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배후에 있는 재단
파출소장은 분노와 좌절, 흥분이 범벅이 된 얼굴로 그들을 돌아보며 끊임없이 외쳤다.
“난 잘못한 게 없어! 재단이 나를 지켜줄거야! 당신들도 모두…!”
“이봐요, 잠깐!”
무언가를 발견한 필웅이 애타게 그를 불렀다.
-쾅
갑자기 용달 트럭 한 대가 나타나 그를 받아버렸다. 파출소장의 몸이 공중으로 붕 떴다가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웅덩이에 쳐박혔다. 웅덩이는 금새 벌겋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트럭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저 멀리로 사라졌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모두는 충격을 받은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때 필웅이 간신히 먼저 정신을 차리고 장경의 어깨를 쳤다.
“형사님! 저 놈 쫓아가 주세요!”
“아, 알겠슴다!”
장경은 비로소 밖으로 뛰쳐 나가 차에 시동을 걸고는 거칠게 차를 빼서 트럭의 뒤를 쫓아 사라졌다.
순경은 그 때까지도 입만 벌리고 있다가, 비틀비틀 파출소장 쪽으로 다가갔다.
방금 전까지도 파출소장이었던 그 사람은, 이제는 피 웅덩이에 빠진 시체에 불과했다.
“우욱!”
순경이 헛구역질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필웅은 인상을 찌푸리며 천천히 파출소장의 시체 쪽으로 다가가 맥을 짚었다.
맥은 완전히 멈춰 있었다. 필웅은 눈을 질끈 감고는, 파출소장의 두 눈을 감겨 주었다.
“혹시 차량 번호판 보셨습니까?”
필웅이 뒤에서 구역질을 하고 있는 순경에게 물었다.
“예?”
“차량 번호판. 소장님을 치고 간 차량 번호판 혹시 보셨습니까?”
“모, 못 봤습니다.”
“혹시 이 근처에 CCTV가 있나요?”
“아니요.”
필웅은 욕지기가 끓어 오르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필웅은 순경 쪽을 돌아보았다. 그에게서는 아무런 크리미널 아카이브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이 모든 일과 관련이 없어 보였다.
필웅은 일단 그를 공모자들의 용의선상에서 배제시켰다.
‘재단? 그러고 보니 김영수와 이 씨도 재단 이야기를 했었지. 도대체 무슨 재단이지?’
“순경님. 혹시 ‘재단’에 대해서 아십니까?”
간신히 구역질을 멈춘 순경이 힘없이 그를 돌아보았다.
“예? 재단이요?”
필웅은 아무 생각 없이 소장이 말한 그대로를 이야기해 주려다가 멈칫했다.
‘가만, 방금 상관이 눈 앞에서 큰 사고를 당해 충격을 받았을 텐데. 그 상관이 김철수 씨를 노예처럼 부려먹던 악당들과 공모했다는 이야기까지 해줄 필요는 없겠지.’
생각을 마친 필웅은 태연하게 말했다.
“아, 소장님이 그러시던데 영산에는 어떤 재단이 있고, 다들 그 재단의 눈치를 보고 있다고 하더라구요. 그 재단이 뭔지 혹시 아십니까?”
그러나 순경의 눈에는 혼란스러움만이 가득했다.
“재단이요? 도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역시, 그 재단이라는 곳과 직접적으로 무언가를 공모하지 않은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모양이군.’
“아, 아닙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 좀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119에 연락도 하구요.”
필웅은 아쉬웠지만 별로 내색하지 않고 그를 부축해 파출소 안으로 들였다.
자리에 앉자 순경은 비로소 할 일이 생각났다는 듯 급히 119를 불렀다.
필웅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파출소를 나섰다.
‘일단 여기서는 더 얻을 게 없겠군. 빌어먹을! 갑자기 백주대낮에 뺑소니라니, 이게 다 무슨 일이야?’
필웅은 생각할수록 백주대낮에 그것도 파출소 앞에서 사람을 쳐 놓고는 유유히 사라진 트럭이 수상했다.
누가 봐도 고의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정황.
‘누군가가 공모자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는 건가.’
만일 누군가가 누군가를 감시하고 있다면, 그것은 ‘재단’과 연결된 인물일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필웅으로서는 그 재단이 무엇인지, 과연 실체를 갖고 있기는 한 것인지조차도 알 수 없었다.
‘제길…일단 김영수를 잡아서 심문해 봐야겠군. 박 형사님이 그 뺑소니범을 잡을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필웅은 바삐 영산지청으로 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 * *
필웅은 심문실에서 김영수와 마주앉아 있었다.
김영수의 모습은 온갖 무시무시하고 잔인한 혐의로 체포된 사람이라고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태평했다.
“김영수 씨.”
필웅이 목소리를 잔뜩 낮춘 채로 그를 위협적으로 불렀다.
“지금 본인이 무슨 죄로 잡혀온 건 줄 아십니까?”
“아뇨? 뭐 죄를 지었어야 알죠. 이거 검찰이 이렇게 아무 사람이나 잡아 들여도 되는 겁니까?”
김영수는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이 책상을 탕탕 치며 언성을 높혔다.
“여기 오 부장님 불러 주시죠. 검사님이랑은 할 얘기 없습니다.”
필웅이 어이가 없다는 듯 그를 쏘아보고는 대답했다.
“안타깝지만 여기는 뷔페가 아니라서 김영수 씨 입맛대로 취조할 검사를 고를 수는 없습니다. 시작하시죠.”
“대체 뭘 하자는 겁니까?”
“김영수 씨. 김철수 씨 친형이 맞기는 합니까?”
김영수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사실 피도 이어져 있지 않은데 거둬서 일 주고 먹을 거 줬으면 친형보다 나은 거 아닙니까?”
“친형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상관이 있죠. 영산 파출소장님한테 가족관계를 증명할 서류도 보여줬다면서요? 공문서 위조 및 행사죄도 추가해야겠군요.”
“이봐요, 조필웅 씨.”
김영수가 답답하다는 듯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필웅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서울서 오셔서 잘 모르나 본데, 여기 영산에는 영산의 질서라는 게 있다는 말입니다.”
“재단이라는 이름의 질서 말인가요?”
필웅은 김영수를 떠 보기 위해서 일부러 재단 이야기를 슬쩍 꺼냈다.
예상대로 김영수는 흠칫 놀라며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필웅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어떻게 그걸…?”
‘그렇지!’
필웅은 처음 김영수가 염전에서 이 씨와 이야기를 나눌 때의 정황을 떠올렸다.
이 씨가 재단 이야기를 꺼내자 김영수는 눈에 띄게 불안한 기색을 보였었다. 그 말은, 재단은 일견 이 모든 일의 주모자처럼 보이는 그조차도 거역할 수 없을 만큼 까마득히 위에 있는 어떤 단체라는 의미였다.
필웅은 사뭇 그를 무시하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재단의 실체를 몰랐을 줄 알았습니까?”
김영수가 덥썩 미끼를 물자, 필웅은 옳다구나 하고 이야기를 지어내기 시작했다.
“애초에 서울에서 잘 나가던 제가 왜 이런 한직으로 오게 됐다고 생각하시죠? 제가 여기에 온 것도 재단의 뜻입니다. 바로 당신을 감시하기 위해서 말이죠.”
“그, 그런! 말도 안돼!”
“왜 말이 안 되죠? 영산의 모든 것들은 재단의 손아귀 안에 있다는 사실을 잊었습니까?”
필웅은 파출소장이 꺼낸 이야기에 살을 붙여 자신의 이야기에 동원하기 시작했다. 김영수는 점점 더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당신이 그걸 어떻게?”
“당신이 말해 보시죠. 제가 어떻게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것 같습니까?”
필웅은 느긋하게 불안해 하는 김영수의 모습을 감상하다가 말을 이었다.
“게다가 요새 재단에게 바치는 상납금이 상당히 비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는데… 당신이 중간에서 돈을 가로채고 있다고 생각하면 될까요?”
마을에서 이 씨와 김영수가 나누던 대화의 내용이었다. 그것을 필웅이 훔쳐 들었다는 사실을 알 리가 없는 김영수는, 필웅이 재단의 내밀한 사정까지 알고 있는 게 분명하다고 믿기 시작했다.
“아, 아냐! 아닙니다!”
갑자기 김영수의 태도가 바뀌기 시작했다.
그는 덜덜 떨면서 간곡한 눈빛으로 필웅을 바라보았다. 필웅은 짓궂은 쾌감을 느끼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럼 당신이 재단의 지시를 받아 해 온 일들을 설명해 보시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어보고, 당신이 재단의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해 온 사실이 밝혀진다면 저도 재단에 달리 보고할 수도 있잖아요?”
필웅이 은근한 목소리로 그를 구슬리기 시작했다.
김영수는 그 말을 듣고 한참을 머뭇거렸다.
필웅은 인내심 있게 짐짓 여유 있는 표정으로 그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여기서 더 몰아붙이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게… 저…”
김영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만사를 다 포기한 듯한 모양새였다.
“아시다시피 재단에서는 ‘사업’을 벌이고 있습니다. 사업을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하고, 여러 가지 경로로 자금을 조달하고 있죠. 그런데 아무래도 사람을 고용해서 사업을 하게 되면 인건비가 많이 드니, 단순노동 같은 건 저희들 차원에서 쉽게 쓸 수 있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충당을 하고 있습니다.”
“쉽게 쓸 수 있는 사람들이란 김철수 씨 같은 사람을 말하는 겁니까?”
“맞습니다. 일이 잘못되어도 어디 가서 자기가 억울하다고 말하고 다니기도 어려운 사람들이죠.”
“똑똑하군요. 그 사람들을 어떻게 모아서 관리한 겁니까?”
“먼저 주위에서 데려올 만한 ‘인재’들을 수색합니다. 연고가 없고 좀 지능이 떨어지는 사람들에게 먼저 접근을 하는 거죠. 그 다음 지인이라거나 친척이라는 등 이유를 들면서 사람들을 구슬려 데려 옵니다. 마지막으로는 모아온 사람들에게 각서를 쓰게 하는 거죠. 대부분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 밥과 일자리를 준다는 말에 얼른 서명을 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한 곳에 모아둔 다음에, 일이 필요할 때마다 데려다 썼다?”
“맞습니다. 김철수가 있던 곳도 그런 아지트 중의 하나였죠. 그런데…”
김영수가 갑자기 미심쩍은 기색으로 말을 흐렸다.
“검사님은 이런 것들을 전혀 알지 못하시는 겁니까? 마치 처음 들으신 듯한데.”
필웅은 뜨끔했지만 태연한 척하며 책상을 탕 하고 쳤다.
“지금 재단에서 보낸 절 의심하시는 겁니까? 저는 대한민국 검사에요! 당신보다 재단에 훨씬 도움이 되는 사람이라는 걸 모르시겠습니까?”
“아, 아닙니다. 검사님을 의심하다뇨!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헤헤.”
김영수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비굴한 미소를 띄우며 조심스럽게 필웅의 눈치를 봤다. 필웅은 역겨움을 느끼며 그의 시선을 피해 얼굴을 돌려 버렸다.
“아무튼 잘 알겠습니다. 재단에는 잘 이야기해 두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물론 판사님한테는 잘 이야기해 둘 생각이 없지만 말이지.’
필웅은 속으로 생각하며 심문실을 나섰다.
* * *
필웅의 사무실.
곧 장경이 필웅의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필웅은 인사도 건너 뛰고 바로 장경에게 물었다.
“뺑소니범은요?”
장경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찌나 날랜 놈인지 차 끌고 쫓기 시작하니까 저 멀리 이미 사라져 있습디다. 게다가 근처 지리에도 밝은 놈인 것 같아요. 어찌나 길을 잘 아는지 온갖 골목길을 뚫고 저멀리 도망가 버리던디요.”
“그렇군요.”
“김영수는 어떻게 됐습니까?”
“잘 구슬려서 자백은 받아 뒀습니다.”
“제가 더 도와 드릴 일은 없습니까?”
“일단은 없을 것 같네요. 시연이한테 안부 전해 주세요.”
“그러죠.”
장경은 못내 아쉽다는 듯 에잉 하며 사무실을 나섰다.
필웅은 곧 있을 공판을 위해 자료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 * *
김영수의 공판기일.
먼저 들어와 있는 필웅을 김영수가 들어오면서 힐끗 쳐다보았다.
그의 눈에 분노가 서려 있었다. 필웅이 재단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낸 모양이었다.
필웅은 모른 척하고는 미소를 지으며 여유있게 그에게 인사했다.
“구치소 밥은 맛있었습니까?”
김영수가 뭐라고 욕설을 내뱉었지만 필웅은 그를 무시하며 자리에 앉았다.
“판사님 입정하십니다.”
주심 판사와 배석 판사들이 들어오자 모두가 기립한 후, 다시 자리에 앉았다.
판사가 사건 기록들을 살펴 보고는 먼저 피고인인 김영수의 변호인에게 물었다.
“변호인 측, 검찰 측 주장에 대해 반박할 내용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진술하시죠.”
‘저 놈도 재단의 끄나풀인가.’
머리를 포마드 같은 것을 발라 올백으로 넘긴 중년의 변호인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필웅을 슬쩍 쳐다보았다.
“변호인 측은 검찰 측이 제시한 증거가 위법수집증거로서 증거능력이 없다고 주장하는 바입니다.”
판사의 눈썹이 꿈틀했다.
“위법수집증거라구요? 재판에 쓸 수 없는 증거라는 말입니까?”
“바로 그렇습니다.”
변호인이 가시 돋힌 목소리로 필웅 쪽으로 돌아서며 대답했다.
“검찰 측은, 압수수색 영장도 없이 각서를 압수해서 증거로 제출했습니다! 이는 위법하게 수집한 증거이니 재판에서 증거로 쓰일 수 없습니다!”
필웅은 가만히 자리에 앉아 변호인을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