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사로 개과천선-90화 (90/151)

90화 거짓말 아니에요

희주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게 그러니까 무슨 내용인 거에요?”

필웅은 종이를 펴들고 설명을 시작했다.

“이 종이들은 각서야. 보통 내가 앞으로 누군가에게 무슨 일을 하겠다고 약속할 때 쓰는 문서지.”

“아…”

“각서들은 그 자체로 계약서와 동일한 효력이 있지. 예를 들어 내가 일주일 후까지 박 형사님한테 10만원을 갚겠다라고 쓰고 거기에 사인을 하면 그 자체로 효력이 발생하는 거야.”

“그, 뭣이냐. 공증 같은 건 안해도 됩니까?”

장경이 어디선가 들어봤다는 듯 물었다.

필웅이 고개를 저었다.

“물론 공증이 있으면 신빙성이 더 올라가기는 하죠. 예를 들어 형사님이 나중에 그 각서를 들고 저한테 돈을 갚으라고 찾아왔을 때, 제가 그 각서의 서명은 위조된 거라든가 제가 제정신으로 서명한 게 아니라고 우길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만약 공증이 되어 있으면 그렇게 우길 수가 없어지는 거죠.”

“어, 그러면 결국 공증을 받아야 완전히 효력이 있는 거 아닙니까?”

“그렇지는 않아요. 단지 나중에 싸움이 나면 입증하기가 더 유리해지는 거죠. 공증이 없는 각서라도 상대방이 우기지만 않으면 충분히 증거자료가 될 수 있습니다.”

장경은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이 각서는 공증을 하지는 않았지만 유효하다는 거군요.”

“그렇죠.”

“무슨 내용인데요? 봐도 잘 모르겠어요.”

희주가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물었다.

필웅이 그럴 수 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반적으로 각서는 굉장히 단순하게 쓰이죠. 그래야 서로 나중에 알아보기가 편하기도 하고, 일반인들이 엄격하게 계약서를 써봤자 서로 이해를 못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 각서는 굉장히 의도적으로 어렵게 쓴 것 같네요. 희주같이 정상적인 정규 교육을 받은 아이도 한 눈에 보고 무슨 내용인지 헷갈려 할 정도로요.”

필웅이 말하며 각서에 달려 있는 빼곡한 조항들을 가리켰다.

“결과적으로는 단순한 내용인데, 조항이 24개나 되네요.”

장경이 뒷머리를 험악하게 긁기 시작했다. 잘 이해가 가지 않거나 짜증스러운 상황이 닥쳤을 때 나오곤 하던 그의 버릇이었다.

“아니, 뭔 각서를 이렇게 복잡하게 만들어 놨답니까? 검사님 말씀대로면 말이 안 되잖아요. 일반인들끼리 약속하면서 이렇게 복잡하게 만들면, 서로 알아나 보겠습니까?”

필웅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정확한 지적이십니다. 자, 이런 걸 보여주고 사인하라고 하면 형사님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장경이 뚱한 표정으로 한동안 각서를 빤히 쳐다보다가, 쳐다보기도 싫다는 듯 고개를 휙휙 저으며 언짢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꼼꼼히 읽어 보고 이해가 안 가면 사인을 안 하겠죠.”

“그렇죠? 일반인이라면 그렇게 반응하는 게 정상적이겠죠.”

필웅은 종이를 넘겨 맨 뒷장의 서명란을 가리켰다.

“하지만 이 누군가는 어쨌든 서명을 했네요. 둘 중에 하나입니다. 각서의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일만 해서 서명을 했거나,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서명을 했거나.”

“김철…수? 이거 아저씨가 서명한 거잖아요?”

희주가 삐뚤빼뚤 써 있는 서명란의 이름을 발견하고 경악한 표정으로 외쳤다.

“맞아. 내 생각엔 왠지 김철수 씨가 이해를 하고 서명을 했을 것 같지는 않군.”

“그래서 이 각서가 대체 무슨 내용인 건데요?”

필웅이 한숨을 쉬며 종이를 접어 품에 넣었다.

“쉬운 말로 하자면 노예계약이야.”

“노예!?! 계약이요?”

장경이 놀라서 눈을 꿈뻑이며 물었다.

“예. 온갖 휘황찬란한 말들과 복잡한 수식어들을 다 빼면, 결국 갑은 을을 언제든 부려먹을 수 있고 을은 거기에 대해 아무런 대가도 요구할 수 없다는 내용입니다. 즉, 노예죠.”

“말도 안돼…! 이런 게 효력이 있단 말입니까?”

장경이 어이가 없어하며 물었다.

필웅도 그를 마주보며 대답했다.

“당연히 없죠.”

“그럼 대체 왜 이런 걸…!”

“자, 김철수 씨나 제가 거기서 본 다른 작업자들은 전부 정상인만큼의 지적 사고를 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처음엔 뭔가 맛있는 음식이라도 먹이면서 달콤한 말로 꼬드겼겠죠. 이 각서의 내용도 모르는 사람들이 사인을 하고 나면, 이제 이걸 빌미로 삼아 사람들을 노예처럼 부려먹기 시작한 겁니다.”

“하지만 어차피 각서가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일텐데, 왜 그냥 도망가 버리지 않았을까요?”

필웅이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형사님, 제가 그 마을에서 처음에 말씀드린 것 기억합니까?”

“예?”

장경은 필웅의 말을 듣고 곰곰히 필웅이 처음 말한 것이 무엇인지 기억해 내기 위해 노력했다.

잠시 후, 장경이 딱 하고 손뼉을 쳤다.

“아! 그 현지 경찰이…!”

필웅이 재빨리 희주 쪽을 쳐다보며 눈치를 줬다. 장경은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고는 말을 삼켰다.

“에, 아무튼.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응? 뭔데요? 어떻게 됐다는 건데요?”

필웅이 희주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런데 너, 집에 안 가도 돼?”

“그걸 이제와서 묻는다구요?”

“맞아. 사실은 아까 물었어야 했지.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려줄 테니까, 오늘은 이만 집에 돌아가는 게 어때? 새벽인데 대체 어떻게 집에서 빠져 나온 거야, 그러고 보니까?”

희주가 입을 비죽 내밀며 쏘아붙혔다.

“몰라요! 치, 기껏 위기에서 구해줬더니만.”

필웅이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늘 구해준 건 정말 고마웠어. 하지만 부모님도 걱정하실 거고…”

필웅의 말에 희주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알았어요. 철수 아저씨 잘 부탁해요.”

“그래, 조심히 들어가렴.”

희주가 아파트를 나서자 장경이 급하게 물었다.

“그래서 검사님은 현지 경찰이 저 사람들을 협박하는 데 동원된 것 같다는 겁니까?”

필웅은 팔짱을 끼며 자신의 생각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형사님 말대로, 철수 씨나 다른 사람들은 각서의 의미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협박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그 사람들도 명확하게 무슨 의미인지 아는 협박 수단을 동원해야겠죠. 예를 들면 경찰봉 같은 것 말입니다.”

“하지만 그건 그냥 추측 아닙니까?”

‘물론 어느 정도는 추측이지만 크리미널 아카이브로 읽은 것들도 있지.’

필웅은 조용히 처음 파출소장을 봤을 때 떠올랐던 크리미널 아카이브의 내용을 떠올렸다.

공모, 노역, 도주.

그 세 가지 단어들만은 다른 무엇들보다도 명확했다.

‘분명 파출소장을 비롯한 여러 사람이 공모해서 사람들을 노역에 동원한 게 틀림 없어. 도주란 아마도 노예처럼 부려지던 누군가가 도주했다는 의미겠지.’

크리미널 아카이브는 성질상 미래에서 과거의 어느 사건을 바라보는 형태의 기록이다.

따라서 그렇게 노예로 부려지다가 누군가가 탈출했다면, 충분히 ‘도주’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었다.

‘실제로 누군가가 탈출했기도 했고 말이지.’

필웅은 생각하며 자신의 방에서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는 김철수를 힐끗 바라보고는 장경에게 말했다.

“추측인지 아닌지는 직접 물어보면 알겠죠.”

“예? 그럼…”

필웅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을 이었다.

“내일 김철수 씨가 일어나면 물어보면 되겠죠.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고, 누가 이 일에 가담했는지를.”

* * *

필웅은 다음날 파출소로 찾아갔다.

“검사님,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전에 본 순경이 그를 알아보고 공손하게 인사했다.

“예, 소장님 계십니까?”

“어이구, 어쩐 일이십니까?”

안쪽에서 소장이 나오며 그를 보고 인사했다.

“아, 소장님.”

필웅이 그를 맞아 인사하면서 순경에게 넌지시 말했다.

“죄송한데, 잠시 자리 좀 비켜 주실 수 있을까요?”

“예, 알겠습니다.”

순경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파출소 밖으로 나가 순찰 차량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시죠?”

파출소장도 궁금하다는 눈빛으로 필웅을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김영수 씨 아십니까?”

“김영수 씨요? 김철수 씨 형 아닙니까?”

“원래 김영수 씨를 알고 있었던 것 아닙니까?”

“예?”

파출소장이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어제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전 김철수 씨가 가족이 있는 줄도 몰랐다니까요.”

“정말입니까?”

“그럼요!”

“김철수 씨!”

필웅이 갑자기 소리를 높여 외쳤다. 파출소장은 어안이 벙벙해서 그를 바라보았다.

“예? 갑자기 저한테 무슨 소립니까?”

“소장님 부른 거 아닙니다.”

그 때, 파출소 문 쪽에서 장경과 함께 김철수가 머뭇거리며 걸어 들어왔다.

“헉?”

파출소장이 자기도 모르게 깊게 숨을 들이쉬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시죠?”

필웅이 그에게 한 발짝 더 다가가며 물었다.

“김철수 씨가 돌아왔는데, 왜 그렇게 놀라시는 겁니까?”

“예? 아니, 저, 그게, 그런…”

파출소장은 필웅과 김철수를 번갈아 쳐다보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다시는 이 곳으로 돌아올 줄 몰랐던 사람이 돌아오니까, 놀랍습니까?”

“그게 무슨…”

필웅이 매섭게 그를 노려보며 다시 한 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솔직히 얘기하시죠. 김철수 씨한테 다 들었으니까.”

“뭘 들었다는 겁니까?”

파출소장이 조금 진정된 목소리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

짐짓 자신 있는 척 하려는 듯 가슴을 쑥 내민 채였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떨리고 있었기에 별로 효과가 없었다.

“김영수 씨와 김철수 씨가 이 각서를 쓸 때 파출소장님도 함께 있었죠?”

필웅이 품 안에서 각서를 꺼냈다. 빼곡하게 글자가 쓰여진 각서를 보며, 파출소장은 거의 울상이 되어 그와 김철수를 계속해서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게…”

“소장님이 잡아간다고 했었다.”

옆에서 파출소장의 눈길을 피하며 고개를 수그리고 있던 김철수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거짓말입니다!”

“거짓말 아니다. 종이, 각서? 약속한 대로 안 하면 소장님이 감옥에 가둔다고 했었다.”

김철수가 발을 달달 떨면서도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약속한 거 안 지키면 안 되는데. 그래서 약속 지키려고 형네 집에 갔어요. 그런데 밥도 안 주고 맨날 일만 시켰다.”

파출소장의 얼굴은 거의 하얗게 질리다 못해 시체처럼 보였다.

“나, 난 몰랐어요!”

“몰랐다구요? 각서의 내용을 지키지 않으면 감옥에 가두겠다고 협박했으면서 그 각서가 무슨 내용이었는지도 몰랐다고 주장하는 겁니까?”

“나, 난 그냥… 김영수 씨가… 가족 일이라고 해서. 그리고 재단이 시킨 일이라고 했어요!”

파출소장은 덜덜 떨며 힘겹게 변명을 늘어놓다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들며 외쳤다.

“재단! 재단이 시킨 일이라고 했다구요!”

“그게 무슨 소립니까? 무슨 재단이요?”

파출소장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재단… 재단을 거역할 수는 없어요. 검사님은 모르십니다. 이 마을, 아니. 이 영산에서 재단을 거역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단 말입니다!”

장경이 귀찮다는 듯 귀를 후비며 다가왔다.

“아, 뭔 소린지 모르겠고. 당신을 직권남용죄로 체포하겠슴다. 같은 경찰밥 먹는 사람끼리 이러고 싶지 않았는데 당신은 좀 너무하네.”

장경이 수갑을 꺼내 그의 팔에 채우려는 순간이었다.

“이럴 순 없어!”

파출소장이 갑자기 소리를 버럭 지르며 장경을 밀치고는, 필웅이 미처 만류할 틈도 없이 노도처럼 파출소 밖으로 뛰쳐 나갔다.

“거기 서세요!”

필웅이 화난 목소리로 외치며 그를 따라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자, 잠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