까? 변호사님?”
필웅이 변호인에게 한 발짝 더 다가가며 말했다.
“김영수의 자택은 범행 중의 범죄 장소입니다! 그리고 이 각서는 그 곳에서 발견되었죠. 범행 중의 범죄 장소에서는 영장 없이도 압수를 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렇지만…!”
변호인이 잠시 당황한 듯하다가 바로 입을 열었다.
“범행 중인 현장이라도 긴급한 필요가 없으면 압수를 할 수 없습니다! 그 규정은 범행 중인 현장이기만 하면 아무렇게나 압수를 해도 된다는 규정이 아닙니다!”
필웅이 어깨를 으쓱하며 그를 마주보고는 대답했다.
“긴급한 필요가 없다뇨? 만약 그 자리에서 바로 압수를 하지 않았다면, 피고인은 중요한 증거인 각서를 어디론가 숨기거나 심지어 불태워 버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긴급하지 않다고 할 수가 있습니까?”
변호인이 뭐라고 대꾸를 하려고 했지만, 필웅은 그를 무시하며 판사 쪽으로 몸을 돌렸다.
“따라서 설령 변호사님이 얘기한 대로 김철수 씨가 증거를 제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이 각서를 범행 중의 범죄 장소에서 압수해 얻었으니 여전히 위법하게 수집한 증거가 아닙니다. 판사님, 판단을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
필웅이 판사 쪽으로 휙 몸을 돌리며 판사의 결정을 촉구했다.
판사는 곰곰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대답했다.
“검사 측의 주장대로 이 사건 각서에 증거능력을 부정할 이유가 없는 것 같군요. 변호인의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다음 기일에 선고하겠습니다.”
판사가 더 이상 들을 필요가 없다는 듯 단호하게 말하고는 법정을 나섰다.
필웅은 변호인과 김영수에게 다가갔다.
“재단에서 연락은 없었습니까?”
“당신…!”
“그거 이상하군요. 재단이 이 영산을 지배하고 있다고 했는데, 이 작은 법정은 어떻게 하지 못하나 봅니다?”
필웅은 씩 웃고는 김영수가 뭐라 대꾸를 하기도 전에 재판정을 나섰다.
‘재단이고 뭐고 어디 한 번 다 기어 나와 보시지, 전부 개박살을 내 줄 테니까!’
* * *
그 날 저녁.
필웅은 사무실에 홀로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재단이라…이 좁은 영산에도 배후에서 활동하는 조직이 있군.’
필웅은 차를 따르며 삼영그룹을 떠올렸다.
‘삼영… 재단… 본질적으로는 똑 같은 놈들이지. 재단도 좋지만, 그 전에 강무완을 잡아 넣을 수 있다면 더 좋을텐데.’
그 때 송 조사관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어이쿠, 영감님. 아직 퇴근 안 하셨습니까?”
“아, 조사관님. 잠시만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예, 알겠습니다.”
필웅은 그 동안 바빠서 송 조사관과 이야기를 나눌 틈도 별로 없었던 참이었다. 오랜만에 조금 여유를 찾은 김에 찝찝하던 점을 하나 물어볼 생각이었다.
“조사관님, 얼마 전 김철수 씨 실종됐을 때 실종신고가 들어온 것이 없다고 했었죠?”
송 조사관의 표정이 살짝 켕기는 표정이 되었다.
“그랬죠.”
“하지만 제가 직접 가서 보니 접수된 실종신고가 있더군요. 무슨 일인지 설명해 주실 수 있습니까?”
송 조사관이 면목이 없다는 듯 고개를 수그리고 대답했다.
“영감님, 입이 두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제가 마음이 좀 급해서 제대로 확인을 못 했던 것 같습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닙니까?”
“일부러라뇨!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송 조사관은 거의 의자에서 펄쩍 뛰어오를 듯이 놀라며 손을 저었다.
필웅은 정신을 집중하고 그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크리미널 아카이브가 떠올랐다.
“유력 지지자…”
“신도를 확보…”
무언가 떠오르긴 했지만, 알 수 없는 내용들이었다.
‘지지자? 신도? 이게 다 무슨 얘기지. 교회라도 다니나.’
하지만 아무리 살펴 보아도 이번에 김영수가 벌였던 염전 노예 행각과 관련된 내용들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필웅은 불안하게 그를 훔쳐 보는 송 조사관의 시선을 느끼고 크리미널 아카이브를 사라지게 만들었다.
‘아무튼 김영수와 같이 이 일을 꾸민 건 아닌가 보군.’
“조금 더 성실하게 찾아봐 주셨으면 좋았겠지만, 의도적으로 그러신 건 아닌 듯하니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영감님!”
송 조사관이 과장된 몸짓으로 일어서며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당황한 필웅이 그를 만류하려는 순간, 송 조사관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검사님, 그러고 보니 부임하신 후로 제대로 식사 대접 한 번 못 해드린 것 같은데… 저번에 얻어 먹었으니 오늘은 제가 모셔도 되겠습니까?”
“예? 아니, 뭘 식사 대접까지…”
“너무 부담 갖지 마시구요. 이 동네에서 40년 동안 영업 중인 맛집 하나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자, 출발하시죠!”
“어어…”
송 조사관은 방금 질책을 받은 사람 답지 않은 모습으로 넉살 좋게 필웅을 잡아 끌었다. 필웅은 얼떨결에 일어서 그를 따라갔다.
* * *
필웅이 송 조사관과 식사를 한 후 며칠 동안, 송 조사관은 식사 때마다 새로운 식당으로 필웅을 안내했다.
“검사님, 여기 닭갈비가 기가 막힙니다.”
“검사님, 순대국 좋아하세요?”
“검사님, 여기 백반이…”
처음 필웅은 귀찮기도 했지만, 송 조사관이 너무나 열심이고 게다가 송 조사관이 안내해 준 식당이 하나같이 맛도 좋았기에 점점 송 조사관이 다음엔 어디를 데려갈지 기대되기 시작했다.
마침 송 조사관에 대한 오해도 풀렸고, 송 조사관도 필웅과 비슷한 나이 또래여서 둘은 점점 더 친해질 수 있었다.
하루는 송 조사관이 자신의 친구들을 소개시켜 주었다. 모두 이 지역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들이라고 했다. 한 사람은 화가였고, 한 사람은 작가라고 했다. 필웅은 이내 이 사람들과도 친해지게 되었다.
필웅은 점차 이 외지에서의 생활에서 익숙해져 가는 기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송 조사관이 여느 때와 같이 밥을 먹다가 필웅에게 말했다.
“저, 검사님.”
“?”
“제가 교회를 하나 다니고 있는데 거기 분들한테 검사님 얘기를 했더니 너무 보고싶어들 하셔서… 다들 저희 또래고 괜찮은 친구들입니다.”
“예? 저는 한 번도 교회를 가 본 적이 없는데요. 종교에는 관심도 없고…”
“어휴, 저라고 뭐 검사님을 전도하려고 이러는 건 아니구요. 검사님도 여기 지내시다 보면 심심하실 텐데, 저희 또래 친구들 많이 알아두고 술친구라도 하면 좋지 않겠습니까. 검사님도 적적하시잖아요.”
필웅도 생각해 보니, 교회를 간다고 해서 반드시 종교에 심취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친구를 몇 명 더 사귀어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어쨌든 그가 사는 지역에 그 정도 나이 또래의 사람들은 별로 없기도 했고, 무엇보다 필웅은 지역의 사정에 대해서 좀 더 알아두고 싶었다.
“그럼 한 번 가볼까요?”
“예, 일요일에 제가 댁으로 모시러 가겠습니다.”
‘어차피 이 지역과 재단에 대해 좀 더 알아보려면 지역 모임 같은 데 자주 다니는 것도 괜찮겠지. 그리고…’
필웅은 처음 김영수의 크리미널 아카이브를 열어 보았을 때, 그 모든 범죄 정황과 함께 ‘삼영’이라는 두 글자가 똑똑히 떠올랐던 점을 되새겼다.
‘의외로 삼영그룹이라는 대마를 잡을 수 있는 단서가 여기 숨어 있을지도 몰라.’
필웅은 이러한 속셈은 내색하지 않고,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일요일에 보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