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파이날 카운트다운
그때 필웅의 눈에 아직 켜져 있는 모니터 화면이 들어왔다.
누군가로부터 쪽지가 와 있었다.
필웅은 황급하게 쪽지함을 열어 새로 온 메시지를 읽었다. 시연이 무슨 일인가 하고 옆으로 다가왔다.
02-5678-XXXX. 7시
“이거… 공중전화 번호 같은데?”
“7시라고?”
필웅은 시계를 슥 쳐다보았다. 시계는 6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잠시 후에 전화해 봐야겠군.”
“사냥꾼일까?”
“그럴 가능성이 높지.”
필웅과 시연은 초조하게 시계바늘만을 노려보았다. 필웅은 오늘따라 시간이 더디 흐르는 것 같다고 느꼈다.
7시 정각이 되었다. 필웅은 재빨리 전화기를 집어들었다.
-뚜르르르르
신호음이 울렸다. 필웅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시연이 필웅의 입술에 손을 가져다 댔다. 필웅이 그녀를 올려다보자, 시연이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필웅이 입술에 손을 대 보니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여보시오.”
전화기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누구십니까?”
“7081 차주요.”
“어디십니까?”
“그건 말할 수 없어. 당신은 누구지?”
필웅이 잠시 시연을 마주 보았다.
‘나라는 걸 알려줘도 될까?’
그의 눈빛이 이렇게 묻고 있었다. 시연도 통화 내용을 듣기 위해 전화기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있었기에, 둘의 눈이 아주 가까운 곳에서 마주쳤다. 시연은 잠시 얼굴을 붉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울남부지검의 조필웅 검사입니다.”
“조필웅?”
“그렇습니다.”
“무슨 일이지? 당신이 나를 먼저 찾다니.”
대화의 내용, 그리고 목소리. 필웅이 만났던 사냥꾼이 분명했다.
“당신, 지금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는 거지?”
필웅이 승부수를 던졌다. 먼저 그를 동요시켜서 이야기에 집중하게 하려는 심산이었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이윽고 전화기 너머의 남자, 사냥꾼이 입을 열었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필웅은 전화기를 고쳐 잡았다.
“당신은 윤진을 자택이나 눈에 띄지 않는 장소에서 살해하려고 했지만 실패했지. 이제까지 진우현이나 강석훈은 쉽게 자살로 위장할 수 있었겠지만, 윤진 선배의 사망 현장은 누가 봐도 자살이 아니었어. 누가 상가건물에서 목을 매달고 자살을 해?
꼬리가 밟히기 시작했으니 질책이 있었겠지. 그러니 무리해서 대낮에 나를 습격하려고 한 거고.”
사냥꾼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우리가 당신을 도와줄 수 있어. 이대로라면 당신도 순식간에 제거될걸.”
“더 이상 들을 가치가 없겠군.”
덜컥거리며 전화기를 내려놓으려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필웅이 다급하게 외쳤다.
“당신, 강무완이랑 일하고 있지!?”
필웅은 외치고는 전화기에 바짝 귀를 기울였다. 아직 끊기지는 않은 듯 사냥꾼의 낮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필웅은 자신감을 조금 회복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
“강무완 같은 남자가 두 번이나 실패를 용납할 거라고 믿는 건 아니겠지?”
전화기 너머에서 사냥꾼의 피로감 깃든 목소리가 들려왔다.
“넌 언제든 다시 기회를 잡아 죽이면 된다.”
“이봐, 그렇게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얘기하지 말라고. 그땐 내가 실수했지만 나도 이제 그때처럼 방심하지 않아. 날 죽이려면 또다시 꼬리를 남기고야 말걸.”
“네가 날 대체 어떻게 돕겠다는 거지? 지금 사냥감이 사냥꾼을 돕겠다고 하는 게 얼마나 우습게 들리는지 알고는 있나?”
사냥꾼이 거칠게 되묻자 필웅은 그 와중에도 자신들이 사냥꾼이라는 별명을 잘 지은 것 같다고 약간 흡족해했다.
하지만 동시에 필웅은 고민도 되었다. 사냥꾼의 지적은 사실이었다.
지금으로서는 그가 사냥꾼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다. 강무완의 강력한 힘에 비해 필웅이 가진 힘은 너무나도 보잘것없어 보였다.
법의 경계를 넘나드는 그의 힘 앞에서 일개 검사의 힘은 너무나도 무력했다.
“할 말이 없나 보군.”
사냥꾼이 흥미를 잃은 듯 다시 덜커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잠깐!”
“또 뭐야?”
사냥꾼의 짜증이 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짜증을 내고는 있었지만, 쉽게 전화를 끊지 못하는 걸 봐서 그도 어느 정도는 조바심이 나는 모양이었다.
“내가 제안할 게 있다.”
“내 흥미를 끌 만한 제안이 있을지 모르겠군.”
“우릴 도와준다면, 강유라의 비호를 받게 해주겠다.”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잠시 끊겼다. 당황스러운 침묵이었다.
잠시 후 사냥꾼의 황당하다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들은 대로야. 강유라의 보호를 받게 해주겠어. 강유라는 외관상으로는 말 잘 듣는 딸 흉내를 내고 있지만, 사실은 강무완 사장의 자리를 노리고 있어. 내 말이 맞지?”
만일 사냥꾼이 강무완의 수족이라면 강유라와 강무완 사이에 흐르는 깊은 골을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필웅은 지금으로서는 강무완의 대척점에 설 수 있는 인물은 강유라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만약 사냥꾼이 강무완에 대한 충성심이 투철하다면, 강유라의 이름을 꺼내는 것 자체가 그를 불편하게 만들 수 있었다. 필웅으로서는 그 모든 것을 걸고 도박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필웅은 숨죽이며 사냥꾼의 반응을 기다렸다.
초조한 시간이 흘렀다.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 뭘 하면 되나.”
필웅은 옆에서 듣고 있던 시연을 돌아보며 숨죽여 만세를 불렀다.
“재판에 나와 증언을 해 줘.”
“뭐라고?”
“재판에 나와 강무완이 그동안 네게 시킨 일들을 증언하라고.”
“미쳤나? 그럼 나도 감옥살이를 하게 될텐데?”
“평생 강무완에게 부려지다가 버려지고 죽느니, 강유라의 보호를 받으면서 감옥 안에 있는 편이 나을텐데?”
사냥꾼은 다시 입을 닫았다.
“생각할 시간을 좀 줬으면 좋겠군.”
“많이 줄 수는 없어.”
“내일, 같은 시간에 내가 연락하겠다.”
필웅이 뭐라 대답할 틈도 없이 사냥꾼은 전화를 끊었다.
필웅은 전화기를 내려놓고는 시연을 바라보았다.
“이걸로 된 걸까?”
“강유라의 도움을 이용한다는 건 석연치 않지만, 이게 최선이겠지.”
필웅과 시연은 묵묵히 팔짱을 끼고 조용해진 전화기를 내려다보았다.
* * *
다음 날.
필웅과 시연, 다혜와 장경은 필웅의 사무실에 모여 앉아 사냥꾼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뚜르르르르
필웅은 전화를 받으며 스피커폰 기능을 켰다.
“여보세요.”
“나다.”
“생각은 끝났습니까?”
“좋아. 수락하지.”
“잘됐군요.”
“대신 강유라를 만나 직접 확답을 듣고 싶다.”
“좋습니다. 제가 연락해 보죠. 어디로 다시 연락하면 됩니까?”
“2시간 후 같은 번호로 연락해라.”
필웅은 전화를 끊고는 강유라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
그 흔한 여보세요라는 말도 없이 강유라가 차가운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조필웅이다.”
“무슨 일이지?”
“강무완의 수족을 찾았어. 그동안 진우현과 강석훈, 윤진을 죽인 인물이야.”
“그래서?”
“이 사람을 좀 보호해 줬으면 좋겠군.”
“조필웅, 내가 빌어먹을 유모처럼 보여?”
“당초 나와 손잡았던 목적을 잊었나?”
“확실하게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어?”
“삼영백화점 붕괴가 기업범죄라면 이건 명백히 고의적인 살인 교사야. 기업범죄야 대표가 잘 몰랐다느니 주의의무를 다했다느니 하는 말로 어물쩍 넘어갈 수 있지만, 이 사건이 터지기만 하면 삼영의 힘으로도 막을 수 없어.”
“좋아. 내가 뭘 해주면 되지?”
“살인범이 감옥에 가게 되면 감옥에서 살해당하지 않게 보호해줘.”
“그리고?”
“살인범과 한 번 만나줘.”
“미쳤어?”
“진정해. 나도 함께 갈거야. 정 놈을 가까이하는 게 싫으면, 단지 네가 그 자리에 가서 약속했다는 것만 보여주면 돼.”
“내일 오전 9시. 전에 만났던 커피숍로 와.”
강유라는 약속 시간을 상의하는 대신 일방적으로 시간과 장소를 통보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필웅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했다.
“내가 잠시 후 사냥꾼한테 연락을 한 다음 약속장소로 나갈게.”
“너 혼자 나가는 건 위험해.”
시연이 단호하게 말했다. 필웅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바로 대답했다.
“그럴 수도 있겠지. 형사님이 가서 몰래 지켜보고 계실거야. 어차피 사냥꾼을 완전히 믿을 수는 없으니 이번 기회에 신병을 확보해 둬야지.”
“알았어. 나도 같이 갈까?”
“아니야. 사람 수는 적은 편이 좋아. 사람이 많으면 사냥꾼의 불필요한 주의를 끌게 될 거야. 넌 강무완의 살인 혐의에 대한 기소 준비해 줘. 최대한 이 모든 걸 빨리 동시에 진행해야 해.”
필웅이 손을 꺾어 뚜둑, 하는 소리를 냈다.
“이제, 정말로 그 늙은이를 잡아넣을 시간이니까.”
‘그리고, 내가 나로서 남아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얼마 없으니까.’
필웅은 남들의 눈에 띄지 않게 슬쩍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은전차사와 약속한 시간이 22시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 * *
필웅은 커피숍에 앉아 강유라를 기다렸다.
오늘은, 영전이 필웅으로서 있을 수 있는 마지막 날이었다. 영전이 현대로 돌아가면 이 모든 사건들은 어떻게 될까?
물론 필웅이 이제까지 맡아 온 사건을 잘 수행할 수도 있었다. 시연과 장경, 다혜가 모두 그를 도와줄 것이다.
하지만 영전은 왠지 모르게 자신이 현대로 돌아가고 나서는 생각한 것처럼 사건이 잘 풀리지 않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자꾸만 들었다.
‘최대한 사건들을 전부 해결해 두고 떠나야 해.’
필웅은 다짐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런 그를 어느샌가 도착한 강유라가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깜짝이야, 뭐야?”
“뭐냐니, 무례하네.”
강유라가 심드렁하게 대답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래서, 그놈은 어딨어? 이름이 뭐야?”
“이름은 우리도 아직 몰라. 우린 사냥꾼이라고 부르고 있어.”
“사냥꾼이라… 난 사냥개가 더 어울릴 것 같지만, 뭐 아무래도 좋아. 그래서 사냥꾼은 어디 있어?”
강유라가 말하며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필웅도 그녀를 따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들의 말소리가 간신히 들릴 법한 거리의 커피숍 구석에 앉은 한 남자가 눈에 띄었다. 검은 모자를 눌러 쓰고, 고개를 푹 수그린 채 앉아 있는 남자였다.
‘사냥꾼이군.’
필웅이 아무 말 없이 강유라를 툭툭치고는 턱으로 사냥꾼 쪽을 가리켰다. 강유라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고는, 역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당신, 나의 보호를 원한다고 들었다.”
기묘한 광경이었다. 강유라는 필웅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 말은 필웅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강유라는 일부러 사냥꾼도 들을 수 있도록 목소리를 조금 높여 이야기하고 있었다.
“당신이 감옥에 가게 되든 어떻게 되든 우리 아버지의 터치를 받지 않도록 보호해주지. 단, 그 대가로 너는 아버지가 네게 시킨 일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법정에서 전부 증언해야 한다. 이제 확인이 됐나?”
필웅은 슬쩍 사냥꾼 쪽을 돌아보았다. 사냥꾼은 묵묵히 두 손 위에 얼굴을 괴고 있다가, 허리를 펴고 두 번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냥꾼은 자리에서 일어섰고, 다른 쪽에서 그를 살피고 있던 장경이 조용히 그의 뒤를 따랐다.
“이러면 된 거야?”
“됐어.”
“이번에는 틀림없겠지?”
강유라가 필웅을 매섭게 노려보며 말했다.
“당초의 목적을 달성하지도 못하면서 아빠 쪽을 들쑤시기만 하는 건 이제 사절이야. 확실하게 보내 버릴 수 있는 한 방이 필요해. 나도 더 이상은 아빠의 눈을 피해서 독자적으로 행동하기 어려워.”
“걱정 마.”
필웅이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이번엔 절대로 놓치지 않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