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사로 개과천선-76화 (76/151)

76화 약속된 시간이 다가온다

장경이 장부를 덮어 사장에게 다시 건넸다.

“웬만하면 대포차 장사 앞으로 하지 마시고.”

사장은 황급히 장부를 받아 예예, 하며 몰래 다시 장부를 허리 뒤에 꽂아 넣었다. 장경은 혀를 쯧쯧 차고는 차로 가서 시동을 걸었다.

사장이 다가와 차의 상태를 이리저리 살피더니 장경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좀 많이 망가졌는데 이 차는 폐차 안 하십니까?”

“신경 끄쇼.”

장경이 퉁명스럽게 대꾸하고는 필웅에게 타라고 손짓했다.

필웅이 자리에 타며 장경에게 말했다.

“이놈,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거나 적어도 압박을 당하고 있어요.”

“그게 누굴까요?”

장경은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눈을 꿈벅거렸다.

“이런 놈을 두렵게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더 큰 힘을 가진 사람이겠죠.”

“K?”

장경이 눈을 크게 뜨고 필웅을 돌아보았다. 필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럴 겁니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놈은 강무완에게 겁박 당하고 있어요.

“왜 그러는 걸까요?”

필웅은 자신의 추론을 이야기했다.

“제 생각에, 아마도 놈이 윤진 선배를 그 빌딩에서 살해한 건 우발적인 범행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다른 두 사건은 모두 피해자가 자택이나 호텔 등 발견되기 어렵거나 자살했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장소에서 발생했죠.

하지만 윤진 선배는 발견되기도 쉽고 정황상 자살이기도 어려운 장소에서 죽었습니다. 즉 이건 놈의 계획 밖이었던 겁니다. 놈은 적어도 윤진 선배를 자택에서 죽이려고 했겠지만, 이미 윤진 선배가 잔뜩 경계를 하고 있었으니 접근하기 어려웠겠죠.”

“그래서 실패했다고 욕을 먹었다?”

“실제로 윤진 선배 사건 이후로 우리가 이 일련의 사건들이 살인사건이라고 직감하기 시작했으니까요. 아마도 질책이 있었겠죠.”

“그래서 실적을 올리기 위해 무리하게 검사님을 습격했고, 그런 모습이 폐차장 사장의 눈에도 띈 것이다….”

장경은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놈은 이제 어떻게 잡아야 할까요? 대포차는 오락실 앞에 버리고 간 것 같고, 목격 제보도 딱히 들어온 게 없는데….”

필웅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한 가지 시도해 볼 만한 게 있을 것 같습니다.”

* * *

다음 날, 필웅, 장경, 시연과 다혜는 필웅의 사무실에 모여앉아 있었다.

필웅은 모뎀을 연결하고 PC를 켰다.

“이게 뭐야?”

시연이 신기하다는 듯 모뎀을 들고 물었다.

“모뎀이야.”

“모뎀이 뭐야?”

필웅은 한숨을 내쉬었다.

1998년은 한창 PC 통신이 유행하던 시기였다. 물론, PC 통신이 유행 중이기는 했지만 모든 사람이 현대인들이 인터넷을 이용하듯 PC 통신을 이용하는 건 아니었다.

<접속>이라는 PC 통신을 소재로 한 영화가 나온 지 이미 1년이 지난 시점이었지만, 여전히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PC 통신이 뭔지도 모를 시절이었다.

시연처럼 일에 파묻혀 사는 사람이라면 PC 통신이 뭔지 모뎀이 뭔지 모를 법도 했다.

“PC 통신을 할 때 쓰는 기기야. 전화선을 통해 PC로 통신망에 연결하는 거지.”

“오? 그럼 PC로 전화를 하는 거야?”

“할 수야 있겠지만 그걸 하려는 건 아니야….”

시연은 그럼 뭘 할 거냐는 표정으로 혼란스럽게 필웅을 바라보았다.

필웅은 더 이상 설명해봐야 시연의 머리만 아프게 할 것 같아서 말없이 PC 통신에 접속했다.

“PC 통신으로 뭐 하시려구요~?”

다혜는 PC 통신에 익숙한 듯했다. 아무래도 빠른 정보가 생명이다 보니 정보 매체에는 시연보다는 밝은 것 같았다.

“공고를 띄울 겁니다.”

“공고요?”

“예. 모든 게시판마다 놈만 알아볼 수 있는 공고를 띄우는 겁니다.”

필웅은 설명을 시작했다.

강무완의 밑에서 일하는 사냥꾼(편의상 그들은 이름을 아직 알 수 없는 남자를 사냥꾼이라고 부르기로 했다)은 그림자 속에서 숨어서 활동하는 인물일 것이다.

사냥꾼의 일은 신속하고, 적시에 이뤄져야 한다. 그렇다면 정보를 어느 때든 쉽게 파악할 수 있는 통신수단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다면 사냥꾼은 단순한 전화 같은 통신수단 말고도 새로운 형태의 통신수단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지식을 갖추고 있을 것이었다.

“그래서 사냥꾼이 PC 통신을 할 것이다?”

“그럴 가능성이 높다는 거지.”

필웅은 먼저 사람들이 가장 많이 보는 게시판에 접속했다.

“하지만 너무 대놓고 그를 찾으면 강무완이 낌새를 챌지도 몰라. 뭔가 그만 알아볼 수 있을 만한 메시지가 없을까?”

“흠….”

시연과 장경, 다혜는 모두 고민에 빠졌다.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시연이 입을 열었다.

“‘윤진 변호사 사건의 목격자를 찾습니다’ 어때?”

“아직 윤진 선배가 사망한 게 살인사건이라는 건 우리밖에 모르기는 한데…. 일단 사건에 관계된 인물의 이름이 나오면 사냥꾼 외에 다른 강무완 수하들의 주의를 끌 위험이 너무 높아져.”

다혜가 이어서 말했다.

“‘차량번호 7081 차주 찾습니다’ 어때요~?”

7081은 사냥꾼이 쓰다가 버린 대포차의 번호였다. 필웅은 턱을 손에 괴고 잠시 다혜의 제안을 생각해보았다.

‘어차피 대포차니까 진짜 차주라는 사람이 나타날 것 같지도 않고, 그 정도면 특정이 가능할 것도 같은데….’

필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한번 해보죠.”

필웅은 다혜가 제안한 문구로 같은 글을 여러 게시판에 올렸다.

“이제 반응을 좀 지켜보죠.”

필웅이 쭉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필웅은 팔을 뻗다가 시연이 뭔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왜 그래?”

시연이 대답했다.

“너, 혼자 사냥꾼 잡으러 갔다며?”

필웅은 아차 하는 표정으로 장경을 돌아보았다. 장경은 딴청을 피우며 휘파람을 불고 있었다.

“그게….”

“내가! 혼자! 일하지! 말라고! 말하자! 마자! 혼자 뛰쳐나갔다고?”

필웅은 시연의 등 뒤로 뭔가 붉은 오오라 같은 것이 뿜어져 나오는 것처럼 느껴져 흠칫하고 앉은 채 뒤로 물러섰다.

필웅이 절박한 심정으로 장경과 다혜를 찾았다.

그러나 장경과 다혜는 눈치를 보며 뭔가 수군대더니, 어색한 미소를 띠고는 “저희는 이만…” 어쩌고 하며 나가버렸다.

시연은 그들이 나가는 것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화가 나 있었다.

“그게… 너무 급해서 어쩔 수 없었어.”

필웅이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시연이 씩씩거리며 말했다.

“박 형사님이랑 같이 가도 되잖아?”

“언제 만나서 언제 같이 가. 사냥꾼이 언제 도망갈지 모르는데.”

“그래도 그렇지! 네가 다치거나 죽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사건이 네 목숨보다 더 중요해?”

필웅은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어쩌면 내 몸이 아니라는 이유로 나도 모르게 더 무모했던 것 아닐까?’

어쨌든 필웅의 몸에 들어 있는 영전은 사건이 모두 해결되면 현대로 돌아갈 것이다.

그 과정에서 필웅이 죽더라도, 아마도 은전차사는 약속한 게 있으니 영전을 현대로 돌려보내 줄 것이었다.

그러나 그 경우 필웅은 다시 죽은 채로만 이 세상에 남게 된다.

물론 현대로 돌아간 영전은 필웅의 죽음을 느낄 수 없겠지만, 필웅은 스스로가 지금 이 순간에 속해있지 않다는 이유로 자신의 죽음에 무뎌졌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필웅 주위의 사람들은 계속해서 이 순간에서 살아갈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필웅의 죽음을 계속해서 마음에 품고 살아갈 것이다. 필웅은 남겨질 사람들을 생각하며 자신의 성급함을 다시 한번 뉘우쳤다.

“미안해.”

“약속해.”

시연은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필웅은 못 이기는 척 새끼손가락을 들어 그녀의 손가락에 걸었다.

시연이 조용한 목소리로 타이르듯 말했다.

“따라 해. 절대로 혼자 범죄자를 쫓지 않을 것.”

“절대로 혼자 범죄자를 쫓지 않을 것.”

“그리고 절대로 죽지 말 것.”

“절대로 죽지 말 것.”

“자, 도장 찍어.”

필웅은 엄지손가락을 들어 시연의 엄지손가락에 가져다 대었다.

“사냥꾼이 얼마나 위험한 인간인지 잘 알잖아. 갈거면 적어도 나라도 같이 가자.”

“그러면 시체 한 구가 시체 두 구가 되는 것 아냐?”

“나 싸움 잘하거든?”

물론 필웅은 그녀의 말을 의심할 생각은 없었다. 필웅은 킥킥 웃으며 자리에 다시 앉았다.

“자, 이제 좀 지켜볼까!”

아직 그가 올린 게시글들에는 별 반응이 없었다. 필웅은 쩝, 하고 아쉬운 입맛을 다시며 내일 정도에 다시 게시글들을 체크해 보기로 했다.

시연이 돌아가고, 필웅은 그대로 자리에 앉아 잠이 들었다.

필웅은 꿈을 꾸었다. 꿈을 꾸는 자신도 사무실 안에서 자고 있었다. 필웅은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엎드린 자세에서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은전차사가 물끄러미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헉?!”

“으힉?”

그가 놀라서 헉, 하고 소리를 지르자 은전차사도 덩달아 놀라 펄쩍 뛰며 소리를 질렀다.

“뭡니까?”

은전차사는 체면을 구겼다는 듯 크흠, 하며 헛기침을 하고는 옷매무새를 바로잡았다.

“크흠, 인간아. 약속된 시간이 다가오는 것 같구나.”

“무슨 소립니까? K를 잡은 후에 가겠다고….”

“음, 그게 사실 너를 바로 돌려보내야 하는 걸 내가 여기저기 손을 써서 잠시 시간을 연기해 둔 상태라서. 더 이상 시간을 끌기 어려울 것 같은데….”

은전차사가 우물쭈물하며 괜히 필웅의 시선을 피한 채로 말했다.

“그래서요?”

“하루.”

“예?”

“하루가 지나면 무조건 돌아가야 해.”

“이게 무슨! 약속한 것과 다르지 않습니까!”

은전차사가 필웅의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하듯 말했다.

“그건 나도 미안한데. 뭐 공무원들 하는 일이 다 그런 거 아니겠어? 윗사람 눈치도 보고 규정도 따르다 보면 불가피한 상황이 발생할 수도….”

“지금 그게 공무원이 할 말입니까?”

“야, 너는 검사로서 항상 약속 지키면서 살았어? 알 만한 사람이 왜 이래.”

은전차사가 입을 비죽 내밀며 투덜거렸다.

그의 말에 필웅도 할 말이 없어졌다. 물론 그가 정신을 차린 후(?)에는 피해자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싸워왔지만, 항상 약속된 결과를 얻어낸 것은 아니었다. 필웅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4일만 주시면 안 됩니까?”

“이게 무슨 남대문시장인 줄 아나? 안 돼.”

“2일. 2일만 주면 아무런 불평불만도 하지 않고 혹시나 나중에 다시 저승에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어디 고자질하지도 않겠습니다.”

“싫다면?”

“2일만 허락해 주는 걸 조건으로 고자질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필웅은 ‘조건으로’에 특별히 강세를 두면서 말했다. 2일을 주지 않는다면 어디에든 이 모든 사고들을 고자질해 버리겠다는 무언의 협박이었다.

‘은전차사는 기본적으로 협박에 약한 성격이지….’

필웅은 처음 은전차사를 만났을 때 그가 화를 내자 바로 움츠러들던 은전차사의 모습과 중간에 한 번 은전차사가 찾아왔을 때도 똑같은 수법으로 기한을 받아낸 사실을 떠올렸다.

아니나 다를까, 은전차사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끄으응 하는 신음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한참이나 끙끙대던 은전차사는 한숨을 길게 내쉬고 말했다.

“후…. 앞으로 딱 2일! 48시간이야. 더 이상은 안 돼. 지금부터 시간 잰다.”

“그러시죠. 잠깐, 제가 현대로 돌아가면 조필웅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조필웅은 마치 자신이 계속 조필웅이었던 것처럼? 뭔가 말이 이상하네. 아무튼 네 영혼이 중간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가게 될 거야. 네가 걱정할 일은 아니지.”

은전차사는 마치 원래 거기에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그 순간 어두웠던 사무실에 불이 켜졌다.

필웅은 아직도 꿈이 계속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원래 계속 현실이었던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집에 안 갔어?”

불을 키고 들어온 것은 시연이었다. 시연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사무실을 한참 둘러보다가 물었다.

“누구 왔었어? 얘기 소리가 들리던데.”

“잠꼬대한 거야.”

“그런 것 치고는 굉장히 멀쩡해 보이는데….”

실제로 필웅은 이미 깨어 있는 사람처럼 정자세로 반듯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필웅은 잠시 입을 다물고 대답할 말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저승사자가 왔었다고 할 수는 없고, 뭐라고 둘러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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