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제야
남자는 필웅의 말을 듣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김철수?”
“그래요, 김철수. 김철수 씨가 여기 살지 않습니까?”
“어?”
남자가 갑자기 호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코팅이 거의 다 벗겨져 알아보기도 힘든 주민등록증이었다.
“김철수. 내가 김철순데 여기 사는 걸 어떻게 알았지?”
필웅은 그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주민등록증을 넘겨 받아 살펴보았다.
김철수라는 이름이 똑똑히 박혀 있었다.
필웅은 환호성을 울리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고는 다급하게 말했다.
“김철수 씨. 희주라고 아시죠?”
“희주? 아… 그 아파트 사는 애. 과자도 많이 주고 이야기도 많이 했었다.”
“그래요, 희주. 저희는 희주가 보내서 왔습니다. 잠깐 들어가서 얘기 좀 해도 되겠습니까?”
김철수는 희주 이야기를 듣자 눈에 띄게 반가운 표정이 되었다.
“들어와요, 들어와.”
김철수는 반갑게 손짓하며 낡은 대문을 밀고 들어갔다.
필웅과 장경은 누군가 다른 사람이 없나 주위를 둘러보고는, 조심히 안으로 들어섰다.
“다른 사람은 없습니까?”
“다른 사람들? 응…”
잠시 김철수가 생각에 잠겼다.
“다른 사람은 없어요. 다 작업하러 갔다.”
철수가 고개를 젓더니 갑자기 울상이 되어 소리쳤다.
“아! 맞다! 나 가봐야 된다.”
“예? 어딜요?”
“형이 뭐 가지고 오라고 심부름 시킨건데 까먹고 있었다...”
김철수는 풀죽은 표정으로 필웅이 뭐라 말할 틈도 없이 방으로 들어갔다.
필웅과 장경은 서로를 잠시 마주보았다.
“털까요?”
“텁시다.”
“뭐 아무거나 수상해 보이는 건 일단 다 갖고 나오세요.”
“아이구, 뭐 조사 한 두번 합니까.”
장경이 대답하며 한 방으로 들어갔다. 필웅은 집 안을 둘러보았다.
마루가 있는 오래된 집이었다. 방은 총 세 개였다. 한 방은 김철수가 들어가 있고, 나머지 한 방은 장경이 들어갔으니 남은 것은 하나였다.
필웅은 조심스레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방 안에는 낡은 이불장 외엔 아무 것도 없었다. 사람이 사는 곳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방이었다.
필웅은 혹시나 해서 이불장을 열었다. 퀴퀴한 냄새가 나는 낡은 이불이 몇 장 보였다. 이불을 꺼내서 이불장 바닥을 샅샅이 뒤져 봤지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필웅은 초조해 하며 꺼낸 이불을 들어 탈탈 털어 보았다. 역시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다. 필웅은 혹시 방 구석이나 천장 같은 곳에 뭔가가 숨겨져 있나 해서 한참을 찾아 보았지만, 뭔가 숨겨 놓은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필웅은 낭패한 표정으로 마루로 나오면서 장경을 마주쳤다.
필웅이 묻는 눈으로 장경을 바라보았다. 장경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사람 사는 집이 맞긴 한 건지도 잘 모르겠슴다.”
필웅도 정확히 똑 같은 감상을 느꼈기에 별 말없이 김철수가 들어간 방 쪽을 돌아보았다.
그 때, 김철수가 방 안에서 헐레벌떡 뛰어나왔다. 어지간히 급한 모양이었다.
“잠깐, 김철수 씨. 어디 가세요?”
“형한테 이거 가져다 주러 가야된다.”
“잠깐만요. 김철수 씨, 혹시 여기 와서 뭐 했습니까?”
“여기 와서…?”
김철수의 표정이 흐릿해졌다.
“여기 와서 일했다.”
“무슨 일입니까?”
“많이. 일 많이 했었다.”
김철수는 고개를 푹 수그리고 어두운 얼굴로 연신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
“일 많이…밥은 없어. 일 안하면 밥은 없어.”
“일은 형, 김영수가 시키는 건가요?”
“맞아요.”
“얼마나 일한 겁니까?”
“많이. 밤새도록 해야 돼. 지금 가야된다.”
김철수는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급하게 대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런 김철수를 장경이 붙들어 잡았다.
“헉! 왜 그래요? 나 가야돼.”
“잠깐만요. 좀더 물어볼 게 있어요.”
“안돼, 형이 화낸다고!”
김철수가 소리를 지르며 장경의 팔을 거칠게 뿌리쳤다. 생각지 못한 완력에 장경은 주춤 물러섰다.
“김철수 씨! 잠시만…”
“가야된다!”
김철수는 포효하듯 소리지르며 대문을 열었다.
“에이 씨, 뭐야!”
갑자기 벌컥 열린 대문에 밖에서 누군가가 놀란 듯 소리쳤다.
필웅과 장경은 재빨리 마당에 놓인 장독대 뒤로 몸을 숨겼다.
“야 이 새끼야, 심부름 시킨지가 언젠데 아직까지 안 와?”
“미, 미안…”
“찾아오라고 한 건 어딨어?”
“여기요.”
필웅은 빼꼼히 고개를 들고 열려 있는 대문 사이로 보이는 실루엣을 살펴 보았다.
목소리나 실루엣으로 보아서는 김영수가 틀림 없었다.
김영수는 종이 같은 것을 이리저리 넘겨 보고 있었다.
-덜그럭
필웅은 좀 더 제대로 보려고 장독대에 손을 올리다가 그만 장독대의 뚜껑을 건드리면서 소리를 내고 말았다.
김영수가 매섭게 마당 쪽을 돌아보았다.
“누구야!”
김영수가 성큼성큼 마당 쪽으로 달려왔다.
필웅과 장경은 다른 곳으로 몸을 숨길 틈도 없이 김영수를 맞닥뜨려 버렸다.
“뭐야!? 너희들 설마…?”
의혹이 가득 담겨 있던 김영수의 눈빛이 점차 확신에 차 커지는 것을 보다가, 필웅은 재빨리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읍! 읍읍!”
김영수는 발악하듯 손을 떼어내려고 했지만 워낙 필웅의 체구가 김영수보다 머리 한 개는 커서 도저히 힘으로는 그를 떼어낼 수가 없었다.
“형사님, 빨리!”
장경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김철수의 손을 잡아 끌었다.
“어? 어어?”
어쩔 줄을 모르며 옆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던 김철수는 장경이 우악스럽게 손을 잡아끌자 그대로 끌려갔다.
“뛰어요!”
필웅은 장경이 김철수를 끌고 대문 밖으로 뛰어 나가는 것을 확인하고는 발버둥치는 김영수를 잡고 있던 손을 풀고 강하게 그의 목 뒤를 내리쳤다.
뭐라 소리를 치려 했던 김영수는 그대로 앞으로 풀썩 넘어졌다.
필웅은 이마의 땀을 훔치고는 그대로 장경을 따라 뛰어 나갔다.
“영수네 집 쪽이다!”
그 때 밖에서 누군가가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마을을 순찰하던 마을 사람들이 소란스러운 소리를 듣고 근처에서 몰려든 모양이었다.
“이런 제길!”
길 앞의 골목에서 장경과 합류한 필웅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 저기 손전등 불빛이 보였다. 그들이 있는 쪽으로 마을 사람들이 점점 다가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디로 가야한다?’
어두운 데다가 마을의 길은 복잡하게 꼬여 있었다. 아까 한 번 지나오긴 했지만 필웅으로서는 제대로 나갈 길을 찾을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아저씨!”
그 때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필웅은 정신이 없는 와중에 그 쪽을 돌아보았다.
무언가 작은 체구의 사람이었다.
필웅은 사방을 계속해서 주시하며 그 쪽으로 다가가며 장경을 손짓해 불렀다.
“희주?”
“이 쪽이에요, 빨리요!”
희주였다. 희주가 목소리를 한껏 낮추고는 장경과 필웅을 애타게 불렀다.
필웅은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희주 쪽으로 달려갔다.
희주는 의연하게 일어서서 마치 잘 아는 길인듯 꼬불꼬불한 골목길을 앞장서 달리기 시작했다.
“쟤는 누굽니까?”
장경이 거의 발작할 것 같이 흥분한 김철수를 간신히 진정시키면서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아까 형사님한테 전화한 앱니다!”
“예? 걔가 여길 왜…”
“전들 알겠어요? 일단 빨리 따라와요!”
필웅으로서도 영문을 알 리가 없었기에 그저 희주가 이끄는 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희주는 좁은 골목길을 가로지르고, 얕은 개울을 건너 가며 그들을 이끌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마을 밖이었다.
마을 사람들의 외치는 소리도 저 멀리서 아스라이만 들렸다.
“헉…헉…”
네 사람은 비로소 멈춰서 크게 숨을 들이켰다.
“너…대체 여긴 어떻게…”
필웅이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희주를 보며 간신히 말을 이었다.
“어떻게 온 거야 여긴?”
“올 때랑 똑같이 왔죠.”
“아니, 그게 아니라… 여긴 왜 다시 온 거냐고. 여긴 위험하다고 했잖아!”
필웅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치려다가 간신히 소리를 죽였다.
“아저씨는 길도 잘 모르고 헤맬까봐 그랬죠.”
“넌 대체 길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는 거야? 여기 살았었어?”
“그럴리가요.”
“그럼 대체 어떻게…”
“아저씨, 지금 그게 중요해요?”
희주가 당돌하게 물었다.
필웅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허리를 펴며 대답했다.
“그래, 좋아. 일단은 여기서 빨리 빠져 나가자.”
“제 차가 저 쪽에 있습니다.”
장경이 간신히 숨을 고르고는 저 앞을 가리켰다.
“어, 희주다!”
그 때 김철수가 갑자기 환한 목소리로 외쳤다.
“아저씨!”
“희주야!”
김철수는 며칠동안 옷도 갈아입지 못한 것인지 무척 추레한 몰골이었지만, 희주는 반갑게 뛰어가 그를 꼭 끌어안았다.
“희주? 우리 집엔 왜 왔어?”
“우리 집이요?”
“응. 우리 집. 이제 여기가 우리 집이야.”
김철수가 갑자기 불안한 눈빛으로 장경과 필웅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이 사람들이 집에서 나 끌고 나왔다.”
희주가 말없이 고개를 흔들고는 조용히 말했다.
“아저씨, 이 사람들 나쁜 사람 아니에요.”
“나쁜 사람 아니야?”
“아저씨 저 믿죠?”
“응. 희주는 거짓말 안 해.”
“그럼 일단 따라와요.”
“그래.”
김철수는 순순히 희주가 내민 손을 잡고 아이를 따라 나섰다.
장경은 어처구니없어 하며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다가, 생각났다는 듯 차키를 주머니에서 꺼내 차 쪽으로 걸어갔다.
“일단은 여기서 얼른 빠져 나가시죠. 원, 이제는 하다 하다 별 이런…”
장경은 투덜거리면서도 희주와 김철수가 다치지는 않았는지 힐끗힐끗 살펴 보면서 앞장서 걸어갔다.
* * *
필웅의 아파트.
김철수를 필웅의 침대에 재우고 난 후, 필웅은 장경과 희주와 함께 거실에 둘러앉았다.
“자, 이제 네 얘길 좀 들어 보자.”
“뭘요?”
“그 밤에 거긴 어떻게 왔으며, 그 마을의 길은 또 어떻게 그리 잘 알게 된 건지.”
“왠지 아저씨가 거기서 헤맬 것 같길래 다시 가본 것 뿐이에요. 어쨌든 잘 탈출했으니까 됐잖아요?”
희주는 별로 그 문제에 대해 말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래, 사실 뭐 중요한 건 아니야. 그것보다는 그 놈들이 사람들을 끌어 모아서 대체 뭘 하고 있던건지가 중요한데.’
필웅은 문득 김영수가 들고 있었던 서류가 생각났다.
“형사님, 혹시 김영수가 들고 있던 서류 어딨는지 아세요?”
“아, 이거요?”
장경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점퍼에서 꼬깃꼬깃 접힌 종이 몇 장을 꺼냈다.
“이건 언제 챙긴 겁니까?”
“저 아재가 꼭 들고 있던데요?”
장경이 대답하며 턱으로 침실 쪽을 가리켰다.
“다행이군요. 잠깐 줘 보세요.”
장경은 종이들을 필웅에게 건넸다.
필웅은 찬찬히 종이에 적힌 내용들을 읽어 내려갔다.
희주와 장경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뭐에요?”
“뭡니까?”
필웅은 심각한 표정으로 한 장 한 장 종이들을 넘겼다.
완전히 빠져든 모양새였다.
희주와 장경은 물끄러미 필웅을 바라보다가, 슬슬 그 쪽으로 다가와 앉아 필웅의 어깨 너머로 서류들을 훔쳐보았다.
장경의 표정도 점점 심각해졌다. 희주는 약간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종이들을 뚫어지게 내려다 보고 있었다.
“검사님, 이건…?”
필웅이 씹어뱉듯이 입을 열었다.
“잘 챙겨온 것 같군요.”
필웅이 무겁게 종이를 내려 놓았다.
“이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잘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