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다시 돌아가야 해
필웅은 사무실에 앉아 머릿속에 채워진 최근 필웅의 기억들을 떠올려 보고 있었다.
필웅과 시연은 1998년이 끝나갈 무렵 강무완을 구속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강무완의 저항은 완고했다. 재판도 계속해서 질질 끌기 일쑤였고, 계속해서 이런 저런 새로운 증거들을 들이밀며 사실들을 부인했다.
결국 1심에서는 유죄가 인정되었다. 그러나 강무완은 항소했고, 항소심 재판만 거의 3년째 진행 중이었다. 그 후 강무완은 구속에서도 풀려 나와 사실상 자유의 몸이 되어 정상적으로 회사 업무까지 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강유라가 그 후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강유라가 TV 등에 나타나는 빈도도 현저히 줄어들었다. 마치 삼영에 강유라라는 인물이 없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필웅도 그녀에게 연락을 시도해 보았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다. 삼영패션도 명목상으로는 여전히 강유라가 사장이었지만 다른 임원이 그녀를 대신해 사실상 모든 업무를 보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검사님, 이사하셨담서요!?”
사무실 문이 벌컥 열리며 장경이 반갑게 뛰어들어왔다.
“아…예. 지난 주말에.”
“이런! 일찍 알려 주셨으면 저랑 다혜가 가서 도와드렸을 것인디.”
“괜찮습니다. 시연이랑 둘이 하니까 금방 하더라구요.”
“그랬습니까? 그럼 다행이고. 이상하게 오늘 검사님 보니까 되게 반갑네요.”
“저희 며칠 전에도 만나지 않았나요…?”
“기분이 그렇다는 검다, 기분이.”
장경이 싱글벙글 웃으며 소파에 앉았다.
장경은 2년쯤 전 다혜와 결혼을 했다. 얼마 전에는 아이도 태어난 모양이었다.
그 후 장경은 항상 거칠게 인상을 쓰고 다니던 무서운 형사에서 항상 허허 웃는 사람 좋은 아저씨 같은 인상으로 바뀌었다.
다혜는 육아휴직을 해서 주로 집에 있는 모양이었지만, 몸이 근질거려 빨리 현장을 뛰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는 듯했다.
필웅이 미소 지으며 물었다.
“아이는 잘 큽니까?”
“그럼요. 얼마나 귀여운데요.”
그 때 잠시 나가 있었던 주 계장이 돌아왔다.
“검사님, 이규필 차장님이 찾으십니다.”
필웅은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박 형사에게 말했다.
“어쩌죠? 잠깐 가봐야 될 것 같은데. 뭐 할 말 있어서 오신 거 아니에요?”
“아, 아뇨. 검찰청 왔다가 잠깐 들른 겁니다. 언제 소주나 한 잔 하시죠. 애 봐야 되서 언제 시간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러시죠.”
필웅은 장경에게 인사하고는 이 차장의 방으로 찾아갔다.
-똑똑.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가니 이규필 차장이 혼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음…그랬지. 일단 앉아봐.”
이규필 차장이 필웅에게 자리를 권했다.
“자네, 이번에 발령이 났어.”
“예? 어느 부서로요?”
“어느 부서가 아니야.”
이규필 처장이 짐짓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인사발령 내용이 담긴 공문을 필웅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필웅은 왠지 그가 착잡한 표정 뒤에서 싱글벙글 웃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영산 시요?”
“응. 경기도 영산지청이라는 곳이야.”
필웅은 혼란에 빠져 물었다.
“갑자기 왜…? 지금 강무완 사건 진행 중인 거 잘 아시지 않습니까?”
“알지, 나야 아는데…뭐 발령이 그렇게 나온 걸 내가 어쩔 도리가 있나.”
이 차장이 쩝 하고 입맛을 다시면서 말했다.
“잠깐 가서 좀 쉬고 있어. 내가 곧 꺼내 줄 테니까.”
“하지만…!”
“어허. 조직의 명령에 불복이라도 할 셈인가? 너무 걱정하지 마.”
필웅은 공문을 꽉 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 부장의 사무실에서 나와 다시 사무실로 돌아온 필웅은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었다.
‘이런 빌어먹을! 대체 왜 돌아오자마자 이딴 일이 발생하는 거야!’
조심스럽게 필웅의 눈치를 살피던 주 계장이 입을 열었다.
“저…검사님. 발령 새로 나셨다고…”
이미 그의 발령 소식이 실무관들 사이에도 쫙 퍼진 모양이었다. 필웅은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고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발령…제가 인사처에 지인들한테 좀 물어보니 이규필 차장님이 신청하신 거라고…”
필웅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면 그렇지.’
이규필 차장의 짐짓 안타까워 하는 가식적인 표정이 눈가에 어른거렸다. 그가 필웅을 눈엣가시로 생각하면서도 앞에서는 마치 그를 보호하려고 노력한다는 듯한 모양새가 보기 가증스러웠다.
그가 지금도 여전히 강무완의 편인지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떤 식으로든 삼영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은 분명했다.
필웅은 이제 이규필 차장에 대한 희망을 모두 버리기로 했다.
‘어떻게 보면 대놓고 악행을 벌이는 삼영그룹 일당들보다 더 위험한 인간이야…’
심지어 그는 필웅의 상사였고, 검찰에서 중책을 맡고 있었다. 이규필 차장이 그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위험성은 삼영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이를 어떡한다…’
영산 시는 경기도에 있는 한적한 도시였다. 경기도이긴 했지만 서울에서 차로 가도 1시간에서 1시간 반 정도는 걸리는 곳이라고 했다.
그런 곳에 있는 지청으로 발령이 나면, 삼영그룹의 사건들을 다루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컸다. 사실상 이 부장이 그의 손발을 잘라내 버린 셈이었다.
필웅이 한참 고민에 빠져 있을 때, 시연이 사무실에 들어왔다.
“이게 무슨 소리야? 갑자기 발령이라니? 이사까지 했는데?”
시연이 다급하게 물었다. 필웅이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규필 차장이 손을 쓴 것 같아. 내가 더 이상 삼영그룹 사건에 관여하지 못하게 하려는 수작이겠지.”
“아니, 검찰이 이래도 되는 거야? 무슨 삼영 하청업체야 뭐야?”
시연이 흥분하며 언성을 높였다.
“진정 좀 해.”
“지금 진정하게 됐어?!”
“화를 내도 상황이 바뀌는 건 없잖아. 일단 나도 거기서 최대한 돌아올 수 있게 노력해 볼게.”
“그치만…!”
“일단 내가 없는 동안 삼영그룹 사건들 잘 맡아줘. 물론 나도 내려가서도 계속 조사할 거지만. 잘 할 수 있지?”
시연은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다는 표정이었지만, 필웅의 말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삼영그룹 건은 걱정하지 마.”
“고마워. 후…”
일단 시연을 진정시킨 필웅이었지만 스스로도 어찌할 바를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새로운 부임지에 발령을 받는 것이 두렵지는 않았지만, 누가 봐도 목적이 뻔한 발령이었기 때문이었다.
“일단은 갈 수밖에 없나…”
필웅은 착잡하게 혼잣말을 하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비가 오려는 듯 먹구름이 꾸물꾸물 몰려들고 있었다.
* * *
일주일 후.
필웅은 무거운 짐은 먼저 미리 구해둔 영산 시의 집에 보내 두고, 가벼운 짐들만 챙겨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장경과 시연도 그를 배웅하기 위해 터미널에 나와 있었다.
“어디 멀리 가는 것도 아닌데 뭘 배웅까지 나와.”
필웅이 애써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시연과 장경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검사님…”
“내가 빨리 돌아올 수 있게 뭐라도 해 볼게!”
“아서라, 너는 사건이나 잘 처리하고 있어. 어떻게 돌아올지는 내가 고민해 볼 테니까.”
필웅은 시연을 만류하며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검사님…가는 길에 이거라도 좀 드십쇼.”
장경이 뭔가를 내밀었다. 손수 싼 듯한 김밥 도시락이었다.
“형사님이 이걸 쌌다구요?”
“예에? 아니죠, 안사람이 싸 준 검다. 애 때문에 못 나와봐서 아쉽다고…”
“아, 그렇군요. 다혜 씨한테도 잘 먹겠다고 전해 주세요.”
“자주 놀러 가겠슴다!”
“바쁘신데 뭘 자주 놀러와요. 각자 맡은 자리에서 일이나 열심히 하고 있다 보면 기회가 또 오겠죠.”
필웅이 약간 허탈한 기분을 느끼며 말했다. 필웅은 더 있다가는 신세한탄이나 하게 될 것 같아 짐짓 밝은 표정으로 인사를 건넸다.
“자, 이제 저는 가 보겠습니다!”
시연의 눈에 어느새 눈물이 글썽이고 있었다.
“잘 가. 도착하면 연락하고. 내가 알려 준 호신술 기억하지?”
시연이 애써 장난스럽게 필웅의 팔을 툭 쳤다.
“살펴 가십쇼, 검사님.”
시연과 장경을 뒤로 하고 필웅은 고속버스 쪽으로 향했다.
그가 자리에 앉자 기사는 시계를 한 번 살피더니 바로 버스를 출발시켰다.
영산으로 가는 길.
필웅은 창가로 스쳐 지나가는 산과 숲이 점점 울창해지는 것을 보며, 새삼 서울이라는 도시를 떠나고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필웅은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아무 생각 없이 김밥을 하나씩 집어 먹다가 생각에 잠겼다.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
물론, 영산지청에 가서도 그에게 일이 맡겨질 것이고, 필웅은 어떤 일이라도 잘 처리할 자신은 있었다. 작은 일들이라도 중요하다는 것을 그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 때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온 삼영그룹의 사건을 끝까지 처리할 수 없다는 것은 아쉬웠다. 그 곳에서도 기회가 있다면 사건에 참여하고 싶었지만, 아마도 그럴 기회는 주어지지 않을 터였다.
물론 필웅도 시연이 삼영그룹의 사건을 잘 수사해 줄 것을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강무완은 궁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인간이었다.
그런 자와 맞서기 위해서 동료는 하나라도 더 있는 편이 나았다. 필웅은 지금 자신의 처지로 인해 시연에게 그런 동료가 되어줄 수 없다는 점이 안타까웠다.
‘게다가 시연은…’
그가 영전으로 돌아갔을 때 본 미래에서 시연은 사건 수사 도중 사망했다. 아마도 분명 삼영그룹 일당과 관계가 있을 것이었다.
그런 시연의 곁에서 그녀를 지켜줄 수 없다면 필웅으로서는 다시 돌아온 의미가 없는 셈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시 돌아가야 해!’
잠시 후, 버스는 한 휴게소에서 멈춰섰다. 주유가 필요한 모양이었다.
필웅은 잠시 나가 기지개를 펴고 스트레칭을 하다가, 휴게소를 조금 둘러 보았다. 필웅은 휴게소에서 핫바를 사서 자리로 돌아왔다. 마음이 허해서 그런지 방금 막 장경이 건네 준 도시락을 다 비웠지만 여전히 배가 출출했다.
뜨거운 핫바를 호호 불며 한 입 베어물던 필웅의 눈에 이상한 것이 들어왔다.
비어 있던 그의 옆자리에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버스에는 남는 좌석 여유가 있었기에 굳이 옆자리에 와서 같이 앉을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필웅은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필웅은 슬쩍 얼굴을 살펴 보았지만, 후드를 푹 눌러쓰고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서 정확히 얼굴은 알아볼 수 없었다.
필웅은 별 일 아니겠지 싶어 자리에 앉아 핫바를 마저 베어 먹기 시작했다.
옆에 앉은 사람은 고개를 푹 숙이고 앉아 아무 말도 없었다. 필웅은 옆의 사람이 신경 쓰였지만 억지로 얼굴을 살펴볼 수도 없는 일이니 그저 묵묵히 핫바만 씹어 삼켰다.
이윽고 버스가 출발했다.
옆의 사람은 여전히 자리로 돌아가거나 내리지도 않고 그 자리에 계속 앉아 있었다. 그 사람이 처음 필웅이 탔을 때부터 타 있었는지, 아니면 휴게소에서 몰래 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필웅은 만약 휴게소에서 몰래 차를 훔쳐 탄 거라면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막 옆의 사람에게 말을 걸려는 순간이었다.
그 사람의 입이 먼저 열렸다.
“조필웅. 나야.”
필웅은 기억이 희미한 가운데 그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였다. 하지만 친숙하지는 않은 목소리.
한참이나 혼란에 빠져 옆에 앉아 있던 사람을 주시하던 필웅은, 순간 그 목소리의 주인을 기억해 내고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