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허가받은 거 맞습니까
멀리서 자동차 소리가 들렸다.
검은 모자의 사내가 어느새 꺼내든 거친 천 같은 것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천이지만 무척 튼튼해 보였고, 세게 잡아당겨도 끊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만일 누군가의 목을 조른다고 해도 벨트나 밧줄처럼 흔적이 남을 것 같지도 않았다.
‘설마 저건…?’
필웅은 진우현과 강석훈, 윤진의 사인을 차례로 떠올렸다.
그들은 모두 목을 맨 채 숨져 있었다.
‘설마 저걸로 먼저 목을 조른 후 자살로 위장했던 건가!’
필웅은 입술을 깨물며 생각했다. 남자의 정체를 알수록, 뿌옇게만 보이던 사건의 진상들이 속속들이 드러나는 기분이었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다.”
필웅은 시간이라도 끌어보자는 생각에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검은 모자의 사내에게 말을 걸었다.
“뭐죠?”
의외로 사내는 순순히 대답했다. 어차피 필웅이 여기서 죽을 모습이니 급할 게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강석훈은 어떻게 죽인 거지? 그의 호텔 방에는 침입 흔적이 없었는데….”
모자 아래로 보이는 남자의 입가에 피식하고 작은 미소가 스쳤다.
“아, 그거요? 내가 기자라고 하면서 언론에 제보하면 신변을 보호해주겠다고 했더니 순순히 문을 열던데요? 사업하신다고 다 똑똑한 건 아닌가 봐요?”
“윤진 선배는 왜 죽인 거야?”
“그걸 제가 왜 다 알려줘야 하죠?”
검은 모자의 사내는 미소를 거두고는 두 손으로 천을 팽팽하게 당겨 잡고는 서서히 필웅에게 다가왔다.
필웅은 이를 갈며 그나마 불량배들이 없는 쪽을 골라 서서히 물러섰다. 하지만 그가 움직일 때마다 불량배들도 그를 따라 움직였다.
자동차 소리가 가까워졌다.
필웅은 남자들의 집중이 잠시 흐트러진 틈을 타서 공터의 한쪽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금세 남자들은 그를 따라잡아 그의 목덜미를 잡아챘다.
“컥!”
“어이, 검사님. 어딜 그렇게 어설프게 도망가?”
어느새 다가온 남자들이 낄낄대며 그를 단단하게 붙잡았다. 한 남자가 붙잡힌 필웅에게 침을 뱉고는 그의 얼굴에 주먹을 휘둘렀다.
-퍽!
“커헉!”
필웅은 순간 눈앞이 깜깜해졌다. 남자의 주먹은 매서웠다. 필웅은 기세에서 지지 않으려고 간신히 고개를 들어 남자를 노려보았다. 남자는 비웃는 얼굴로 다시 팔을 뒤로 크게 젖혔다.
자동차 소리가 바로 공터 옆까지 들려왔다.
남자들은 그제서야 뭔가 하고 소리가 나는 쪽을 돌아보았다. 검은색 에스페로가 맹렬하게 그들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뭐, 뭐야?”
“피해!”
남자들은 혼비백산해서 여기저기로 구르거나 뛰면서 차를 피했다. 필웅을 잡고 있던 남자도 걸음을 날 살려라하고는 필웅을 팽개치고 공터의 저편으로 멀찍이 도망갔다.
차가 끼이익, 하고 멈추며 조수석 문이 열렸다.
“검사님! 빨리 타십쇼!”
바닥에 나동그라진 필웅이 입안에 고인 피를 탁 뱉고는 소리가 난 쪽을 올려다보았다.
장경이었다.
차가 멈추자 도망갔던 남자들이 험악한 표정으로 다시 몰려들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쇠파이프 같은 것을 주워든 남자도 있었다. 차를 박살 내 버릴 기세였다.
“아니, 검사님 뭐하십니까? 얼른요!”
장경이 다시 한번 재촉하자 필웅은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조수석으로 달려갔다. 한 남자가 그를 가로막았다.
-퍽!
“어이쿠!”
필웅은 달려가던 기세 그대로 머리를 숙여 남자의 얼굴을 받아버리고는 그대로 조수석에 몸을 던졌다.
-깡!
필웅이 몸을 던지자 장경이 재빨리 문을 닫았고, 문 위로 누군가가 휘두른 쇠파이프가 내리꽂혔다.
장경은 바로 기어를 넣고는 엑셀을 밟았다.
“X발! 저 새낀 뭐야?”
“죽여! 잡아!”
남자들이 무시무시한 말을 내뱉으며 장경의 차에 달려들었다. 장경은 달려드는 남자들을 무시하고 그대로 엑셀을 밟았다. 차에 매달린 남자들이 하나둘 떨어지며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그대로 뒤로 돌아 공터를 떠나는 장경의 차 뒤로 남자들이 고함을 지르며 벽돌이며 쇠파이프 같은 것들을 던져댔다.
-쿠궁! 쿵!
둔탁한 소리를 내며 장경의 차 이곳저곳이 찌그러졌다. 뒷좌석의 유리에도 몇 군데 금이 갔다.
“이런 젠장, 할부도 안 끝났는데….”
장경이 안타까운 목소리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어느 정도 거리가 멀어지자 장경은 비로소 엑셀에서 발을 뗐다.
120까지 올라갔던 속도 계기판이 점차 안정을 되찾았다.
“후….”
장경이 한적한 길가에 잠시 차를 댔다.
“검사님… 뭘 하신 겁니까?”
필웅은 차마 대답을 못 하고 고개를 푹 수그렸다.
“아니, 이렇게 무모하게 그렇게 위험한 놈을 쫓아가시면 어떡합니까?”
“죄송합니다….”
“저한테 죄송할 게 아니죠! 검사님이 다치시기라도 하면 이 사건 수사는 누가 하고, 또 전 정 검사님한테 뭐라고 설명합니까?”
그 아수라장에서 간신히 빠져나오고 보니, 필웅도 자신이 왜 그랬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무사하시니 됐습니다. 다치신 덴 없죠?”
“예, 괜찮습니다. 면목 없네요.”
“아시면 앞으로 이런 위험한 일 좀 벌이지 마십쇼.”
장경이 툴툴대며 차를 다시 출발시켰다.
“아까 갑자기 나가셔서 미처 말씀을 못 드렸는데, 저놈이 대포차를 끌고 다닌 모양입니다.”
“그래요?”
“예, 아까 오락실에서 일하던 직원 놈 하나가 제보해 준 건데, 오락실에 올 때 차를 한 대 끌고 왔답니다. 혹시 몰라서 차량 번호를 적어 놨다고 하더라구요.”
“정말요!? 똑똑한 직원이네요.”
장경이 쓱, 코를 훔치며 약간 우쭐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갱생시킨 놈이지 말임다. 원래 인근에서 소매치기하다가 잡힌 놈인데, 여기저기 일자리도 못 구해서 전전 대는 걸 제가 여기서라도 일해 보라고 일단 소개시켜 줬슴다.”
“성인오락실 저거 불법 아닙니까?”
장경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더니 크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크흠! 뭐, 평생 저기서 일하라는 건 아니고 일손 좀 익으면 다른 데 소개시켜 줄 겁니다.”
“아무튼, 그러면 그 차를 어디서 샀는지 알 수 있겠군요?”
“그거 찾아보느라 좀 늦은 겁니다. 서울 외곽에 있는 대포차 판매상한테 산 거더라구요.”
장경이 말하며 주머니를 뒤적이다가 메모지를 하나 꺼냈다.
“여깁니다. 지금 바로 가 보려는데, 괜찮으시겠어요?”
“그럼요. 뭐 어쨌든 이번엔 여차하면 차 타고 도망치면 되니까요.”
“흐흐, 그렇긴 하죠.”
장경이 실없이 웃으며 말없이 차를 몰았다.
필웅은 창밖을 내다보며 오늘의 일을 깊이 반성했다.
‘몇 번 운 좋게 사건 해결했다고 스스로를 슈퍼히어로라고 생각하지는 말자.
물론 주위 사람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박 형사님 말대로 내가 여기에서 죽어버리기라도 하면 오히려 사람들한테 충격을 주게 될 테니까.’
구부러지고 깨진 장경의 차는 오후의 햇빛을 받으며 여유롭게 국도를 달렸다.
* * *
장경과 필웅은 서울 외곽에 있는 한 폐차장에 도착했다.
“정말 이런 데 그 판매상이 있다구요?”
“대포차 파는 건 불법인데, 그 불법으로 파는 차들을 숨겨놓기 제일 좋은 데가 어디겠습니까?”
장경이 어깨를 으쓱하며 가볍게 대답했다. 필웅은 그런가 하고 말없이 장경의 뒤를 따랐다.
“사장님 계십니까!”
장경이 우렁차게 외쳤다. 얼마나 소리가 컸는지 필웅은 인근 가게의 사장들이 다 나와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누군가가 폐차장 구석의 낡은 사무실에서 늘어진 런닝과 속칭 깔깔이라고 알려진 방상내피를 입고 나타났다.
그는 상당히 쌀쌀해진 날씨에도 까만 조리를 신고 있었다. 필웅은 한참 그를 쳐다보고 나서야 그 조리가 원래 까만색이 아니었다는 점을 깨달았다.
“누구쇼?”
사장인 듯한 남자가 몸 여기저기를 벅벅 긁으며 하품을 하고는 물었다.
“경찰입니다.”
“경찰이 여기는 웬일로?”
장경이 대답하자 남자가 갑자기 경계의 눈빛을 띄우며 물었다.
“뭐, 별 건 아니고. 몇 가지 여쭤볼 게 있어서요.”
“난 아는 게 별로 없는데.”
“그건 물어보면 알겠죠. 안에 들어가서 얘기해도 되겠습니까?”
사장은 흘긋 뒤의 사무실을 돌아보고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안에 들어가봤자 쓸데없이 얘기 길어지기밖에 더 하우? 여기서 하시죠.”
“뭐, 좋습니다. 이 번호 차량 본 적 있습니까?”
장경은 말하며 메모지를 꺼내 사장에게 보여주었다. 사장은 슬쩍 보는 시늉을 하더니 귀를 파며 대답했다.
“모릅니다.”
“똑바로 보세요.”
“아, 주위를 좀 보세요. 여기 들락날락하는 차가 몇 댄데 차량 번호를 기억합니까?”
사장이 화를 벌컥 냈다. 장경은 혀를 차고는 사장에게 다가갔다.
“여기, 폐차장 맞습니까?”
사장이 조금 움츠러들었다.
“그럼 폐차장이지 뭐겠소?”
“폐차장치고는 상태가 좋은 차들이 너무 많은데요.”
장경이 으르렁거리며 언뜻언뜻 보이는 새 차들을 가리켰다.
“아, 사람들이 멀쩡한 차를 폐차시키고 싶어 하는 걸 나보고 어쩌란 말이오?”
잠시 주눅 들었던 사장이 오히려 버럭 화를 내며 장경의 손을 밀쳐냈다. 장경의 표정이 험악해지자, 필웅이 앞으로 나섰다.
“사장님. 여기 허가받은 폐차장 맞습니까?”
사장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다가 콧방귀를 뀌며 대답했다.
“당연하죠.”
“그럼 왜 차단벽이 설치되어 있지 않은 거죠?”
폐차장은 주위에 엉성하게 철조망만이 둘러쳐져 있을 뿐, 제대로 된 외벽이 세워진 상태가 아니었다.
사장이 주위를 둘러보더니 말했다.
“무슨 차단벽이요?”
“서울시 조례에 따라 폐차장에는 2미터 이상의 차단벽을 설치해야 합니다. 차단벽이 없으면 등록기준 미달로 과징금을 맞고, 허가도 취소될 수 있다는 사실 모르십니까?”
필웅이 또박또박 말하며 사장을 향해 다가갔다. 사장은 자기도 모르게 뒤로 조금씩 물러섰다.
“어… 하지만 난….”
필웅은 안주머니에서 검찰 신분증을 꺼내 들며 말했다.
“어디 사업장 한 번 털어볼까요? 이 폐차장 허가도 제대로 받은 게 아닌 것 같은데, 정비 요원은 두고 있는 것 맞습니까?”
필웅이 위협적으로 말하며 한 걸음 더 다가서자, 사장은 뒤로 더 물러서다가 뭔가에 걸려 뒤로 철푸덕 넘어지고 말았다.
“어이쿠!”
필웅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사장이 손을 잡자, 필웅은 그를 일으켜 세우며 그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 보며 말했다.
“똑바로 얘기하지 않으면 당신이 아니라 이 사업장 자체를 엎어버릴 겁니다.”
사장은 필웅의 눈을 피하면서 가까스로 일어서서는 풀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뭘 물어보시고 싶으신 건데요.”
“아까 말했잖아요. 그 차 번호 아냐고.”
“글쎄 모른다고….”
필웅이 다시 한번 눈을 부릅떴다. 사장은 자포자기한 표정으로 잠시만 기다리라고 하더니 사무실에 들어가 장부를 하나 꺼내왔다.
“몇 번이라구요?”
“7081번. 서울 차량.”
사장은 손가락에 침을 묻혀가며 낡은 장부를 뒤적였다.
“아… 이거.”
사장이 장부의 한 면을 펼치더니 뭔가 생각에 잠긴 표정이 되었다.
“뭡니까?”
“이 차 가지러 온 사람이 좀 특이했어요.”
장경과 필웅은 동시에 물었다.
“어떻게요?”
사장은 장부를 펼쳐 장경에게 건네주고는 말을 이었다.
“그게 일단 눈이 심하게 짝눈이었어요.”
필웅과 장경은 자신도 모르게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들이 쫓고 있는 남자 역시 왜소한 체구에 짝눈이 특징이었다.
“그리구요?”
장경이 사장의 다음 말을 재촉했다.
“음… 그리고… 아! 뭔가 굉장히 안절부절못하면서 서두르는 듯한 분위기였어요. 대포차 꺼내러 간 사이를 못 참고 그냥 사무실 앞에 세워둔 차를 자기가 타고 가겠다고 억지를 부리더라구요.
그건 파는 게 아니라고 했는데도 얼마면 되냐며 현금을 꺼내서 보여주더라구요. 그리고 나서는 현금으로 값을 다 치르고 휭하니 가버렸어요.”
“누군가와 연락을 한다거나 그런 모습은 못 봤나요?”
필웅이 끼어들었다. 사장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건 못 봤어요. 아무튼, 누군가에게 쫓기는 듯한 모양새였어요.”
필웅은 그 말을 듣고 생각에 잠겼다.
‘보통은 누군가를 쫓아 죽이는 일을 하는 인간이 누군가로부터 쫓기고 있다? 그런 인간을 쫓을 수 있는 사람이 대체 누가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