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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로 개과천선-87화 (87/151)

87화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희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어떻게 해야 하나요?”

필웅은 슥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조금씩 하늘은 검푸른 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일단, 하나만 확인해 보자.”

“뭔데요?”

“너 혹시 그러면 아까 마을회관에 모였던 사람들 얼굴을 구분해 낼 수 있겠어?”

필웅이 반신반의하며 물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희주의 기억력은 놀라운 수준이었다. 잠깐 흘깃 봐도 많은 것을 기억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필웅도 대충 마을회관에 모인 사람들의 얼굴을 봐 두긴 했지만, 전부 다 구분해낼 수 있을지는 확신이 없었다.

“그럼요.”

필웅의 예상대로 희주가 흔쾌히 대답했다.

필웅은 마을회관 쪽을 돌아 보았다. 멀리서나마 사람들이 하나둘 회관에서 나오려고 하는 것이 보였다.

“마을회관에서 나오는 사람들 보여?”

희주가 눈을 찡그리며 손을 눈 위에 가져다 댔다.

“얼굴은 잘 안 보이는데, 입고 있는 옷으로 구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잘 됐구나. 그럼 일단 여기서 보고 있다가, 우리가 본 적 없는 그 한 명을 구별해 줄 수 있겠어?”

희주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유심히 마을회관 쪽을 응시했다.

마을 사람들이 한 명, 두 명씩 마을회관에서 나와 짝을 짓거나 혼자 자신들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두 명…세 명…’

마을회관에서 사람들이 연이어 나오고 있었지만, 희주는 별 말이 없이 뚫어지게 사람들을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필웅은 약간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애초에 마을회관에 있던 신발 개수나 사람들의 수도 희주가 주장한 것일 뿐, 착각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었다.

‘더 늦기 전에 차라리 영장을 받아 오는 게 낫지 않을까?’

여섯 명, 일곱 명.

이미 일곱 명의 사람이 돌아갔는데도 희주는 말이 없었다.

그 때 한 남자가 마을회관에서 걸어나왔다. 필웅도 눈에 익은 처음 말을 건 사람이었다.

‘이제 여덟 명.’

남은 건 희주의 말에 의하면 두 사람이었다.

그 때 또 한 사람이 회관에서 걸어 나왔다.

남자는 회관에서 나와 담배에 불을 붙이더니 입구 근처에 서서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담배를 다 태우기까지의 5분 정도의 시간 동안, 아무도 회관에서 나오지 않았다.

필웅은 조바심이 났다.

‘희주가 착각을 했거나, 혹시 우리가 안 볼 때 이미 한 사람이 빠져나간 것 아닐까?’

필웅이 그렇게 생각하며 희주를 불러세우려고 할 때였다.

또 한 남자가 회관에서 걸어나왔다.

‘열 명째!’

필웅은 침을 꿀꺽 삼키며 희주의 옆에 서서 남자를 응시했다.

마지막으로 나온 남자는 담배를 피우던 남자에게 가서 꾸벅 인사를 하며 손을 맞잡았다.

둘은 한동안 한담을 나누는 듯 하더니 각자 갈 길로 향했다.

“마지막으로 나온 저 남자에요.”

희주가 속삭였다.

남자는 붉은 스웨터에 카키색 야상을 입고 있었다.

“좋아, 수고 많았어.”

“이제 어떻게 할 거에요?”

“일단 난 저 사람을 따라가 봐야겠어.”

“저는요?”

“넌 이제 정말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아. 대신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

“또 저만 따돌리기에요?”

“너밖엔 이 부탁을 들어줄 사람이 없어서 그래. 철수 아저씨를 무사히 구해 오고 싶지 않아?”

희주는 그제서야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뭔데요?”

“돌아가면 이 번호로 연락 좀 해 줄래? 아저씨랑 친한 형사님이야. 이 마을로 와 달라고 연락 좀 해줘.”

“알았어요.”

희주는 필웅이 급하게 써서 넘긴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를 받아 들더니 물끄러미 필웅을 바라보았다.

“왜?”

시선을 느낀 필웅이 물었다.

“조심하세요.”

희주는 그 말 한 마디를 남기고 몸을 돌려 조용히 마을 입구 쪽으로 향했다.

필웅은 희주가 마을 어귀의 버스 정류장까지 잘 내려갔는지 살펴 보면서 동시에 붉은 스웨터를 입은 남자의 뒤를 눈으로 쫓았다.

남자는 주위를 열심히 이리저리 돌아 보았다. 왠지 불안한 눈치였다.

하지만 필웅이 있는 언덕은 멀기도 했고 어두워지기 시작해서 눈에 띄지 않았다. 필웅은 조용히 그를 시야에 담아두고 언덕에서 천천히 내려갔다.

남자가 마침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필웅도 조용히 그와의 거리를 좁히며 그의 뒤를 따랐다.

남자는 마을 안쪽에 사는 모양이었다. 남자는 한참 굽이굽이 마을길을 따라 걸어갔다.

필웅으로서는 다행스럽게도 시골 마을이라 그런지 어두워지자 사람들이 길거리에 보이지 않았다.

마침내 남자가 멈춰섰다.

남자는 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갔다.

필웅은 주위를 둘러보며 위치를 대강 익혀 두고는,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어 보기 위해 담벼락에 바짝 기댔다.

“야, 나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어, 어, 왔어?”

“이 X새끼가. 누가 반말하래? 내가 니 친구야?”

잠시 후 철썩 하고 뺨을 맞는 소리가 들려 왔다.

“헉, 미, 미안해… 아니, 잘못했어요.”

“다른 애들은 어딨어? 좀 있다 작업 나가야돼.”

“바, 방금 들어왔는데…”

“방금 들어왔는데 그래서 뭐?”

“또 나가…요?”

“내가 니 새끼들 먹여 살리느라 드는 돈이 얼만 줄 알기나 해?”

아마도 호통을 치는 쪽은 붉은 스웨터의 남자인 듯했다.

‘그럼 다른 한 쪽은 누구지? 만약 방금 집에 들어간 남자가 김영수라면…’

필웅은 만일 붉은 스웨터를 입은 남자가 김영수라면, 다짜고짜 혼나고 있는 쪽은 김철수일 거라고 추측했다.

필웅은 퍼뜩 희주가 주소를 적어서 준 종이를 떠올렸다. 필웅은 종이를 꺼내어 주소를 확인한 후, 이 집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명패 같은 것이 없는지 이리저리 살펴 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 봐도 주소를 알 수 있을 만한 표식이 없었다. 시골 마을이라서 그런지 번지수를 알 수 있는 표지판 같은 것도 없었다.

필웅은 쩝 하고 불만스럽게 입맛을 다시고는 다시 종이를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주소는 맞춰 보지 못했지만, 정황상 분명 여기겠군.’

필웅은 곰곰히 오늘 하루 마을 사람들이 보인 태도들을 떠올렸다.

다짜고짜 적대적으로 필웅을 밀어내던 마을 입구의 사람들, 그들 몰래 사람을 숨겨 둔 마을회관의 사람들, 그리고 심상치 않은 집 안의 남자의 태도.

필웅은 갈수록 이것이 단순한 실종사건이 아니라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가만, 그런데 다른 애들이라니? 김철수 말고도 다른 사람이 더 있단 말인가?’

그 때 정적을 깨고 화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연장 챙겨서 당장 따라나와! 밥값도 못하는 것들이 느려 터져가지고.”

“네, 네.”

한동안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다가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문 쪽으로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필웅은 깜짝 놀라 일단 담벼락 옆으로 몸을 숨겼다.

대문이 열리고, 붉은 스웨터를 입은 남자가 먼저 나타났다.

그리고 그의 뒤를 따라 몇 명의 남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들 성인 남성인 것 같았지만, 왠지 모르게 눈의 초점이 흐리거나 걸음걸이가 불편해 보였다.

필웅은 김철수에게 지적 장애가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왠지 저 남자들도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저 중에 누가 김철수야?’

필웅은 답답해 하다가 일단 시선을 맨 앞에서 어슬렁거리며 걸어나는 붉은 스웨터의 남자에게 돌렸다.

크리미널 아카이브가 떠올랐다.

<강제노역…>

<…노예생활…>

왠지 모르게 일전 파출소장의 크리미널 아카이브를 봤을 때와 비슷한 내용의 문구들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 내용은 보다 구체적이었다.

필웅은 눈살을 찌푸리며 보다 자세히 읽어보려고 노력했다.

<…납치…>

<염전…노역…>

‘이럴 수가.’

필웅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리려는 입을 틀어 막았다.

‘이 놈들, 사람들을 납치해서 염전에서 강제노역을 시키고 있었군.’

필웅이 눈을 깜빡여 크리미널 아카이브를 지우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삼영과…연계…>

‘뭐야!?’

필웅은 거의 육성으로 소리를 낼 뻔하다가 간신히 말을 삼켰다.

‘삼영? 삼영이라고?’

물론 삼영이라고 해서 반드시 삼영 그룹 그 자체를 지칭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필웅으로서는 이 음산한 마을에서 수상한 범죄를 벌이고 있는 인물의 크리미널 아카이브에서 ‘삼영’이라는 단어가 떠오른 것이, 단순히 우연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 때, 마을에서 염전으로 이어지는 길가 어귀에서 갑자기 다른 사람들이 나타났다. 필웅은 일단 몸을 숨기고 그들을 멀리서 지켜보기 시작했다.

마을 입구에서 봤던 이 씨와 박 씨였다.

“빨리 빨리 움직여, 이 새끼들아!”

건장한 남자, 박 씨가 개중에서 굼뜨게 움직이는 남자의 뒤로 다가가 그를 발로 찼다.

“어이구!”

남자가 길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

박 씨는 침을 퉤 뱉고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매섭게 늑대 앞의 양들처럼 덜덜 떨고 있는 남자들을 노려보았다.

“오늘 작업 다 못 마치면 내일도 밥 없어! 알겠어?”

김영수와 이 씨는 어느새 옆에 편안히 앉아 낄낄대고 있었다.

아무래도 김영수와 이 씨가 실질적인 책임자고 박 씨가 행동대장인 모양이었다.

“영수 아재, 이제 슬슬 경찰들 밥 한 번 더 사야 되는 것 아닙니까?”

“응?”

“오늘도 무슨 검사 놈이 기웃거렸다면서요. 한 번 경찰들한테 기름칠 더 해야 되는 거 아닐까요?”

이 씨의 목소리였다.

“그래야지. 이 짓도 참 어지간히 돈 드는 일이구만.”

“아, 그리고.”

이 씨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었다.

“재단에 보낼 돈은 다 마련된 겁니까?”

잠시 침묵이 이어지고, 김영수가 불편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그런 걸 네가 왜 신경 써?”

“아니, 뭐 알아서 하실 거지만. 얼마 전에도 재단에서 상납 공문 돌았는데, 작업장 중에서 우리 작업장만 진도가 느리다고…”

“너 이 새끼, 지금 나 재촉하는 거야?”

김영수의 화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씨는 금새 꼬리를 내리면서 어르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이구,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냥 저는 혹시 뭐 더 필요하신 거 없으실까 해서…”

“지랄하지 말고 네 일이나 똑바로 잘해.”

“죄, 죄송합니다.”

김영수가 화난 듯이 벌떡 일어서 걸어갔다. 근처의 집 담벼락에 숨어 그들의 대화를 훔쳐 듣던 필웅은, 김영수가 갑자기 이 쪽으로 다가오자 황급히 몸을 돌렸다.

-빠직

급하게 몸을 돌리다가 뭔가 나뭇가지 같은 것을 밟은 모양이었다.

‘빌어먹을! 클리셰는 벗어나는 법이 없군!’

김영수가 눈살을 찌푸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야, 무슨 소리 안 나?”

“예?”

“방금 누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럴 리가요.”

“주위 한 번 찾아봐봐. 아까 낮에 그 검새가 아직 안 가고 있을 수도 있어!”

김영수가 이 씨에게 소리쳤다.

필웅은 이를 악물고 최대한 조용하게 몸을 돌려 다른 골목으로 향했다.

하지만 낯선 곳이었고 어두웠기에, 필웅은 자신이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골목을 돌아 나가면 이 씨나 박 씨를 마주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필웅은 추운 날씨인데도 이마 위에서 땀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저 너머에서 누군가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심상찮음을 느끼고 이 씨와 박 씨가 마을 사람들을 불러온 모양이었다.

이제는 이 씨, 박 씨, 김영수 외에 다른 사람들도 합세해서 필웅을 찾고 있는 것 같았다.

필웅은 조심스레 골목에서 큰 길 쪽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10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 손전등을 들고 있는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필웅은 식겁해서 얼른 다시 어두운 골목으로 몸을 숨겼다.

‘이거, 들키는 건 시간 문제겠는데.’

필웅은 저 멀리 보이는 언덕 위의 정자를 흘끗 쳐다보았다.

어두웠지만, 저기까지라도 갈 수 있다면 일단 마을 전체를 조망할 수 있으니 도망칠 계획을 세우기 쉬워 보였다.

필웅은 결심을 하고 다시 한 번 길을 살펴본 후, 심호흡을 하고 팔을 걷어 부쳤다.

필웅이 막 골목을 돌아 나오려는 순간.

필웅의 팔목을 힘껏 잡았다.

강한 힘의 남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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