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드러나는 인물
“헉!”
필웅은 간신히 비명을 삼키고는, 시연한테서 배운 대로 유도의 기술을 써서 남자의 팔을 잡아끌어 보려고 노력했다.
건장한 체격에서 나오는 필웅의 힘에 필웅의 팔을 잡은 누군가는 어어 하고 필웅에게 끌려나오다가, 간신히 다른 한 팔로 필웅의 팔을 잡으며 속삭였다.
“검사님! 접니다, 저!”
정신없이 남자를 메다 꽂으려던 필웅은 익숙한 목소리에 휙 뒤를 돌아보았다.
장경이 그의 팔을 붙잡고 필사적으로 고개를 좌우로 젓고 있었다.
필웅은 긴장이 탁 풀리는 걸 느끼고는 팔을 놓았다.
장경이 필웅으로부터 팔을 잡아빼서 몇 번 흔들었다.
“어이구, 검사님 힘이 장사십니다.”
“왜 이제 와요!”
“이제 오다뇨? 아니, 여기가 뭐 서울 옆집인 줄 아심까? 연락 받자마자 차 끌고 오다가도 한참 헤맸구만. 그나저나 그 여자애는 누굽니까?”
장경이 툴툴거리며 팔을 주물렀다. 필웅은 일단 그를 잡아 끌고 좀더 어두운 골목으로 향했다.
“일단 어디 숨어서 얘기하죠. 이 놈들이 지금 저를 찾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 검사님을요? 아니, 왜요?”
장경도 희주로부터 자세한 사정을 듣지는 못하고 단지 필웅에게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만 들었기에, 무슨 상황인지 다소 혼란스러웠다.
“여기 들어올 때 누구한테 들키지는 않았습니까?”
“밤이라 아무도 없던디요.”
다행히 장경이 도착했을 때는 사람들이 필웅을 찾는 데 정신이 팔려 그를 미처 발견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다행이군요. 이 놈들, 사람들을 잡아와서는 강제노역을 시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 뭐라구요?”
“그게…”
필웅은 장경에게 자신이 본 것들을 설명하려고 하다가, 정작 자신이 도망을 다니느라 실제로 그들이 잡혀 온 사람들에게 무엇을 시키고 있는지는 목격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빌어먹을!”
“뭔 상황입니까 대체?”
장경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필웅은 이마를 짚으며 입술을 사려물었다.
‘젠장, 크리미널 아카이브에 너무 익숙해지다 보니까 이제 이게 나만 볼 수 있는 것인지를 자꾸 까먹게 되잖아.’
“일단 구체적으로 뭘 목격하진 못했습니다만, 정황상 이 놈들이 조직적으로 지능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모아다가 강제노역을 시키고 있는 것 같아요.”
“예? 그럼 현지 경찰에다 알려야죠.”
“그게…”
필웅이 다시 목소리를 낮췄다.
“현지 경찰도 연루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예에?”
“쉬이잇!”
필웅은 다급하게 검지를 입 앞에 세워보이며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보냈지만, 이미 높아진 장경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저 멀리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필웅은 별 수 없이 장경의 팔을 잡아 끌고 다시 숨을 곳을 찾아 몸을 낮추고 달렸다.
필웅은 밤이라 길이 잘 보이지 않는데다가, 눈에 불을 켜고 그들을 찾아 다니는 마을 사람들을 피해 몸까지 숙이고 이동하자니 숨이 가빠왔다.
“일단 저기까지만 갑시다.”
필웅은 언덕 위의 정자를 가리켰다. 개방된 곳이기는 했지만, 근처에 풀숲이 있어 여차하면 숨을 수도 있고 주위에 누가 다가올 때 쉽게 먼저 발견할 수도 있으니 전략적인 선택이었다.
잠시 후, 그들은 함께 정자에 도착해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헉…헉. 이제 좀 설명을 해주시죠.”
장경이 심호흡을 하고는 말했다.
“일단, 이 근처 마을에서 누군가가 실종됐다는 제보를 받았습니다. 원래 가족 없이 살던 남자였는데, 갑자기 형이란 사람이 나타나더니 자기가 데리고 있다고 현지 경찰에게 알린 모양이더군요.”
“그런디요?”
“그래서 그 형이란 사람의 주소지를 따라와 봤더니 여기였고, 마을 사람들이 형이란 사람을 자꾸 숨기려는 것 같아서 좀 지켜보기로 했죠. 그랬더니 갑자기 밤에 저 놈들이 몸이 불편해 보이는 사람들을 데리고 어딘가로 가면서 작업 어쩌고 하는 얘기를 하더란 말입니다.”
“허, 그래요?”
장경이 필웅의 이야기를 듣고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가 물었다.
“그런데 현지 경찰이 연루되어 있다는 건 무슨 소립니까?”
“그게…”
필웅은 필사적으로 설명할 말을 찾았다. 어쨌든 장경이 몸담고 있는 조직의 비리에 관련되었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적당히 둘러대서는 장경으로서도 믿기 어려울 것이다.
“저 놈들 중 책임자 같아 보이는 인간이 인근 경찰들을 모아서 밥을 사느니 어쩌느니 하면서 기름칠을 해야겠다고 하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기름칠이요?”
“뭐 대충 자기들 사업이 잘 굴러가게 잘 보여 두겠다는 거죠.”
“아하.”
장경이 뭔가 개운치 않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표정을 본 필웅이 물었다.
“왜요?”
“아니, 그게… 그런 걸로 당장 유착관계에 있다고 하긴 어렵지 않겠슴까? 이런 얘기 하기 그렇지만 아직도 이런 지방 관서 중에는 지역 유지들한테 밥 얻어 먹고 사건 처리해 주고 이런 관행도 많고…”
장경은 아무래도 자신의 조직과 관련된 일이다 보니 쉽게 수긍하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필웅은 답답했지만 어쩔 수 없이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장경을 타이르기 시작했다.
“단순히 사건 처리 편의를 봐 주는 정도가 아니지 않습니까? 이 놈들, 사람들을 납치해서는 부려 먹고 있다구요.”
장경이 세차게 머리를 벅벅 긁으며 말했다.
“에이, 일단 어쨌든 이놈들이 수상한 짓들을 하고 있는 건 확실하니까 덮치고 보죠. 책임자가 누굽니까?”
“잠깐 기다려요. 형사님 혼자 왔습니까?”
“예, 당연히 혼자 왔죠.”
장경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장경의 대답을 들은 필웅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쉽지 않겠는데요. 당장은 영장도 없고 구체적인 증거도 없으니 체포를 하려고 해도 강하게 저항할 가능성이 높아요.”
“그럼 두드려 패면 되죠.”
“우리 둘밖에 없는데, 두드려 패다가 이 놈들이 다른 마음이라도 품으면 어떡합니까?”
“다른 마음이라뇨?”
필웅이 팔을 뻗어 주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를 좀 보세요. 영산 외곽이긴 하지만 다른 동네와도 단절되어 있고, 영산에서 들어오는 데도 한참 걸리는 곳입니다. 저 놈들이 갑자기 휙 돌아서 검사랑 형사 하나쯤 묻어버리자고 결심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요?”
“에이, 설마 그렇게까지 막 나가는 놈들이 있겠슴까.”
장경은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불안한 표정으로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아무래도 정면승부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엔 김영수의 집에 뭔가 쓸만한게 있을 것 같아요. 차라리 이 놈들이 우리를 찾느라 정신 팔린 사이에 김영수의 집으로 숨어들어가 보는 게 어떨까요?”
“흠…그게 더 나을 수도 있겠네요.”
장경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저 쪽에 보이는 저 집이 김영수의 집입니다. 안 들키게 조용히 따라오세요.”
필웅이 앞장서며 손짓했다. 장경은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 * *
이동하다가 사람들의 소리에 필웅은 필사적으로 골목 어귀에 놓인 쓰레기통 뒤로 몸을 숨겼다.
벌써 들킬 뻔한 것이 세 번째였다. 아무래도 그들이 발견되지 않으니 수색인원을 점점 늘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거의 다 왔는데…!’
필웅은 안타까워 하며 약 1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보이는 김영수의 집 쪽을 흘끗 바라보았다.
예상대로 전부 그들을 찾고 있는 모양인지 불이 꺼져 있었다.
김영수의 집까지 가는 길에는 큰 공터가 있었다. 지금까지는 어떻게 눈에 잘 띄지 않는 골목을 끼고 이동하여 발견되지 않을 수 있었지만, 사방이 탁 트인 공터를 들키지 않고 가로지르는 것이 문제였다.
게다가 어두워서 주위에 다른 사람이 오고가고 있는지 확인하기 어려웠다. 손전등 불빛을 보고 피할 수도 있지만 손전등을 들지 않고 돌아다니는 마을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제길, 어쩐다…?’
필웅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크리미널 아카이브는 내게만 보이지.’
이제까지 필웅은 크리미널 아카이브를 특정한 인물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는 데에만 써왔다.
하지만 동시에 크리미널 아카이브는 밤이 됐든 낮이 됐든 환하게 떠오르는 표식이기도 했다.
반드시 그 안에 들어 있는 정보를 확인하는 데만 쓰라는 법은 없었다. 말하자면 크리미널 아카이브는, 필웅의 눈에만 보이는 LED 스크린과도 비슷했다.
물론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사람에게 써 본 적은 없었지만, 시도해 볼 만한 가치는 있었다.
즉, 저 어두운 곳에 사람이 있나 없나 확인하는 용도로 크리미널 아카이브를 쓰려는 작전이었다.
필웅은 침을 꿀꺽 삼키고 정신을 집중했다.
‘나와라!’
필웅은 눈을 감았다가 뜨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장경이 옆에서 불안하게 속삭였다.
“검사님, 뭐 하시는 겁니까? 저 쪽으로 넘어가야죠.”
“잠시만요.”
필웅은 손을 들어 장경의 말을 막고는 다시 집중해서 주위를 둘러 보았다.
그 때, 저 편에서 무언가가 떠올랐다.
투명한 패널 같은 크리미널 아카이브였다.
‘보인다!’
누군가가 골목 저 편의 담장 뒤에서 서성이고 있었고, 크리미널 아카이브가 그의 머리 위로 떠올라 있었다.
손전등을 들고 있지 않아 육안으로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크리미널 아카이브만큼은 확실히 눈에 띄었다.
“아무도 없는 것 같은데 지금 지나가시죠.”
“잠시만요. 저기 사람이 있어요.”
“예?”
장경은 어리둥절해서 필웅이 가리킨 방향을 보았지만, 육안으로는 담장 뒤인데다가 어두워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 것도 안보이는디요?”
“아무튼 저기 인기척이 있어요. 잠깐만 기다렸다가 갑시다.”
담장 뒤에서 서성이던 사람은 잠시 후 반대편으로 사라졌다. 크리미널 아카이브 또한 사라졌다.
필웅은 다시 주위를 둘러 보았다. 아무 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필웅은 한숨을 쉬고는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가시죠.”
필웅은 장경에게 손짓하고는 재빨리 공터를 가로질렀다.
공터를 가로질러 김영수의 대문을 열려고 하는 그 때.
“누구세요?”
필웅은 심장이 떨어져 내린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비로소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필웅은 거의 심장이 바닥에 굴러다니고 있지 않은지 확인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고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았다.
한 어리숙해 보이는 남자가 필웅과 장경을 기웃거리며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세요?”
남자가 재차 물으며 다가왔다.
“어, 당신은 누구십니까?”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내가 먼저 물어봤는데.”
“조필웅이라고 합니다. 누구시죠? 여기 사시는 분입니까?”
필웅은 어쩔 수 없이 재빨리 대답하고는 행여 누군가의 눈에 띌까봐 벽 쪽으로 바짝 붙었다.
남자가 흥미롭다는 듯이 물었다.
“뭐하세요?”
“그게…아무튼 제가 대답했으니 이제 그 쪽이 대답하세요.”
“뭘요?”
“누구시냐고 묻지 않았습니까.”
“아, 맞다.”
남자는 헤헤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필웅은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저기요, 죄송한데 이 안으로 들어가서 얘기하면 안 되겠습니까?”
“거긴 우리 집이다.”
답답한 말투에 어색한 문장. 필웅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순간 놀라 물었다.
“그 쪽 집이라구요?”
“네. 우리 집.”
“우리 집?”
필웅이 장경을 돌아보았다. 장경도 얼빠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 혹시…”
필웅이 낮은 목소리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
“김철수 씨라고 아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