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사로 개과천선-78화 (78/151)

78화 떠나는 게 아니야

그날, 이른 오후.

언론사에는 누구에게서 나온 건지 알 수 없는 소문이 빠르게 퍼지고 있었다.

강무완 사장이 그동안 사업에서 방해가 되거나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할 수 있는 자들을 하나씩 처리해 왔으며, 그 사실을 증언할 사람이 검찰청에 출두할 것이라는 것.

기자들이 그 소문의 출처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누구도 그 정보의 출처를 알 수 없었다. 결국 기자들은 두 손을 들고 서울남부지방검찰청으로 향했다.

기자들이 청사의 로비에서 도대체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증인을 기다리고 있을 때, 한 남자가 터덜터덜 정문에서부터 걸어왔다. 몇 명의 경찰에 의해 둘러싸인 채였다.

기자들은 직감적으로 그가 바로 소문의 그 남자임을 깨달았다.

남자는 웅성거리기 시작하는 기자들을 헤치고 검찰청 로비에 섰다.

“저는 강무완 사장의 지시로 무고한 사람들을 살해했습니다. 이 모든 일에 대해 재판에서 솔직하게 증언하고, 죗값을 달게 받겠습니다.”

무수한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고, 몰려든 기자들이 마이크를 갖다대기 시작했다.

“방금 말씀하신 게 사실입니까?!”

“살해당한 사람은 누구누구입니까?”

“왜 갑자기 자수할 생각을 하신 겁니까?”

남자는 그 모든 질문에 답을 하지 않고 허공을 바라보며 한숨을 한 번 내쉬었다.

경찰들이 그를 재촉해 안쪽으로 그를 끌고 들어갔다.

필웅은 자신의 사무실 창문에서 그 광경을 모두 보고 있었다.

준비는 모두 마쳤다.

“강무완 사장을 구속하고 살인죄로 기소할 거야.”

“좋아.”

“주요 증인으로 사냥꾼 아니, 박태성이라고 했지. 박태성을 신청하고, 강무완이 진우현, 강석훈, 윤진과 각각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에 대한 증거자료도 준비해 뒀어.

박태성의 말에 따르면 윤진 선배도 강무완이 이런 식으로 자신을 이용해 사람들을 죽여온 걸 윤진 선배가 눈치챘기 때문에 죽이라고 한 거래.”

“그렇지.”

“이번에야말로 강무완을 잡을 수 있어.”

“맞아.”

시연은 말하다 말고 조금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필웅을 바라보았다.

“반응이 영 뜨뜻미지근하네? 앞으로 일 안 할 사람처럼?”

“그럴 리가!”

“그런데 왜 아까부터 훈수 두는 사람처럼 뒷짐만 지고 있는 거야?”

“그냥 뭐랄까. 이제 다 끝나가는구나 싶어서.”

“끝나긴 뭐가 끝나, 이제부터가 시작인데.”

필웅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재판절차는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강무완을 구속하고, 1심에서 이기더라도 계속해서 상소가 이뤄질 테니 대법원까지 가게 되면 길게는 4-5년까지도 재판 결과가 확정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끝냈다.

이제 그는 곧 2020년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 후로도 필웅이라는 존재는 여전히 이 시대를 살아가겠지만, 왠지 모르게 영전은 이제 시연과 다른 사람들에게 사건을 맡기고 가야 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뭐, 물론 조필웅이 알아서 잘하겠지만.’

영전이 아는 조필웅은 영전과 같이 임기응변에 능하거나 때로는 협잡에까지 기댈 수 있는 성격은 아니었다.

아마도 앞으로 상당한 고난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필웅의 우직함이 일을 처리하는 데 영전의 방식보다 더 적합할 수도 있었다.

그것은 어쨌든 영전이 고민할 것은 아니었다.

“무슨 생각해?”

시연이 다가오며 물었다.

오랜만에 영전으로서의 상념에 빠져 있던 필웅은 시연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깬 듯 얼떨떨한 표정으로 시연을 바라보았다.

“응? 아, 아니.”

“이제부터가 시작인데 벌써 지쳐서 농땡이 칠 생각하면 안 된다?”

“그럼, 그럼.”

‘물론 앞으로의 일은 조필웅이 하게 되겠지만 말이지.’

필웅, 아니 영전은 생각하며 그 생각에 담긴 아이러니함에 피식 웃었다.

“잠깐 나갔다 올게.”

“응, 갔다와.”

“시연아.”

“응?”

“그동안 정말 수고 많았어.”

시연이 정신없이 서류를 검토하다가 머리를 들고는 빤히 필웅을 바라보았다.

“너 진짜 오늘 왜 이래? 또 어디 혼자 가려고 하는 거면….”

“그런 거 아니야. 그냥 고마워서 그래. 뭐랄까… 지난 몇 달 동안 네 새로운 면도 많이 보게 됐고.”

시연의 얼굴에 약간 홍조가 돌았다.

“무무무무뭐가 새로운 면이라는 거야! 쓰쓰쓸데없는 소리 할거면 들어가 쉬다 나오든가!”

“알았어.”

필웅은 미소를 지으며 사무실을 나섰다. 시연은 그런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다시 서류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연은 여전히 왠지 필웅이 어디론가 가버리는 것 같다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 * *

“검사님, 웬일이십니까?”

경찰서 앞의 주차장에서 여기저기 잔기스가 난 차에 잔기스 처리용 페인트를 조심조심 바르고 있던 장경이 반갑게 필웅에게 인사했다.

“그냥요. 차는 좀 어때요?”

“수리 맡겨야죠. 그 전에 해볼 수 있는 만큼만 해보고”

장경은 보기만 해도 가슴이 쓰리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애마, 검은색 에스페로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지금 한창 바쁘실 때 아님까?”

“시연이가 일단 먼저 처리하고 있어요.”

“그렇군요.”

“형사님.”

“예?”

“형사님한테 그동안 참 많이 배운 것 같습니다.”

장경이 뒷머리를 긁적이고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면서 물었다.

“무슨 소리심까? 어디 가서 안 올 사람처럼.”

“아아, 그런 건 아니구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린다는 거죠.”

“저도 많이 배웠슴다. 검사님이랑 했던 사건들은 정말 평생 잊지 못할 겁니다. 아, 이러니까 나도 무슨 다시 안 볼 사람같네.”

장경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코를 쓱 훔쳤다. 필웅이 미소지으며 말했다.

“앞으로도 잘 도와주셔야 합니다.”

“어휴, 뭐 그런 당연한 말씀을 하십니까. 강무완이 구속되면 또 다 같이 소주나 한잔하시죠.”

“물론이죠.”

그때 경찰서 입구 쪽에서 다혜가 걸어왔다.

“검사님~ 웬일이세요?”

“아, 박 형사님한테 잠깐 인사 좀 드리려고 왔죠. 다혜씨는요?”

“인사요? 어디 가세요~?”

‘왜 다들 당연히 내가 어딜 간다고 생각하는 거지. 내 말투가 이상한가?’

필웅은 속으로 고민하다가 이내 얼굴에 다시 미소를 띠고는 대답했다.

“어휴, 이제부터 시작인데 제가 가긴 어딜 가겠습니까?”

다혜도 수긍한 듯 몇 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죠~ 참, 음료수 좀 드세요.”

다혜가 음료수를 사 온 모양이었다. 필웅은 감사의 인사를 하고는 음료수를 받아 들었다. 암바사였다.

“경찰서 자주 놀러 오시나 봐요?”

필웅이 지나가는 말처럼 은근슬쩍 다혜에게 물었다.

다혜가 조금 뺨을 붉히며 대답했다.

“사건 제보 같은 것도 받을 수 있고~ 그리고 저 검찰청에도 자주 가거든요?”

“요샌 통 안 오시는 것 같던데.”

필웅이 장난스럽게 대답하며 음료수 캔을 땄다.

다혜가 난처하다는 표정으로 장경을 쳐다보았지만, 장경은 옆에서 우물쭈물하며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

“으음~ 앞으로 더 자주 갈게요.”

“아뇨 뭐 그런 뜻은 아니고 마음 가는 대로 하셔야죠.”

필웅이 씩 웃으며 음료수를 한 모금 마셨다.

“다혜 씨.”

“?”

“앞으로도… 많이 도와주세요. 너무 무리는 하지 마시구요.”

“그럼요~”

다혜는 왜 그런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필웅은 마주 미소지어주고는 다 마신 음료수 캔을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제 가봐야겠네요. 잠깐 쉬어야겠습니다.”

“안녕히 가십쇼!”

“검사님, 또 봬요~”

밝게 인사하는 그들을 뒤로하고, 필웅은 고민하다가 청사 앞의 토스트 가게로 걸음을 돌렸다.

* * *

“에구, 검사님. 오랜만에 오셨네요.”

“하하, 요새 조금 바빠서요.”

“오랜만에 오셨으니 토스트 하나는 서비스로 드릴게.”

“아니에요, 제값 주고 먹어야죠.”

필웅은 말하며 한사코 거부하는 아주머니의 손에 만원을 쥐여 주었다.

아주머니가 앞치마에서 잔돈을 찾아 거슬러 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TV에서 검사님 봤어요. 삼영백화점 사건 수사하셨다고.”

“예… 잘 안 됐죠.”

필웅이 가게 앞의 임시 의자에 털썩 앉아 토스트를 한 입 베어 물며 대답했다.

“잘 안 되다뇨?”

“유죄를 못 받았어요. 그 수많은 사람들을 죄없이 죽게 했는데….”

필웅은 말하며 갑자기 울컥해서 목이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 필웅은 주스를 한 잔 주문했다.

“영감님은 최선을 다하신 거잖아요. 그러면 됐죠, 뭐.”

“그런 걸까요….”

필웅은 너무나도 아쉬웠다.

그 수많은 사람들을 건물 잔해 속에 깔려 죽게 한 남자를 자신의 손으로 응당한 처벌을 받게 하고 싶었는데, 결국 다른 사건으로 그를 처벌할 수밖에 없었다.

그 모든 죽어간 사람들을 생각하면, 적어도 몇 번이고 사형에 처해야 인과응보가 이뤄질 수 있을 것 같았다.

필웅은 이 시대의 한계와 이 나라 법률의 한계를 절감하며 묵묵히 토스트만 질겅질겅 씹을 수밖에 없다는 현실이 너무나도 아쉬웠다.

“저는 그래도 검사님한테 너무 고마워요.”

“…?”

“TV기사에서 나오신 거 보고 반가워서 좀 더 찾아봤는데, 정말 많은 사건들 하셨더라구요.

그것도 항상 피해자의 편에 서서 끝까지 싸워 주시고… 검사님 같은 사람들이 많아야 우리들도 안심하고 살 텐데요.”

아주머니가 호호하고 쑥스럽다는 듯이 웃으며 다시 토스트를 부치기 시작했다.

필웅은 또 한 번 뭔가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지켜야 하는 사람들’

그가 변호사였을 적에는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감정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의지하고, 자신이 속해 있는 이 공동체에 무언가를 기여하고 있다는 느낌.

아주 조금씩이지만, 이 악물고 해온 일들에 이 공동체가 그래도 조금씩은 변화하고 있다는 느낌.

“아주머니, 잘 먹었습니다.”

필웅은 다 먹은 봉지를 휴지통에 버리고는 툭툭 바지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떠날 시간이었다.

필웅은 집으로 돌아와 가만히 눈을 감았다.

마치 잠든 것 같았지만, 여전히 정신은 맑아서 묘한 느낌이었다.

세계가 자신을 중간에 두고 어디론가 거세게 휩쓸려 가는 느낌이었다.

필웅이 아닌 영전은 눈을 떴다. 아직 주위는 깜깜했다. 마치 영화를 빨리 감기 하듯 주위의 모든 것들이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그것들은 사건들이었고, 시간이었다.

영전은 경이롭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니, ‘본다’는 것이 맞는 표현인지도 영전은 알지 못했다. 영전은 흐름을 느끼고 있었다.

그 흐름 가운데 은전차사가 조용히 영전에게 걸어왔다. 영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돌아가게 되니 어때?”

“뭐랄까… 묘하네요.”

영전이 얼떨떨하게 말했다.

영전이 문득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니, 이미 영전의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거죠?”

“네가 필웅이 된 순간 새로운 타임라인이 형성됐어. 네가 돌아갈 곳은 2020년이지만, 네가 알던 2020년과는 다른 세계가 될 거야.”

“내가 알고 있던 역사가 전부 바뀐다는 얘긴가요?”

“네가 조필웅으로서 관여했던 사건들은 바뀌겠지. 하지만 조필웅과 직접 관련이 없던 대세적인 사건들이 바뀌지는 않을 거야.”

은전차사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필웅에게 내밀었다.

“뭔가요, 이건?”

그것은 3개가 함께 묶여 있는 은방울이었다.

“애프터 서비스라고 생각해. 2020년으로 돌아간 후, 물어볼 거나 상의할 게 있으면 방울을 울려. 그러면 총 3번까지 내가 방문할 거야.”

“서비스가 좋네요.”

“뭐, 아무래도 인간으로서 겪기 힘든 일을 겪게 됐으니까.”

은전차사가 팔짱을 끼고 웃으며 말했다.

“자, 이제 고향이다.”

영전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번쩍 눈을 떴다.

“필웅 씨, 일어나셨나요?”

꿈결처럼,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1부 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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