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영산에 온 걸 환영해
필웅은 뒤늦게 그 목소리의 주인을 기억해 내고는 깜짝 놀라 자기도 모르게 몸을 뒤로 조금 기울였다.
그 목소리는, 친숙하다기보다는 듣고 나면 불쾌한 쪽에 더 가까운 어떤 인물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최근 필웅이 들어볼 일이 별로 없었던 사람의 목소리였다.
“강유라?”
“쉿, 조용히 해.”
후드 밑에 언뜻 드러난 건 분명 강유라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강유라는 그녀답지 않게 무척 초조해 하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네가 여기 왜…?”
“빌어먹을, 목소리 좀 낮추라고.”
필웅은 얼떨떨해 하다가 목소리를 한껏 낮추면서 말을 이었다.
“이 버스는 왜 탄 거야?”
“이 멍청아, 널 만나려고 그런 거지. 왜겠냐?”
강유라는 초조해 보이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필웅을 윽박지르고 있었다. 필웅은 불쾌함을 느끼면서 대답했다.
“연락하려고 했을 때는 연락도 되지 않다가 갑자기 나타나서는 왜 신경질이야?”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어. 내 쪽 쳐다보지 말고 자연스럽게 이야기해.”
“아니, 사람도 얼마 없는 이 버스에서 대체 누가 본다고…”
“시키는 대로 하기나 해.”
필웅은 여전히 제멋대로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내두르고는 의자에 몸을 기댔다.
“어떻게 된 거야? 그룹 경영에서 물러났다는 게 사실이야?”
강유라는 화가 나서 참지 못하겠다는 듯 이를 갈다가, 입을 작게 열었다.
“너를 지원해 주던 걸 우리 할아버지한테 들켰어.”
“할아버지?”
“강중민 회장. 몰라?”
필웅은 아 하고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그간 조직 경영을 도맡아 하던 것은 주로 강유라와 그녀의 아버지인 강무완이었고, 강중민 회장은 일종의 명예직처럼 물러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아직 강유라의 조부가 살아 있다는 건 알았지만 딱히 그에게 관심을 기울이지는 않았다.
“강중민 회장이 아직 조직 경영에 관여 중인가?”
“외부적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결국 최종적인 중요한 결정은 여전히 할아버지가 내리고 있어. 할아버지는 내가 배후에서 아빠를 찌른 걸 알아채고는, 나도 모르는 새 나를 경영에서 배제할 준비를 밟아가고 있었던 거야.”
강유라는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내가 너무 방심했어. 영감탱이가 최근에는 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서 조직이 돌아가는 일에 어두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김 실장이 영감탱이의 끄나풀이었어.”
필웅은 강유라를 그림자같이 수행하던 체격 좋은 남자 비서의 모습을 떠올렸다. 예전 강유라가 필웅의 집에 찾아왔을 때도 그가 함께 있었던 기억이 났다.
“그랬군. 그래서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는 거야?”
“사실상 가택 연금 상태야. 오늘도 간신히 감시하는 놈들 따돌리고 이 버스를 탄 거야.”
필웅은 그런 그녀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왜 그 고생을 하면서까지 날 만나러 온 거야? 나도 지금 귀양 가는 길이라고.”
강유라가 처음으로 동요하는 기색을 보였다. 필웅이 그녀를 알고 나서 그녀의 그런 표정을 보는 것은 거의 처음이었다.
“후…나도 모르겠어. 지금 내가 기댈 수 있는 건 너밖에 없어. 내가 복권하기 위해서는 아빠와 영감탱이를 둘 다 잡아야 하는데. 떠오르는 게 너밖에 없었어. 네가 영산으로 발령났다는 걸 전해 듣고 급하게 따라온 거야.”
“너를 내가 도와줄 거라고 믿는 이유는?”
“되도 않는 밀당 하지마. 네가 영산으로 쫓겨 내려가는 이유도 결국 삼영과의 파워게임에서 졌기 때문이잖아?”
강유라가 날카롭게 내쏘았다.
“내가 삼영과의 파워게임에서 졌다고 하더라도, 그게 너를 도와 불법적인 일을 벌여도 된다는 이유가 되는 건 아니지.”
“누가 불법적인 일을 하래? 너는 네 할 일을 해. 이제까지 해왔던 것처럼 우리 아빠와 할아버지의 더러운 비리들을 들춰내서 고발하라고. 나는 그걸 도와주겠다는 거야.”
필웅이 자세를 고쳐 앉으면서 흥미를 보였다.
“뭔가 알고 있는 게 있나?”
강유라는 지그시 입을 닫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했다.
“아직은 나도 조사 중이야. 내가 알기로는 아빠와 할아버지가 나 몰래 다른 조직과 손을 잡고 불법적인 일을 벌여 온 정황이 있어.”
“무슨 조직?”
“그걸 모르겠어. 다른 회사일 수도 있고 그냥 단체일 수도 있어.”
“하지만 그런 정도의 일만으로는 강무완을 실각시키지 못해. 무려 살인을 지시했는데도 버젓이 밖에 나와 돌아다니는 인간이라고…”
필웅이 약간 실망스러운 기색으로 말했다. 강유라는 진지하게 고개를 가로젓고는 대답했다.
“그냥 그런 회사 비리 정도가 아니야. 이건 내가 알기로 이건 훨씬 더 거대한 차원의 일이야.”
강유라는 잠시 말을 멈추고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이 나라 자체가 위험해질 수도 있는 일이라고.”
필웅은 잠시 그 말의 무게감을 느끼며 침묵했다. 강유라가 그냥 과장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강무완이 해왔던 일보다 더 큰 음모라니,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았다.
“일단 잘 알겠어. 너는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야?”
강유라는 답답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하다가 말했다.
“일단은 다시 집으로 돌아가진 않을거야. 집으로 돌아갔다간 나나 할아버지가 해골이 되는 날 전에는 밖으로 나오지 못하겠지. 은신처를 찾아 볼거야.”
“갈 데는 있고?”
“이제부터 알아 봐야지. 영산은 어떤 곳이야?”
강유라가 갑자기 호기심에 가득찬 눈으로 필웅을 돌아보며 물었다.
필웅은 처음으로 강유라가 20대라는 나이에 걸맞는 생기 있는 표정을 짓는 것을 보고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모든 것을 다 잃고 나서야 비로소 사람은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건가.’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필웅은, 아는 대로 영산에 대해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영산은 별로 인구가 많지는 않은 도시야. 주로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고, 공장 같은 것도 별로 없어. 서울에서 비교적 가까운 편이긴 하지만 서울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도시지.”
“오, 텍사스 같은 느낌인가?”
“거기에 가 본 적은 없지만 그렇지는 않을 거야.”
강유라는 묘하게 들떠 보였다. 무사히 갇혀 있던 집에서 탈출했다는 것과 새로운 도시에 가고 있다는 점 둘 다에 신나하는 것 같았다.
“잠깐만. 영산에 숨어 있을 셈이야?”
강유라가 필웅을 다시 돌아보았다.
“왜, 그러면 안 돼?”
“아니…뭔가 숨을 곳을 제대로 찾아본 것도 아니고. 연고가 있는 것도 아니고. 가 본 적도 없는 도시에 그냥 가서 살겠다고? 이 버스를 탔다는 이유만으로?”
“영산엔 네가 있잖아?”
강유라가 무슨 소린가 했다는 듯이 흥미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띄웠다. 강유라는 그대로 눈을 감고는 의자를 뒤로 한껏 젖힌 채 잠이 들어 버렸다.
필웅은 기가 막힌 채로 예전 가장 무서운 적 중 하나였던 여자가 자는 모습을 내려다 보았다.
“무슨 애가 이렇게 지 맘대로야?”
“아직 잠 안 들었다.”
강유라가 눈을 감은 채 또박또박 대답했다.
필웅은 조금 무안함을 느끼며 헛기침을 하곤 창밖을 바라보았다.
- 영산: 15km
영산으로 가는 표지판이, 영산 시가 가까워 옴을 알려주고 있었다.
* * *
늘어지게 자고 난 강유라는 버스에서 내리며 크게 기지개를 켰다.
“하아암~ 잘 잤다!”
필웅은 짐을 갖고 조금 늦게 내리면서 강유라에게 물었다.
“너 뭐야? 짐 같은 거 없어?”
강유라는 작은 가죽 배낭 같은 것만 메고 있었고, 그 외에 다른 짐은 없었다.
강유라가 어이없다는 듯 쏘아붙혔다.
“탈출도 간신히 한 건데, 바리바리 짐까지 싸들고 오게 생겼어?”
“그럼 뭐 어쩌겠다는 거야?”
“옷이랑 생필품이야 사면 되잖아? 여기, 백화점은 어디지?”
강유라가 터미널에서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필웅이 기운빠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영산에 백화점 같은 건 없어.”
강유라가 인상을 찌푸리며 필웅을 돌아보았다.
“뭐? 무슨 헛소리야?”
“정말이야. 네가 보고 있는 게 영산에서 가장 큰 상권일걸.”
강유라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터미널 앞에 북작북작 모여 있는 작은 상가들을 돌아보았다.
“이게? 이걸 상권이라고 하나?”
당혹스러워 하는 강유라를 보며 필웅은 왠지 모를 심술궂은 쾌감을 느꼈다.
“영산에 온 걸 환영해. 나도 처음이지만.”
필웅은 어쩔 줄 몰라하는 강유라를 그대로 지나쳐 택시 승강장 쪽으로 걸어갔다.
“야, 잠깐만. 같이 가야지!”
“뭐? 내가 왜 너랑 같이 가?”
“오늘은 잘 데가 없단 말이야. 하루만 재워 줘.”
필웅은 자기도 모르게 짐을 툭 놓쳐 떨어트리고는 경악에 찬 표정으로 물었다.
“뭐!? 내가 너를 왜 재워 줘?”
“방 남을 거 아냐?”
“아니, 방 개수가 문제가 아니고! 너 돈 많잖아? 아무 데서나 그냥 자!”
“백화점도 없는데 그럼 이런 시골에 깨끗한 방도 있을 리 없잖아?”
“지금 네가 찬 거 더운 거 가릴 때냐!”
“이게…진짜 치사하게 구네. 알았어! 니 맘대로 해!”
강유라는 씩씩거리며 터미널 저 편으로 발을 쿵쾅쿵쾅 구르며 걸어갔다.
“잠깐만.”
필웅이 그녀를 뒤에서 불렀다.
“왜?”
“일단 오늘은 우리 집 가서 자. 내가 나가서 잘 테니까.”
“그래도 돼?”
강유라는 언제 화를 냈냐는 듯 반색하며 슬금슬금 다가왔다.
“이럴 때는 그래도 되냐고 묻는 게 아니라 네가 주인인데 왜 밖에 나가서 자냐고 말리는 척이라도 해야 되는 거야.”
“하지만 그러다가 정말로 아 그렇지 네 말이 맞구나~ 하고 나보고 나가라고 하면 어떡해?”
강유라가 궁금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필웅은 도대체 오늘 하루 얼마나 더 어이가 없어야 하는지 궁금하기 시작했다.
“됐다, 됐어. 일단 집에 내 짐만 놓고 나올 테니까 집에 들어가서 자. 대신 내일부터 바로 네가 살 집을 알아봐야 해. 알았어?”
“좋아. 나도 안 봐도 뻔한 네 방 같은 데 오래 머무를 생각은 없어.”
“이럴 때도 그냥 고맙다고 대답하는 거야.”
“너도 내게 원하는 게 있어서 양보하는 건데, 내가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필웅은 화를 벌컥 내려다가, 그녀의 말이 딱히 틀리지는 않다는 걸 마음 속에서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필웅이 강유라에게 먼저 방을 양보한 건, 물론 아주 약간은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랐을 강유라가 잘 곳도 구하지 못한 채 떠도는 걸 두고 보긴 불편했기 때문이기는 했다.
그러나 실제 주된 이유는, 일단 강유라를 어떤 식으로든 도와 줘서 마음의 빚을 만든 뒤 그녀가 보다 적극적으로 강무완과 강 회장의 비리를 조사하도록 요구하기 위해서였다.
어쨌든 지금 강유라는 집도 절도 없이 떠돌아야 하는 신세고, 당장 도움을 줄 수 있는 것도 필웅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하루, 또는 단 며칠이라도 잘 곳을 마련해 준다면 강유라의 보다 적극적인 협조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라는 것이 필웅의 생각이었다.
물론, 강유라를 눈에 미치는 거리에 두고 관찰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크흠, 도대체가 고마운 기색이라고는 하나도 없군. 뭐 좋아. 일단 집으로 가자. 나도 그 근처에서 잘 곳을 알아봐야겠어.”
“나 배고픈데.”
강유라가 뚱한 표정으로 걸음을 멈추고는 말했다.
필웅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나는 네 유모가 아니야. 밥 정도는 알아서 챙겨 먹어.”
“같이 먹으면 되잖아?”
“싫어.”
“뭐가 싫은데?”
“너랑 둘이 밥을 먹는다는 상황 자체가.”
강유라는 고개를 몇 번 갸웃하더니 말했다.
“뭐, 좋아. 예전의 적과는 밥조차 먹지 않는다는 건가. 사업가들 마인드랑은 다르네. 집으로나 안내해.”
“…”
필웅은 벌써 집에서 재워주겠다는 제안을 한 것이 후회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