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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로 개과천선-85화 (85/151)

85화 나, 알고 있거든요

당황스러운 표정의 소장의 얼굴 위로, 희미하게 필웅에게 익숙한 화면이 떠올랐다.

‘…크리미널 아카이브!?’

필웅은 소장에게서 떠오른 크리미널 아카이브의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애썼지만, 무언가 희미하게만 보이는 크리미널 아카이브의 내용에서 읽어낼 수 있는 것은 얼마 없었다.

<…공모…>

<노역…>

<…도주…>

서로 아무런 상관도 없는 단어들이 산발적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필웅이 조바심을 내면서 소장 쪽을 뚫어지게 바라보자 소장은 더욱 당황해하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아, 그게. 예전에 한 번 파출소에서 봉사활동을 하면서 쌀이랑 연탄을 좀 갖다 준 적이 있었는데, 그 때도 고맙다고 편지를 받았거든요. 그렇지, 이 순경?”

이 순경이 옆에 서서 잠시 생각에 빠진 표정을 짓다가 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필웅은 이 순경을 무시하고 소장에게 물었다.

“그 편지, 지금도 있습니까?”

“어이구, 그게 벌써 몇 년 전인데요. 지금은 없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오래 된 편지의 필적을 어떻게 기억하시는 겁니까?”

소장이 약간 불쾌한 듯이 대답했다.

“허허, 이거 제가 취조를 받는 기분이 드는군요. 보시다시피 까먹기 어려운 필체지 않습니까. 그리고 편지만 확인한 게 아니구요, 자, 형이라는 분이 등본도 떼어 갖고 왔다니까요.”

소장이 서랍에서 다른 서류를 꺼내 필웅과 희주의 눈 앞에 슥 들이댔다가 집어 넣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김철수의 이름과 ‘김영수’라는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필웅은 자신이 자기도 모르게 그를 몰아붙이고 있다는 점을 깨닫고 잠시 스스로를 추슬렀다.

‘만약 정말 소장이 뭔가 범죄에 연루되어 있다면, 쓸데없이 먼저 경계심을 자극할 필요는 없지.’

필웅은 짐짓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 이런.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그나저나 가족이면서 20년 넘게 생사를 모르고 있었다니 별 일이 다 있네요.”

“뭐, 간혹 그런 일이 있지 않습니까. TV에 그런 사연이 나오기도 하고.”

“그런데 저…혹시 그 형님에 관한 인적사항 자료를 좀 보여주실 수 있을까요?”

그러자 소장이 짐짓 근엄한 표정을 짓고 대답했다.

“아무래도 개인 정보다 보니… 가족 분이 아닌 이상, 정식 수사 요청이 오기 전엔 드릴 수는 없습니다.”

‘정식으로 수사 요청 공문을 보낼 수밖에 없나.’

필웅은 아쉬워하다가 생각할수록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20년 동안 존재조차 알 수 없었던 가족의 존재.

그런 가족의 갑작스런 출현과 철수 씨의 실종.

마치 자신을 의심할 줄 알고 준비했다는 듯한 형의 태도.

필웅은 석연치 않다고 생각했지만, 달리 지금 당장 이 파출소로부터는 얻을 만한 정보가 없어 보였다.

“아, 참.”

필웅은 파출소를 나오려다가 문득 뒤를 돌아 순경에게 물었다.

“방금 실종신고 기록을 컴퓨터로 찾아 보신 것 같은데, 혹시 실종신고 기록을 다른 경찰서나 파출소에서는 조회 못 하나요?”

“예? 아뇨, 실종신고 기록 같은 건 전산화 되서 다른 관할서에서도 조회 가능할 겁니다.”

필웅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희주를 데리고 파출소를 나섰다.

그런 그에게 새로운 의문이 찾아 들고 있었다.

‘만일 다른 경찰서에서도 조회가 가능하다면, 송 조사관님은 대체 왜 실종 신고 기록이 없다고 한 거지?’

* * *

시내의 한 커피숍.

희주는 소파에 앉아 따뜻한 코코아를 홀짝였다.

필웅은 조심스럽게 희주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생각하니?”

희주가 컵에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뭘요?”

“파출소에서 들은 이야기. 혹시 철수 씨가 형이 있다는 얘길 들은 적 있어?”

“형이요?”

희주는 갑자기 관자놀이에 검지와 중지를 대고 눈을 감았다.

“뭐하는 거야?”

“만화에서 보니까 이렇게 해야 생각이 잘 나는 것 같더라구요.”

필웅은 어이가 없었지만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 희주가 입을 열었다.

“제 기억에는 그런 언급이 없어요.”

필웅은 희주의 표현 방식이 뭔가 특이하다고 생각했지만, 별 말 없이 재차 물었다.

“그래? 다른 가족에 관한 건?”

“없어요. 가족에 관한 언급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하지만 어떻게 가족과 떨어지게 됐는지에 대해서도 얘기한 적 없어?”

“어렸을 적 기억은 하나도 없다고 했어요.”

필웅은 파출소장과 이야기를 나눌 때 느꼈던 찝찝함을 떠올렸다.

‘역시 뭔가가 있어.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희주를 제외한 관계자들이 전부 철수 씨를 찾을 생각이 없거나 일부러 외면하고 있군.’

희주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괜찮은 건가요? 철수 아저씨는 형이 없는데, 그럼 누가 철수 아저씨를 데려간 거에요?”

필웅은 별 말 없이 희주의 머리를 슥 쓰다듬어 주고는 말했다.

“걱정하지 마.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지만, 내가 철수 아저씨를 찾아 올게.”

“하지만…”

“나를 믿어 봐. 이래봬도 서울에 있을 땐 해결 못한 사건이 없었다니까?”

희주는 입술을 비죽이다가 할 수 없다는 듯 두어 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아, 맞다. 혹시 그럼 철수 씨를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쯤이니?”

“한 열흘 전쯤? 고 씨 아저씨한테도 물어봤는데 모른다고 했어요.”

고 씨 아저씨라면 철수와 함께 일하는 동료라고 했다. 철수가 사라지자 고 씨는 경찰에 실종신고를 했고, 그로부터 얼마 후 갑자기 형이라는 사람이 나타나 철수를 자신이 데리고 있다고 한 모양이었다.

“그 고 씨 아저씨라는 사람은 어디 살고 있니?”

“철수 아저씨랑 같이 단칸방에서 살아요.”

“그럼 같이 사는 사람이 며칠 동안 사라졌는데 실종신고를 며칠이나 지나서 한 거야?”

“가끔 다른 지방으로 멀리 일을 나갈 때도 있어서 그러려니 했대요. 그런데 며칠 동안 나타나질 않고 연락도 없어서 경찰에 실종신고를 했다고 하더라구요.”

“혹시 고 씨랑 철수 씨가 살고 있는 집이 어딘지 아니?”

“왜요?”

“고 씨를 직접 만나서 얘기를 들어 보고 싶어서.”

“저랑 같이 가요.”

“너도 가겠다고?”

“우리는 이제 한 팀 아니에요?”

희주가 당돌하게 물었다.

필웅은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글쎄 한 팀이라기에는…”

희주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턱을 치켜 들었다.

“아저씨, 솔직히 지금 아저씨 주위에 진짜 도움이 되는 사람이 있기는 해요?”

희주의 말에 필웅은 불현듯 ‘실종신고가 없다’던 송 조사관의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심상찮았던 파출소장의 태도와, 그에게 나타났던 크리미널 아카이브도.

필웅은 흘깃 희주를 바라보았다.

희주의 얼굴 위로 크리미널 아카이브가 떠올랐다.

필웅의 경험에 의하면, 크리미널 아카이브는 기본적으로 사건의 기록들이다. 그것은 누군가 쓴 기사의 형태로 나타날 때도 있었고, 단순한 단어나 그림의 형상으로 나타날 때도 있었다.

그 사건들은 해당 인물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을수록, 그리고 시점상 가까이 다가와 있을수록 뚜렷하고 상세하게 나타났다.

만일 그 인물과 아주 간접적으로만 관련이 있는 사건이라면, 크리미널 아카이브에는 추상적인 사건의 경과만 나타날 뿐 그 인물과 어떻게 관련이 있는지까지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만일 그 인물이 범인(또는 범인으로 추정되어 조사를 받은 인물)이거나 피해자인 경우, 해당 인물과 관련된 사건 기사들은 물론 해당 인물에 관한 인적사항까지도 나타나는 경우가 있었다.

그렇지만 희주의 크리미널 아카이브는 안개처럼 뿌옇게만 보였다.

하지만 적어도, 소장을 바라볼 때 나타났던 이상한 단어들은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희주의 크리미널 아카이브와 소장의 크리미널 아카이브는 관련이 없어 보였다.

필웅은 크리미널 아카이브를 끄고는 미소를 띄웠다.

“좋아. 같이 가보자.”

희주는 큰 눈을 깜빡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필웅과 희주는 고 씨의 집으로 향했다.

* * *

“고칠복 씨, 계십니까?”

필웅이 낡은 양철 대문을 두드렸다.

잠시 후 안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목소리가 들려왔다.

“뉘슈?”

“영산지청의 조필웅 검사라고 합니다. 물어볼 게 있어서 왔습니다.”

“무슨 일인데요?”

“아저씨, 저 희주에요. 문 좀 열어줘요.”

이내 작게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들리더니 낡은 문이 끼이익 하며 살짝 열렸다.

런닝셔츠를 입고 머리가 벗겨지기 시작한 40대 정도의 남자가 문 틈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너는 또 웬일이냐?”

“아저씨, 여기 검사 아저씨가 지금 철수 아저씨를 찾고 있는데 물어보고 싶은 게 있대요.”

고 씨, 고칠복은 위아래로 필웅을 훑어보다가 한숨을 쉬며 문을 열었다.

“들어오쇼.”

필웅과 희주는 고칠복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작은 2층짜리 주택이 눈에 들어왔다. 고칠복과 철수는 그 중 1층의 단칸방에 세들어 사는 모양이었다.

고칠복이 문을 열자, 퀴퀴한 냄새가 진동하는 작은 단칸방이 나타났다. 둘이 살기에는 비좁아 보이는 방이었다.

“실례 좀 하겠습니다.”

필웅과 희주가 방으로 들어서 방바닥에 앉았다. 고칠복은 한참 컵을 찾더니 포기하고는 대접에 물을 떠서 그들에게 건넸다.

“마실 게 변변찮아서.”

“예, 감사합니다.”

필웅은 대접을 받아 들고는 스윽 단칸방을 훑어 보았다.

남자 둘이 산다기엔 살림이 무척 간소했다. 둘 다 혼자 사는 남자들이라 그런지 식기나 옷가지도 거의 없어 보였다.

“저, 철수 씨가 사라지기 전에 혹시 뭔가 이상한 얘기를 한 적은 없습니까?”

고칠복이 고개를 흔들었다.

“경찰분들한테도 얘기했지만 그런 건 없었습니다.”

“혹시…”

필웅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재차 물었다.

“철수 씨의 형이라는 사람이 찾아오지는 않았나요?”

고칠복이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예, 어떻게 아셨습니까?”

“경찰에서 철수 씨의 형이라는 분이 자기가 철수 씨를 데리고 있다고 했다더군요.”

“맞아요. 여기도 찾아왔었습니다.”

“뭐라고 하던가요?”

“같은 얘기죠, 뭐.”

“혹시 사는 곳 같은 건 얘기 안했습니까?”

고칠복이 머리를 벅벅 긁다가 대답했다.

“글쎄요, 그런 건 따로 얘기 안했는데.”

“난데없이 갑자기 같이 사시던 분의 가족이 나타났는데, 철수 씨를 어디로 데려갔는지도 묻지 않으신 겁니까?”

“이봐요, 검사 어르신.”

고칠복이 귀찮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무리 철수가 모자라 보여도 어엿한 성인이고, 게다가 여기서 이렇게 고생하면서 살다가 가족이 나타나서 데리고 가겠다는데, 거기다 대고 제가 꼬치꼬치 물어볼 이유가 있습니까? 따지고 보면 철수한테도 잘 된 일 아니에요?”

“그렇지만…!”

그 때 갑자기 희주가 필웅의 손을 툭 건드렸다.

필웅이 희주를 돌아보았다.

희주는 미세하지만 분명하게 고개를 약간 저어 보였다.

필웅은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차피 고칠복을 윽박지른다고 더 이상 얻을 것이 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알겠습니다. 실례 많았습니다.”

고칠복은 대꾸도 하지 않고 주섬주섬 이부자리를 펴기 시작했다.

“밤 새서 일하고 왔더니 조금 피곤하네요. 멀리 안 나갑니다.”

필웅과 희주는 그렇게 쫓겨나듯 고칠복의 집에서 나왔다.

필웅이 비로소 희주에게 물었다.

“아까 왜 그런거야?”

“뭘요?”

“내가 말하려는데 막은 거 말이야. 물론 캐물어도 뭐가 더 나오지는 않았겠지만, 지금으로서는 고칠복 씨가 유일한 단서였다고.”

“유일한 단서긴 하지만, 입을 열 생각이 없는데 굳이 계속 건드릴 필요도 없잖아요.”

“지금으로선 그렇겠지만… 이러면 결국 정식 수사 요청 공문 보내서 파출소에서 그 형에 관한 인적사항을 확인할 수밖에 없겠는데.”

“그럴 필요 없어요.”

필웅이 의아한 표정으로 희주를 내려다 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니?”

희주가 큰 눈을 깜빡이며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나, 알고 있거든요. 김영수라는 아저씨가 어디 사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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