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싸움 할 만큼은 하지
“뭐?”
강유라는 잘 다듬어진 손톱을 내려다보며 나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사람, 몇 번 아빠랑 만나는 거 본 적 있어.”
필웅이 긴장하며 자세를 고쳐 바로 앉았다.
“사무실에서?”
“바보야? 딱 봐도 수상한 일 도맡아 하는 딱갈인데 사무실에 들일 리가 없잖아?
가끔 집에 서재로 찾아왔었어. 뭐, 유학가기 전에 몇 번 본거라 요새도 들락날락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강무완 사장과 뭘 했는지까지는 모르겠지?”
“그거야 나도 모르지. 하지만 네 얘길 들으니 대충 알겠네.”
“이 얘길 나한테 해주는 것도 네 아버지를 제거하고 싶어서겠지?”
강유라가 빙글빙글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오~ 조필웅. 눈치가 많이 늘었어?
맞아. 사실 난 딱히 우리 아빠를 보호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지. 안 그래?”
필웅은 별말 없이 차갑게 그녀를 쏘아보았다.
“그렇게 쳐다보지 말아 줄래?”
“결국 이것도 다 네 게임의 일환이었다는 거군.”
“조필웅, 언제까지 알량한 정의감에 수단 가려가며 일할 거야?”
강유라가 코웃음을 치며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어 번 탁탁 치며 말을 이었다.
“이것 봐. 물론 나는 내 라이벌들을 네 손 빌어 제거하게 되면 편하긴 해. 그 과정에서 뭐, 너를 이용하는 것처럼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지.
하지만 그게 너한테 무슨 손해가 되지? 내가 오늘 이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다면, 너는 애먼 기자들이나 들쑤시고 다녔을 거 아냐?”
필웅은 분했지만, 그녀의 말을 부인할 수 없었다.
물론, 그녀의 도움이 없었어도 그와 장경이 어렴풋이 기억나는 그의 얼굴을 떠올리며 어떻게든 남자를 찾을 수는 있었을 것이었다.
그 경우 말도 안 되게 많은 시간이 필요하기는 했겠지만.
강유라의 고백이 사건 조사를 상당히 쉽게 만들어 준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녀로부터 더 얻어낼 정보가 있을지도 몰랐다.
“다른 정보는 없어? 그놈이 사는 곳이나, 자주 가는 곳이라든가.”
“글쎄? 아… 한 번 아빠가 도박가지고 주의 주는 걸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도박?”
“카지노 같은 건 아닌 것 같은데… 정확히는 몰라.”
강유라가 주섬주섬 일어날 채비를 했다.
“가려고?”
강유라가 싱긋 웃더니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왜? 필웅이 아쉽니?”
필웅은 대답 대신 질색하는 표정만을 지어 보였다.
강유라가 떠나고, 필웅도 자리에서 느지막이 일어섰다.
‘강유라의 말에 따르면 K의 정체는 강무완이 확실해. 물론 강유라가 진실을 말했을 경우지만. 하지만 왠지 강유라가 하는 말이 거짓말 같지는 않아.’
필웅은 생각에 잠겨 다시 검찰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야, 연락도 없이 왜 이제 와?”
시연이 필웅을 보고는 역정을 냈다.
“미안. 재판은 어떻게 됐어?”
“일단 내가 들어갔어. 들어갔는데….”
시연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왜?”
“살인죄에 대해서 무죄가 나왔어.”
“뭐!? 그게 어떻게 가능해?”
“나도 몰라. 좀 억지 아니야? 뭘 더 어떻게 해야 유죄라는 거야?”
필웅은 어이가 없었다. 시연의 말대로 필웅도 당연히 유죄가 나올 거라고 예상했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라도 다시 삼영백화점 사건으로 공격받으면, 그때 나는 무죄 판결을 받았으니까 문제의 소지가 없다고 우기겠다, 이 말이잖아?’
물론 재판부에도 삼영의 입김이 작용했는지 그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검찰을 쥐락펴락하는 삼영이, 재판부에는 손을 쓰지 않았을 거라고 믿기는 어려웠다.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도 깊숙이 곳곳에 침투한 삼영의 흔적에 필웅은 절망했다. 물론, 그렇다고 여기서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K가 누군지 알아낸 것 같아.”
필웅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시연이 의아하게 그를 바라보다가, 그의 말의 의미를 깨닫고 눈을 크게 떴다.
“뭐? 진짜야?”
“응. 사실 강유라를 만났어.”
“강유라가 K였던 거야? 하지만…!”
시연이 강무완의 이야기를 꺼내려 하자, 필웅은 고개를 젓고는 강유라와 나눈 대화들을 들려주었다.
시연은 반신반의하는 표정이었지만, 이내 강유라가 거짓말을 지어낼 필요가 별로 없다는 점에 동의했다.
“음 그럼, 결국 그 K, 아니지. 강무완의 부하라는 놈을 잡으면 핵심 단서를 확보할 수 있다는 거네?”
“그렇겠지. 누군가를 직접적으로 죽이라고 지시했다는 건 이제까지의 범죄들과는 차원이 달라. 다른 건 사업과정에서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이라도 할 수 있지만 이건 아니니까.”
“도박 문제가 있다고 했던가? 박 형사님 통해 한 번 알아볼까?”
“좋은 생각이야. 내가 연락해 볼게.”
시연이 사무실을 나서며 문득 생각난 듯 필웅을 돌아보며 말했다.
“필웅아.”
“?”
“혼자 다 하려고 무리하지 마.”
필웅은 왠지 뜨끔함을 느꼈다.
필웅은 윤진의 죽음을 알게 되고 나서 주변 사람들에게 위협이 가지 않게 해야 한다는 마음이 더 강해진 참이었다.
시연이 어떻게 알았는지는 몰라도 그런 필웅의 마음을 꿰뚫어 본 것이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필웅이 얼버무리며 전화기를 들었다.
“그냥 왠지 네가 윤진 선배가 죽은 것 때문에 너무 무리할 것 같아서.”
“아니야.”
“아니면 다행이고.”
시연은 싱긋 웃으며 사무실을 나갔다.
필웅은 복잡한 생각을 털어버리려 고개를 한 번 휘젓고는, 장경에게 연락했다.
장경과 필웅은 동네의 성인오락실에 나와 있었다. 일전 다혜가 취재를 하러 들렀을 때 함께 방문했던 곳이었다.
장경은 새삼 추억에 젖어 다 떨어져 가는 간판을 바라보다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예의 험상궂은 대머리 사내가 나와 그를 맞았다.
“요새 영 뜸하시더니 웬일이유?”
대머리 사내가 하품을 하며 배를 긁고는 물었다.
장경이 대답했다.
“도박쟁이 한 놈을 찾는 중이라서.”
“도박쟁이? 뭐 그런 놈이 한둘입니까?”
장경이 그와 필웅이 인천에서 마주친 남자의 인상착의를 대강 설명했다.
“이런 놈인데, 이 동네에 들락날락하는 놈이나 다른 동네에 들락거리는 거 알아봐 줄 수 있냐?”
대머리 사내는 골똘히 생각에 잠기더니 말했다.
“우리 동네에선 못 본 것 같은데. 그냥 도박쟁이라서 잡으려는 거요?”
“그건 네가 알 거 없고. 그럼 다른 동네에도 알아봐 줄 수 있냐?”
“알아봐 줄 수는 있는데, 맨입으로?”
대머리 사내가 히죽히죽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오래 못 보더니 감 잃었구나? 이 영업장부터 문 닫게 해줘?”
장경이 으르렁거렸다. 대머리 사내는 한 발 빼며 멋쩍게 대답했다.
“아니 그냥 한번 해 본 말 가지고 뭘 그렇게 무섭게 그러슈.”
“헛소리하지 말고 뭐 알게 되면 바로 연락해. 알았어? 알아볼 때도 티 안 나게 하고.”
“아, 알았수. 잔소리는”
장경과 필웅이 몸을 돌려 밖으로 나오자 등 뒤에서 퉷, 하고 침을 뱉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장경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일단은 기다려 볼 수밖에 없나.’
장경은 씁쓸하게 차에 시동을 걸고 필웅과 함께 다시 경찰서로 향했다.
* * *
“검사님, 그놈이 영등포 세모오락실에서 목격됐답니다!”
장경이 필웅을 검찰청에 내려다 주고, 필웅이 몇 가지 다른 업무를 처리하기가 무섭게 장경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세모오락실이요?”
“예! 영등포역 근처에 있는 새로 생긴 성인오락실이랍니다.”
“알겠습니다.”
“어? 검사님, 잠깐. 혹시….”
장경의 당황한 목소리를 뒤로하고 필웅은 재빨리 자켓을 걸친 후 사무실을 나섰다. 이번에는 다른 사람들에게만 맡겨 둘 수는 없었다.
필웅은 택시를 타고 가는 길에 생각했다.
‘더 이상 남의 일처럼 그냥 다른 사람에게 맡겨 둘 수만은 없어.’
필웅은 더 이상 주위 사람들이 이 일에 휘말려 다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물론, 필웅도 다혜에게는 각자 자신이 맡은 일을 하면 충분하다고 위로하기는 했었다.
그러나 막상 윤진이 죽고 나니, 그의 눈에는 보이는 것이 없었다. 그저 주위 사람들이 다시는 다치지 않게 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필웅은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세모오락실 쪽으로 뛰어갔다.
그때였다.
누군가 오락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검은 모자를 푹 눌러쓴, 체구가 왜소한 남자.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필웅은 한눈에 그가 바로 인천에서 만났던 남자라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
남자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걸음을 재촉했다.
필웅은 들키지 않게 주의하면서 그의 뒤를 따랐다.
다행히 길가에는 인파가 적당히 있어서 필웅이 남자를 따라가더라도 그다지 눈에 띄지는 않을 것 같았다. 필웅은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살금살금 남자의 뒤를 따라갔다.
남자는 한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필웅도 뒤에서 그를 놓치지 않기 위해 골목 안으로 방향을 틀었다.
남자는 계속해서 골목을 거침없이 지나갔다. 그가 잘 아는 길목인 듯했다.
필웅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골목이 깊어질수록 주위의 사람들은 점점 줄어 들어갔다.
마침내 남자가 멈춰 섰다. 골목의 끝은 놀랍게도 한적한 공터였다. 빌딩 같은 것을 지으려다가 중단된 곳인 듯, 건축자재가 어지러이 널부러져 있었다.
그때야 비로소 필웅은, 그와 남자를 제외하고는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아니, 그 순간까지는 그랬다.
갑자기 공터로 이어진 골목의 여기저기서 하나같이 무서운 인상의 남자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필웅은 재빨리 그가 들어선 골목 입구 쪽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쪽에서도 이미 한 남자가 각목 같은 것을 들고는 매섭게 필웅을 노려보고 있었다.
필웅이 그때까지 따라가던 남자가 천천히 공터 한복판의 벽돌 무더기로 걸어가더니 그 위에 앉았다.
“조필웅 검사님이시죠?”
남자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필웅은 주위를 살피며 다른 불량배들이 가까이 다가오는지 경계하면서 대답했다.
“그래.”
“싸움 잘해요?”
“할 만큼은 하지.”
필웅은 짐짓 허세를 부려 보았다. 물론 그는 시연이나 장경과 달리 제대로 운동을 한 적도 없었고, 덩치는 좋았지만 싸움이란 건 해본 적도 없는 샌님이었다.
그렇지만 필웅은 왠지 순순히 ‘아뇨, 싸움은 잘 못해요’라고 대답하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남자의 눈에 불신의 기색이 피어올랐다.
“그래요? 별로 그렇게 안 보이는데. 아무튼, 그거야 뭐 뚜드려 보면 알겠죠.”
남자가 쓱, 턱짓을 했다. 아무래도 주위의 다른 불량배들은 남자의 수하인 모양이었다.
필웅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뒤에서 그에게 다가오던 각목을 든 남자가 뒤에서 필웅의 어깨를 턱 하고 잡았다. 필웅은 질겁을 하며 손을 뿌리쳤다.
남자들이 킬킬거리며 손에 하나씩 무시무시한 무기를 들고 필웅에게 다가왔다.
필웅은 그제서야 자신이 너무 무모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아무 계획도 없이 저런 위험한 놈을 쫓다니…!’
마침내 검은 모자의 남자도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필웅에게 다가왔다.
필웅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공터이긴 하지만 주위에 지나가는 사람은 없었다. 상당히 외진 곳인 것 같았다.
‘빌어먹을, 이제 어떡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