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절 돌려보내줘요
“정시연이…죽었다고?”
“예, 변호사님. 옛날 기사긴 한데 혹시 관련이 있나 해서 뽑아와 봤는데요…”
자세히 보니 2002년의 기사였다.
“감사합니다. 이따 다시 말씀 드릴게요.”
영전은 충격에 빠져 손짓으로 비서를 내보냈다.
은전차사가 앉아 있다가 물었다.
“무슨 일인데?”
영전이 아직도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다가 대답했다.
“제가 모시던 변호사님이…죽었답니다.”
“시간선이 바뀌었으니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지.”
“하지만…! 이래서는 안 됩니다. 이래서는 안 되는 거란 말입니다.”
영전이 갑자기 격하게 일어나서 은전차사에게 성큼성큼 걸어왔다.
은전차사가 조금 위축된 듯 의자 채로 뒤로 조금 물러나며 말했다.
“왜… 왜 이래?”
“왠지 그런 느낌이 들어요. 이 사람은 저렇게 그냥 죽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사람이라는 기분이 든다구요.
당신 말대로 제가 과거에 가서 사건들의 흐름을 뒤바꿔 놨고 그 결과 이 사람이 죽은 것 같아요.”
“시간선의 개념이 잘 이해가 되지 않나 본데, 네가 그대로 죽은 시간선의 정시연은 아직 잘 살아 있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내가 있는 시간대는 여긴데!”
은전차사가 피곤하다는 듯 인상을 쓰며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뭘 어떡하고 싶은데?”
영전이 멈칫했다. 그도 사실 뭘 어떻게 해야겠다는 구체적인 계획이나 구상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에게는 어떤 확신이 있었다.
정시연이 죽어서는 안 된다는 것.
그녀를 구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가 잃어버린 기억들 속에 그가 그렇게 해야만 하는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일단 제가 조필웅으로 살던 시절의 기억들을 되돌려 주세요.”
“그런다고 뭐가 바뀔 리가…”
“부탁입니다!”
영전은 간곡하게 부탁했다. 은전차사는 영전이 그를 또 협박할 거라고 생각하다가 조금 의외였는지 조심스럽게 알았다고 대답했다.
“음…됐어.”
영전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정말 뭐가 된 것 맞냐고 물으려는 찰나, 갑자기 머릿속에서 번개가 치는 것처럼 순간 시야가 새하얘졌다.
다음 순간, 그는 조필웅으로 살던 시간의 기억들이 다시 돌아와 있는 것을 깨달았다.
조금 혼란스러웠지만, 한 몸에 두 개의 기억이 공존하는 것을 처음 겪어본 것이 아니었기에 영전은 금방 그 기분에 익숙해졌다.
“다 됐지? 나는 간다. 전에 얘기했듯 은방울을 한 번 흔들 때마다 한 개의 부탁을 들어줄거야.”
영전이 뭐라고 채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은전차사는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자리를 묵묵히 지켜보던 영전은, 잠시 후 방울을 꺼내 흔들었다. 방울이 또 하나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방울을 신기하게 쳐다보던 영전의 눈앞에 다시 은전차사가 나타났다.
“뭐야? 실수로 흔든 거라도 다 차감된다.”
“절 과거로 돌려보내줘요.”
“그래, 그거야 어렵지 않… 뭐라고?”
건성으로 영전의 이야기를 듣던 은전차사가 갑자기 눈을 크게 뜨고 영전 앞의 책상을 두 손으로 내리쳤다. 물론 소리는 나지 않았다.
“소리가 나지 않으니까 느낌이 안 사는군.”
“제가 필웅으로 살았던 시절로 돌려보내줘요. 1998년으로.”
“무슨 미친 소리야?”
영전이 진지하게 은전차사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제가 거기에 갔기 때문에 시간선이 다 바뀌어 버린 거잖아요. 제가 바로잡아야 해요.”
“아니, 너는 무슨 내가 문과형 타임머신 같은 거라고 생각하냐? 네가 원하면 다 보내줘야 해?”
“은전차사도 이 일에 책임이 있는 거 아닙니까? 이렇게 시간선을 바꿔 놓아도 괜찮은 건가 보죠?”
은전차사가 자꾸 난처한 기색을 표하자 영전이 눈을 크게 뜨고 대들었다.
“아니…그건…”
“제발…부탁입니다.”
영전은 말하며 의자에서 내려와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은전차사는 더 당황해서 펄쩍 뛰었다.
“야, 왜 이래?”
“시연이는…그렇게 죽을 애가 아니에요. 제발 제가 가게 해 주세요.”
영전은 그대로 거의 엎드릴 기세로 무릎을 꿇은 채 이야기했다.
원래 그가 무릎을 꿇은 건 은전차사를 당황시키기 위해서였다. 은전차사가 난처할 정도로 저자세를 취하면 오히려 부탁을 잘 들어줄 것 같아서였다. 소위 ‘미리 깔고 들어가는’ 전략이었다.
하지만 무릎을 꿇은 채 시연을 생각하니, 영전의 눈에 왠지 모르게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비록 이 시간대에서 그녀가 죽은 것은 먼 옛날의 일이지만, 눈 앞의 그녀가 죽은 것처럼 가슴이 아팠다.
그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지자, 은전차사는 더 안절부절 못하기 시작했다.
“넌 또 왜 울어? 아 참 나 정말 미치겠네. 아니, 그럼 네가 과거에 가 있는 동안에 네 몸은 어떡하란 말이야?”
“정말 몰라서 물어보는 겁니까? 제가 조필웅으로 거의 1년을 살았어도 여기서는 시간이 거의 흐르지 않았잖아요? 칼에 찔린 사람이 며칠 쉬겠다고 사라진다고 누가 신경이나 쓰겠어요?”
은전차사는 최후의 수단조차 바로 논박당하자 끄응 하며 신음소리를 냈다.
“좋아. 단!”
“단?”
“거기 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어. 잘 생각해.”
영전은 한 번 심호흡을 했다.
“각오는 되어 있습니다.”
“좋아. 오늘 밤 집에 돌아가 잠이 들면 과거로 보내 주지. 정시연이 죽기 전으로.”
“감사합니다.”
“인간들은 도대체가 이해할 수가 없군…”
은전차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사라졌다.
영전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는 의자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긴 여행을 앞두고 있었지만, 딱히 준비할 것도 없는 여행이었다.
* * *
그날 밤.
영전은 집에 돌아와 있었다. 영전은 조심스럽게 침대에 몸을 뉘였다.
잠이 들어야 했지만 희한하게 눈이 말똥말똥 떠져서 감기지가 않았다.
‘정말 잘하는 짓일까?’
그 날 그가 하루종일 고민한 주제였다.
막상 가서 돌아오지 못한다면, 지금의 삶 이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 좋은 집, 좋은 직장, 약속된 미래, 그 모든 것을.
그리고 가서 과연 그가 무엇을 어떻게 막아야 하는지도 감이 오지 않았다.
조필웅으로서 살던 마지막 날, 그는 분명 강무완 사장을 구속시켰다. 그러나 현재 그는 삼영그룹의 회장이 되었고, 심지어 마약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던 강준수는 명실공히 삼영의 2인자로 부상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강유라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뭔가…뭔가 잘못됐어.’
어떤 이유에선지 강무완에 대한 수사가 중단되었고, 강유라는 그룹에서 축출당했으며, 그 과정에서 정시연도 살해당했을 수도 있었다.
‘비록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막아야 해.’
영전은 마음을 굳게 먹고 눈을 감았다.
또 한 번, 시간이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뜨니 아침이었다.
하지만 장소는 영전이 잠들었던 그 침대가 아니었다.
이제는 익숙한, 필웅의 자취방이었다.
다시 필웅이 된 영전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보았다. 약간 어색했지만, 금방 적응됐다. 필웅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벽에 걸린 달력을 보니, 연도가 이미 바뀐 모양이었다. 연도는 이미 2001년이었다.
필웅은 자신이 떠난 직후로 돌아왔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것 저것 가릴 만한 처지가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필웅은 슥 방 안을 둘러보았다. 방 안에는 박스들이 가득했다. 아직 기억이 채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기에, 필웅은 무슨 상황인가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창문을 통해 밖을 보니 아직 이른 아침인 듯했다.
필웅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아무 생각 없이 밖으로 나왔던 필웅은, 보이는 광경에 헉 하고 숨을 들이쉴 수밖에 없었다.
“이게 뭐야…?”
다닥다닥 수없이 붙어 있던 집들 중 절반 이상이 철거되어 있었고, 그 자리는 황량한 땅바닥만이 드러나 있었다.
필웅은 황급히 1층으로 내려왔다. 그가 사는 집의 1층 담벼락에도 빨간 색 스프레이로 ‘철거 예정’이라는 글씨가 삐뚤빼뚤 쓰여 있었다.
‘가만…그러고 보니 나도 여기서 이사할 예정이었지.’
필웅의 기억이 점차 다시 채워지기 시작하면서 필웅은 비로소 상황을 이해했다.
그가 살고 있는 동네는 한창 재개발이 진행 중이었다. 필웅의 집 역시 예외는 아니었고, 필웅은 오늘을 마지막으로 다른 집으로 이사가기로 했었다.
그리고…
“필웅! 일찍 일어났네?”
편한 운동복 차림의 시연이 나타나 반갑게 인사했다.
“시연이…?”
“얘가 또 왜 이래. 오늘 이사하는 거 도와주기로 했었잖아~ 난 짜장면 곱빼기 시켜줘야 된다?”
시연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옥상에 올라가는 계단으로 향했다.
잠시 멍하니 멈춰서 있던 필웅은, 눈 앞으로 그녀가 지나가자 자기도 모르게 그녀를 뒤에서 꽉 끌어안았다.
“!?”
시연이 놀라움과 당황이 가득한 눈으로 필웅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필웅은 그대로 눈을 감은 채 그녀를 안고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왜 그래… 깜짝 놀랐잖아.”
그렇게 말하는 시연의 얼굴에는 말의 내용과 달리 미소가 점점 번지고 있었다. 시연이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다행이야…”
“뭐가?”
“그냥…다. 정말 다행이야.”
필웅은 물론 시연이 죽기 전의 시간대였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눈 앞에 생생하게 살아 있는 그녀를 보니 비로소 안도감이 들었다.
그가 자신이 시연을 꽉 안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필웅은 놀라서 팔에 힘을 풀었다. 하지만 시연은 그의 품에서 바로 빠져나오지는 않았다.
“뭐래, 바보 같은 게…”
시연은 한참 그러고 있다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그제서야 필웅의 품을 빠져나왔다. 잠시 동안 필웅과 시연은 서로 머쓱해하며 허공만 바라보았다.
“그, 그래. 얼른 끝내고 짜장면 먹을까? 배고프다.”
“그, 그럴까?”
둘은 여전히 어색한 채로 서로를 훔쳐보며 계단을 올랐다.
“짐은 다 쌌어?”
“뭐, 대충.”
“이삿짐 트럭은 불렀고?”
“응. 좀 이따 이삿짐 센터에서 와서 짐마저 싸는 거 도와 주고 실어 갈거야. 굳이 도와 주러 안 와도 된다니깐…”
“그래도 조필웅이 검사 달고 처음으로 이사하는 건데 내가 그 집 첫 번째 손님이 되어 줘야지!”
시연이 언제 어색했냐는 듯 싱글벙글 웃으며 박스에 테이프를 감았다.
필웅은 왠지 마음이 놓였다. 시연이 이렇게 밝고 건강하게 살아 있는 게 그저 기뻤다.
‘앞으로 무슨 일이 닥치든, 내가 그걸 막으면 되니까.’
하지만 필웅으로서도 앞으로 무슨 일이 발생하는 것인지 예측할 수는 없었다.
나영전으로 돌아갔을 때 시연의 죽음에 대한 진상을 알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조사해 보았지만, 워낙 옛날의 사건인 데다가 관련 기사 등도 별로 없어 결국 왜 그녀가 죽었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검사가 살해당한 사건이라고 하여 처음에는 대서특필됐지만, 이내 누군가가 기자들의 입을 막기라도 한듯 금방 기사가 뜸해지더니 1개월도 지나지 않아 모든 기사가 끊겨 버렸다.
“뭐해? 멍때리지 말고 빨리 짐 싸.”
시연이 핀잔을 주며 테이프를 다 감은 박스를 옆으로 밀었다. 필웅이 슬쩍 보니 딱 봐도 얼기설기 감은 박스였다.
“야, 이렇게 하면 이삿짐 집어 던질 때 박스 다 터진다구.”
“무슨 소리야? 얼마나 튼튼하게 감았는데?”
필웅은 어이없어하며 끝이 덜렁덜렁한 테이프들을 내려다 보았다.
‘이거, 생각보다 오래 걸릴 수도 있겠는데.’
필웅은 고개를 흔들고는 시연이 부실하게 테이프를 감아 놓은 박스들을 다시 앞으로 가져와 테이프를 붙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