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사로 개과천선-79화 (79/151)

79화 그런 분은 안 계시는데요

< 2부 >

“영전 씨! 나영전 씨! 제 말 들리세요?”

다시 한 번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전은 잠시 얼떨떨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간호사 한 명이 걱정스럽게 그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영전은 그녀와 눈이 마주치고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환자분?”

“예? 아, 예?”

영전은 소스라치게 놀라 대답했다.

영전은 일어서서 앉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 순간 찌릿하고 옆구리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영전은 큭~하고 신음소리를 내며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리고 허리를 숙였다.

“앗, 아직 일어나시면 안돼요.”

간호사가 놀라서 다가오며 그를 다시 천천히 자리에 눕혔다.

“다행히 급소를 피해갔고 상처도 얕아 생명에 큰 지장은 없었지만 당분간은 무리하시면 안돼요.”

영전이 스윽~ 환자복을 올려 옆구리를 보니 옆구리에 찔린 상처는 이미 봉합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골목에서 남자에게 습격당한 후, 다행히 급소를 찔리지 않아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모양이었다.

‘가만, 그런데 그게 다인가?’

영전은 왠지 골목에서 남자에게 칼에 찔리고 나서 무언가 긴 꿈을 꾼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길고, 때로는 힘들었고, 때로는 보람찬 시절에 관한 꿈이었다.

영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리에 가만히 누웠다.

‘뭔가… 내가 내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이었어.’

잠시 상념에 빠져 있던 영전이 아직 병실에 남아 다른 환자를 보고 있던 간호사에게 물었다.

“실례지만 제가 여기 온지 얼마나 됐죠?”

“한 이틀 정도 되셨어요.”

“오늘이 무슨 요일이죠?”

“일요일이에요.”

영전은 그런가 하고는 다시 침대에 몸을 뉘였다. 다행히 출근할 날을 놓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저…언제쯤 퇴원할 수 있을까요?”

“이따 의사 선생님이 한 번 진료 보시고 말씀해 주실 거예요.”

‘칼에 찔렸으니 당장 퇴원할 수는 없겠지.’

왠지 모르게 영전은 일을 나가는 것이 귀찮아졌다. 미룰 수 있다면 계속 미루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것은 그 전에 그가 느껴보지 못한 새로운 감정이었다.

예전의 영전은, 주변 사람들이 일벌레라고 부를 정도로 일에 파묻혀 사는 사람이었다. 딱히 누가 시키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영전은 오로지 일 밖에 몰랐다. 그것 만이 그를 더 위로, 더 강한 사람으로 이끌어 줄 수 있는 유일한 통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영전은 일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일’은 영전이 성공으로 나아가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었다. 영전은 때로는 일이 고역스러웠다. 강유라 같은 끔찍한 고객을 만날 때는 더더욱 그랬다.

‘강유라…?’

한참 생각에 빠져 있던 영전은 조심스레 그 이름을 되뇌었다.

무언가 그와 깊은 인연이 있는 듯한 울림이었다. 물론 그녀는 영전의 고객이었지만, 단지 그런 이유에서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정신을 잃고 난 후 꿨던 긴 꿈과도 관련이 있는 것 같았다.

왠지 그 꿈에서, 영전은 악연이든 좋은 인연이든 강유라와 여러 차례 만났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 생생한 기억들이었다.

영전은 탁자 위에 놓여진 자신의 핸드폰에 눈길을 돌렸다. 왠지 영전은 핸드폰이라는 것에 격한 반가움을 느꼈다.

영전은 핸드폰을 열어 포탈사이트의 뉴스를 확인했다.

삼영그룹의 회장인 강무완 회장이 신도시에서의 재개발 사업에 관한 포부를 밝히는 기사가 1면에 있었다.

영전은 왠지 머리가 아팠다. 강유라와 강무완의 이름들을 떠올리니 왠지 기분이 불편해졌다.

물론 원래도 그런 이들을 좋아하는 건 아니었지만,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 보니 그 이름들은 왠지 그에게 더더욱 불편함을 느끼게 했다.

‘가만, 강무완이 언제부터 회장이었지…?’

영전은 인상을 찡그리며 뉴스를 계속 검색했다. 뉴스란에는 강무완 회장의 재개발 사업과 아들인 강준수 사장의 패션경영 철학 관련 인터뷰가 계속해서 올라왔다.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강유라를 검색해 보니 아무 것도 나오는 것이 없었다.

그의 기억에 강유라는 분명 삼영그룹의 지주회사인 주식회사 삼영의 대표이사였다. 그러나 마치 그녀의 존재가 지워진 것처럼 어떤 기사에도 그녀의 이름이 나오지 않았다.

영전은 출근해서 정시연 파트너 변호사에게 물어봐야 겠다고 생각했다.

‘정시연…’

왠지 모르게 다른 의미에서 또 낯익은 이름이었다.

영전은 혼란스러운 기분에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러자 주머니 안에서 뭔가가 만져졌다.

세 개의 은방울이었다.

영전은 입을 헤 벌리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것을 꺼내어 올려다 보았다.

“이게 다 뭐야…?”

평소에 사주, 미신이나 악세서리 같은 것이라면 질색을 하는 영전이었다. 그가 스스로 산 것일 리는 없었다.

하지만 영전은 왠지 그것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방울들을 사용하면 그가 지금 느끼는 이 모든 혼란들이 해소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가 막 방울을 들어올려 흔들려는 순간이었다.

“이런, 다행히 생각보다 일찍 일어나셨네요.”

간호사가 말했던 담당의사가 온 모양이었다. 영전은 이상하게 보일 것 같아 재빨리 방울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아직 좀 쓰리고 결리긴 하는데 견딜만 합니다.”

“예, 저희가 검사해 본 결과 수치상으로도 특별히 이상은 없어 보이네요. 내일 오전 정도에 퇴원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의사가 돌아가고, 영전은 급격한 피로감을 느끼며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자고 나면 이 모든 혼란스러운 감정들이 사라지길 바라며.

다음 날, 영전은 퇴원해서 집에 들렀다가 사무실로 직행했다.

회사에서는 좀 더 쉬어도 된다고 했다. 물론 영전도 그러고 싶었지만 알아봐야 할 것이 있었다.

회사에 도착한 영전은 바로 담당비서에게 정시연 파트너가 출근했는지를 물었다.

“정… 누구요?”

담당비서가 잘 모르겠다는 듯 옆의 비서에게도 물어봤고, 옆의 비서 역시 고개를 내저었다.

“정시연 파트너님이라고 하셨나요?”

“예, 회사자문 1팀의.”

“그런 분은 안 계시는데요…”

담당비서가 난처하다는 목소리로 대답하며 말꼬리를 흐렸다. 아무래도 병원에 갔다 오더니 아직 회복이 덜 된 것이 아닌지 의심하는 모양새였다.

영전은 일단 알았다고 하며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왔다.

‘이게 다 어떻게 된 거야?’

영전은 머리를 감싸쥐고 오히려 어제보다 더 혼란에 빠졌다.

사무실로 돌아온 그는 그간 그가 정시연과 함께 해온 일들 그리고 강유라와 해왔던 일들에 관한 자료를 다시 찾아보려고 노력했지만, 그 어디서도 그런 기록들을 찾을 수 없었다.

혹은, 비슷한 사건을 찾았지만 그건 정시연이 아닌 다른 누군가와 그가 해결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마치 정시연과 강유라를 전체 기록에서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지워버린 듯한 모양새였다.

영전은 문득 자신의 주머니 안에 어떤 감촉을 느꼈다.

주머니에 든 것은 어제의 은방울이었다. 은방울이 자신을 어서 흔들어 보라고 재촉하는 것 같았다.

영전은 뭔가 홀린듯이 은방울 들어 바라보다가, 결심한 듯 은방울을 한 번 세차게 흔들었다.

-딸랑

청명한 소리를 내며 은방울이 흔들렸다. 그러자 그 중 하나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영전이 놀라 은방울을 바라보고 있는 그 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생각보다 빨리 불렀네?”

영전은 놀라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한 소년이 나른하게 사무실 안에 비치된 의자에 앉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영전은 그 역시 낯이 익다고 생각했다. 그의 이름은…

“은전차사?”

“그래. 무슨 일이지?”

영전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한 번 흔들었다. 그로서는 은방울을 흔들자 갑자기 소년이 나타난 상황이나, 그 소년의 이름을 자신이 알고 있다는 상황 모두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 저… 음…”

은전차사는 참을성 있게 영전이 말이 아닌 소리를 흘리는 것을 잠자코 지켜보았다.

“에… 그러니까…”

“아니, 뭐야? 불렀으면 말을 하라고.”

“이게 다 무슨 상황입니까?”

영전은 그가 깨어난 후 겪었던 기이한 일들을 은전차사에게 설명했다.

영전도 그가 왜 답을 알 거라고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가 겪고 있는 이 이상한 일들은 홀연히 나타난 이 신비한 소년이 아니면 누구도 설명해 줄 수 없을 것 같았다.

은전차사는 이야기를 다 듣고는 말했다.

“일단 네가 알고 있는 그것들은 꿈이 아니야.”

“꿈이 아니라구요?”

“그래. 너는 습격을 당해 죽었고, 그 때문에 잠시 조필웅이라는 1998년에 살고 있는 검사의 몸을 빌어 살았어. 그건 그 때의 기억이야.

그 때의 기억을 현재를 사는 네가 굳이 갖고 있어봐야 혼동만 초래할 것 같아서 기억을 모두 지웠는데, 아무래도 잔재가 남은 모양이군.”

“말도 안돼…”

“말이 안 된다고 믿는 건 자유지만, 네가 나를 보자마자 누구인지 알았다는 게 모든 걸 증명해 주지 않아?”

영전은 그의 말을 잠시 곱씹어 본 뒤 물었다.

“그럼 정시연이나 강유라 같은 사람들은요? 이 사람들은 원래 제 주위에 있던 사람들인데, 왜 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거죠?”

“네가 조필웅으로 살 때 사건의 일부가 변경되었기 때문에 역사가 변경되었어. 네가 갖고 있는 강유라나 정시연의 기억들은 변경 전의 잔재 같은 것들이지.

지금은 좀 위화감이 들겠지만 너도 차차 그것들을 잊게 될거야. 뒤틀린 역사 때문에 생긴 메아리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돼.”

영전은 놀라움을 느끼며 그 때까지 생생한 꿈 정도로 생각했던 정시연과의 기억들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

정시연, 박장경, 서다혜, 이규필, 강유라, 강무완…

하나씩 떠오르는 이름들이 낯설면서도 낯설지 않았다.

어떤 것들은 친근했고, 어떤 것들은 치가 떨릴 만큼 증오스러웠다.

“이 기억들이… 단순히 꿈이 아니라 진짜 있었던 사건이란 말이죠?”

“그렇지. 아마 네 시간대에서 그 사건들에 관한 기록을 찾아볼 수도 있을 걸.”

영전은 잠시 고민하다가 PC방 살인사건에 관한 기사들을 검색해 보았다.

그 당시 담당검사가 피고인의 심신상실 주장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데 성공했다는 내용의 기사들이 몇몇 보였다. 하지만 워낙에 오래 된 사건이라 구체적인 내용을 찾아보기는 힘들었다.

“그럼 이 기억들도 차차 없어지나요?”

“그렇게 될 거야. 오래 걸리진 않을 거고.”

영전은 곰곰히 생각에 빠졌다.

“그러면 이 기억들을 제가 그대로 유지하는 것도 가능한가요?”

은전차사가 팔짱을 끼며 대답했다.

“가능은 하지. 가능은 한데… 왜 굳이?”

영전은 말문이 막혔다.

그로서도 왜 자신이 이런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사무실에 돌아와 보니 이미 처리해야 할 사건이 산더미처럼 쌓여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왠지 기억을 되찾아야 할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고 설명할 수 밖에는 없었다.

“변호사님?”

그 때 갑자기 담당비서가 사무실로 들어왔다.

영전은 놀라 은전차사 쪽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은전차사는 담당비서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영전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비서를 돌아보았다.

“예, 무슨 일이세요?”

“변호사님이 말씀하신 정시연이라는 분…혹시 몰라서 찾아봤는데, 혹시 이 분인가요?”

담당비서가 말하며 한 장의 종이를 건넸다. 짧은 기사를 프린트한 것이었다.

삼영그룹을 수사하던 검사, 의문의 사체로 발견되다.

삼영그룹을 수사하던 한 검사가 지난 6일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사체는 한강변의 한 인적 드문 공원에서 발견되었으며, 사인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으나 경찰은 타살 가능성에 중점을 두고 사건을 조사 중이다.

사망자의 이름은…

조필웅 검사와 함께 삼영그룹 관련 사건들을 수사하고 있던 것으로 알려졌다…

영전은 기사를 읽다 말고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눈에 낀 뿌연 안개를 지우듯 눈을 세게 부빈 다음 다시 한번 기사를 살펴봤다.

그리고 믿기지 않는 듯 사망자의 이름을 또박 또박 소리내어 읽었다.

“사망자의 이름은 정 시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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