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니네 둘 사귀어?
필웅은 먼저 집으로 가서 짐을 풀었다.
필웅이 구한 집은 청사 근처의 작은 아파트였다. 아파트라고 해봐야 5층도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 근방에서는 보기 드물게 새로 지은 아파트인 듯했다. 방은 2개 정도였다.
“방이 두 개니까 하나씩 쓰면 되지 않을까?”
“아예 방 하나를 차지하고 안 나갈 셈이야? 오늘만 여기서 자고 내일부터 당장 집 알아봐.”
“예이, 예이.”
강유라는 따분하다는 표정으로 집을 이리저리 둘러 보았다.
“뭐, 저번에 살던 동네보다는 좋네. 그 동네 삼영건설에서 재개발 중인 건 알지?”
“그게 너희가 하는 거였어?”
“몰랐나 보네.”
강유라는 금새 또 관심을 잃은 듯 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방 안에서 강유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필웅, 침대가 없는데?”
“내일 올거야.”
“뭐? 그럼 난 어떻게 자라고?”
“요랑 이불 있으니까 그거 덮고 자.”
“나보고 냄새 나는 홀애비 이불을 덮고 자라고?!”
강유라가 짜증을 벌컥 내며 방에서 뛰쳐나왔다. 필웅은 담담하게 맞받아쳤다.
“홀애비인 건 미안한데, 정 그러면 나가서 동네 여관방에서 자든가. 거긴 적어도 홀애비 냄새는 안 나겠지.”
“그걸 말이라고 해?”
“없는 침대를 나보고 어떡하라는 거야?”
필웅도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다.
‘이거야 뭐, 조만간 조식도 만들어서 대령하라고 할 판이군.’
“집에 먹을 건 있어?”
“있겠냐? 나도 오늘 도착했다고!”
“하…”
강유라는 머리가 지끈거린다는 표정으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됐지…”
강유라가 혼잣말로 한탄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필웅은 입술을 비죽이며 강유라를 신경 쓰지 않고 짐을 풀기 시작했다. 먼저 필웅은 전화기를 연결해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응, 나야.”
“필웅이? 도착했어?”
전화기 너머로 시연의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루종일 옆에서 떽떽대는 강유라와 대화를 하다가 시연의 목소리를 들으니 필웅은 구원 받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응, 잘 도착했지. 저녁은 먹었어?”
“응, 방금. 집은 어때?”
“괜찮은 것 같아.”
“다행이다~ 주말에 한 번 갈게.”
“그래. 너무 무리하지 말고.”
“아니야~ 피곤하겠다. 얼른 짐 풀고 쉬어. 아, 아니다. 피곤할테니 짐은 그냥 나중에 풀고 쉬어.”
필웅은 웃으며 알았다고 대답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는 강유라의 이상한 시선을 느끼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뭐야?”
“정시연이야?”
“그래.”
“너네 둘, 사귀어?”
“뭐?”
필웅이 당황해서 얼굴을 붉혔다.
“아닌데.”
“아니라고?”
“아니야.”
“이사오자마자 전화질에, 전화하면서도 미소가 얼굴을 떠나지 않던데?”
“하루종일 투덜대기만 하는 너 보고 있다가 다른 사람 목소리 들으니 반가워서 그랬다. 어쩔래?”
“흐으응~ 정시연이 아니라도 그랬을까?”
“뭐, 뭔 소린지 모르겠고, 아무튼 난 간다.”
필웅은 괜히 말을 더듬으면서 휙 하고 돌아섰다.
“잠깐만. 같이 나가자.”
“왜 또?”
“밥먹을 거야! 배고프다고! 같이 먹자고 안 할 테니까 신경 꺼.”
필웅은 아무 말 없이 간단한 세면용품만 챙겨서 서류가방에 집어넣고는 현관문을 열었다.
현관문을 여니 아파트 단지의 너머 울창한 산과 논밭이 눈에 들어왔다.
필웅은 서울의 집에서는 보기 힘든 그 광경을 보고, 비로소 영산에 왔다는 것을 실감했다.
* * *
다음 날.
처음 출근한 필웅은 지청장에게 인사를 드린 후 각 방을 돌면서 영산지청의 검사들과 인사를 나눴다.
작은 규모의 지청이었기에 검사도 10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사건도 많지 않아 비교적 한산한 분위기였다.
사무실을 다 돌면서 인사를 드린 필웅은 비로소 자신의 사무실로 들어와 조사관과 인사했다.
“송도영이라고 합니다.”
“아, 예. 조필웅입니다.”
어색하게 인사를 나눈 둘은, 이내 각자의 자리에 앉아 묵묵히 일을 하기 시작했다.
필웅은 먼저 자신에게 배당된 사건들을 살펴 보았다.
규모가 작다 보니 서울남부지검처럼 부서가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수사검사와 공판검사가 엄격히 구분되는 것 같지도 않았고, 수사부서도 서울남부지검처럼 다양하지도 않았다.
필웅에게 배당된 사건들은 관내의 폭행 사건과 사기 사건 등 비교적 작은 사건들이었다.
필웅은 첫 날이고 하니 열심히 일에 임했다. 어찌나 열중했는지 밖이 어둑해질 때까지 한 번도 사무실 밖을 나서지 않을 지경이었다.
마침내 눈치를 보던 송도영 조사관이 슬쩍 필웅에게 물었다.
“저, 검사님.”
“예?”
“죄송한데 먼저 퇴근해 봐도 되겠습니까?”
“아, 그럼요. 먼저 들어가세요.”
“감사합니다.”
송 조사관은 꾸벅 인사를 하고는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섰다.
필웅은 그 후 한참 더 남아 일을 하다가 문득 허기를 느꼈다.
‘시연이 불러서 밥이나 먹을까.’
아무 생각 없이 시연에게 전화하려던 필웅은, 이내 여기가 서울남부지검이 아니라 영산지청의 작은 사무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
필웅은 풀죽은 표정으로 전화기를 내려 놓았다.
그래도 차를 타고 오면 금방 오갈 수 있을 거리인데, 생각보다 현실의 거리가 마음의 거리에 미치는 영향은 컸다.
필웅은 쓴 입맛을 다시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청 앞으로 나가 뭐라도 먹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필웅은 이내 자신이 너무 안이하게 생각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녁 9시 정도밖에 안 됐는데도, 지청 앞의 가게들은 대부분 불이 꺼져 있었다.
검사들도 일이 많지 않다 보니 일찌감치 퇴근하고, 딱히 외지에서 놀러 오는 사람들도 없다 보니 금방 장사를 파하는 모양이었다.
필웅은 터덜터덜 유일하게 불이 켜진 슈퍼로 들어갔다.
“어서오쇼.”
주인인 듯한 안경 쓴 대머리 할아버지가 그에게 인사했다.
필웅은 컵라면과 콜라를 사서 아무도 없는 사무실로 돌아와서 커피포트에 물을 올렸다.
잠시 후, 필웅은 아무 생각 없이 컵라면에 물을 부었다. 그런데 왠지 물이 미지근했다.
필웅은 눈썹을 찌푸리고는 커피포트의 물을 컵에 따라 보았다. 김이 거의 올라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커피포트가 고장난 모양이었다.
필웅은 참담한 심정으로 미지근한 물이 부어진 컵라면을 내려다 보았다.
‘다시 나가서 사올까?’
필웅은 왠지 그러면 더 비참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필웅은 여전히 딱딱한 컵라면 면발을 풀어 보려고 애쓰며 우드득 우드득 컵라면을 씹었다.
삼영그룹에 대항한 대가는 생각보다 컸다.
하지만 그것보다 필웅을 괴롭히는 것은 그가 지금 시연의 곁에서 떨어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시연은 언제쯤 죽게 되지? 누구로부터? 어떻게?’
2020년 당시 본 신문상 시연의 사망 추정일이 적혀 있기는 했지만, 정확하지는 않았다. 사망 후 바로 발견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 시기는 대략 2002년 6월 중순의 어느 날이었다. 지금이 2001년 말이니 기껏해야 6개월 정도밖에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럼에도 이 시기에 이런 변두리에 좌천되어 시연의 곁을 지킬 수 없다는 게 필웅은 초조해 미칠 지경이었다.
물론 그의 초조감과 실망감은, 오늘 저녁으로 먹으려고 했던 컵라면이 보기 좋게 망쳐진 데에서 오는 자괴감도 한몫했다.
필웅은 한참이나 컵라면을 뒤적거리다가 젓가락을 내려 놓고는 콜라를 집어 들었다. 콜라도 어느새 미지근해져 있었다.
“후우…”
필웅은 한숨을 쉬며 창밖을 내다 보았다.
- 부엉, 부엉.
어디선가 음침한 부엉이 소리만 들려왔다.
필웅은 가방을 집어 들고 집으로 향했다.
필웅은 집에 도착해 문을 열었다.
다행히 강유라는 다른 집을 구한 모양인지 집에 없었다. 필웅은 주문했던 거실 테이블과 침대가 들어와 있는 것을 보다가, 테이블 위에 놓인 쪽지를 발견했다.
네 테이블이랑 침대는 내가 받아 두고 간다. 이 멍청아!
받아 줄 사람도 없는데 배달만 시켜 놓으면 어쩌자는 거야?
연락할 일 있으면 아래 번호로 연락해.
강유라가 남겨 두고 간 쪽지인 모양이었다.
필웅은 테이블과 함께 배달된 소파에 주저앉아 손으로 얼굴을 쓰다듬었다. 일은 많지 않았지만 왠지 피곤했다.
맥주 한 캔이 간절했지만, 집 근처의 슈퍼도 오면서 보니 이미 문을 닫은 모양이었다.
‘TV라도 사야 하나…’
필웅은 문득 사무치는 외로움과 무력감을 느끼며, 그대로 소파에서 잠이 들었다.
다음 날, 필웅은 느지막히 출근해 의욕 없이 서류를 검토했다.
그 날 하루도 무기력하게 흘러갔다. 그 다음 날도, 다음 날도.
필웅은 점차 무기력해지고 있었다. 가끔 저녁에 시연이나 장경과 통화하는 것만이 삶의 낙이었다.
그나마도 시연이 원래 주말에 놀러 오겠다고 했지만,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 내려오지 못하게 됐다는 이야기를 막 들은 참이었다. 필웅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전화를 끊었지만, 울적한 기분을 지우기는 힘들었다.
그 때, 옆에서 눈치를 보고 있던 송도영 조사관이 말을 걸었다.
“저, 검사님.”
“예? 아, 말씀 안 하시고 퇴근 하셔도 되요.”
“아뇨, 그게 아니라… 요 앞에서 소주나 한 잔 안 하시겠습니까?”
“소주요?”
필웅은 흘긋 벽시계를 바라보았다. 시간은 이미 9시였다.
“이 근처는 보통 다 9시면 가게 닫지 않나요?”
“아아, 요 앞에만 가보셨구나. 토박이들 아는 술집이 있어요. 거기 가시면 되는데.”
필웅은 잠시 눈 앞에 쌓인 서류들을 고민스럽게 내려다 보았다.
이미 오늘 수십 번 검토한 서류들이었다. 사건 수가 적고 사실관계도 복잡하지 않다 보니 처리는 금방이었다. 그러다 보니 한 서류를 또 보고 또 보다 보니 거의 모든 사실관계를 달달 외울 지경이었다.
‘남은 일은 없다. 어쩐다…’
필웅은 원래 술을 많이 즐기는 성격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런 연고도, 지인도 없는 곳에 발령이 나서 며칠을 지내다 보니, 이제는 강유라라도 붙잡고 술이라도 먹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그런 와중에 주말에 기다리던 시연까지 오기 어렵다고 하니 외로움은 배가 되었다. 필웅은 그렇게 빠르게 고민을 마쳤다.
“가시죠. 제가 사겠습니다.”
필웅은 호기롭게 말하고는 송 조사관을 따라 나섰다.
* * *
“이야, 그러니까 검사님이 뭐냐, 자기 애를 암매장한 그 미친 여자를 잡아 넣었단 말이죠? PC방에서 아르바이트생 죽인 그 미친 놈이랑?”
술이 이미 거나하게 취한 송 조사관이 신기하다는 듯 필웅에게 물었다.
“그랬죠. 이 사건이 그렇게 유명한지 몰랐네요.”
필웅은 겸손하게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조금 우쭐한 기분이 되었다.
“아니, 그렇게 대단하신 분이, 어쩌다 이런 깡촌까지 오시게 된 겁니까?”
필웅은 살짝 취해 있었지만, 내밀한 이야기를 모두 털어 놓을 정도로 자제력을 잃지는 않았다. 필웅은 정신을 다시 한 번 가다듬고 말했다.
“뭐, 특별한 이유랄 게 있나요. 그냥 일상적인 발령이죠 뭐.”
송 조사관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더 이상 캐묻지는 않았다.
“그렇습니까. 너무 걱정 마십쇼. 여기도 지내시다 보면 생각보다 좋은 동네고, 생각보다 살기도 좋아요. 물론 서울처럼 재미있지는 않겠지만, 정 붙이고 살다 보면 다 사람 살 만한 데 아니겠습니까.”
필웅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술잔을 기울였다.
왁자지껄한 가게 밖으로 초승달만 처연히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