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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로 개과천선-73화 (73/151)

73화 나도 본 적 있는 것 같아

“네가… K였군.”

필웅이 허탈하다는 듯 강유라의 손을 놔 버리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강유라는 팍 짜증을 내려다가 그의 말에 입을 닫고는 그에게 물었다.

“K? 뭐야, 그게?”

“시치미 떼지마. 네가 진우현 사건의 배후에 있었고, AG케미컬의 불법 임상 실험을 강요한 K라는 거 다 알고 있어.”

필웅이 무서운 눈빛으로 강유라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 눈빛에 담긴 기세는 천하의 강유라도 움찔하게 만들 정도로 맹렬했다.

강유라는 잠시 그런 필웅의 눈을 마주 보다가 두 손을 들며 말했다.

“야, 나는 정말 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거든? K는 뭐고 진우현 사건의 배후는 또 뭐야? 내가 나는 진우현 같은 양아치랑은 거래한 적 없다고….”

필웅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강유라를 쏘아보며 그녀의 말을 끊었다.

“진우현이 누군가와 만나서 거래하던 현장을 목격한 사람이 있어.”

“그런데?”

“그 사람은 진우현과 그 사람의 대화 내용까지 들었지. 그 사람, 아니 K가 진우현에게 주식 사기를 지시하는 내용이었어.”

강유라가 답답하다는 목소리로 언성을 높였다.

“그러니까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냐고?”

“무슨 일이냐고 물어본 건 너니까 끝까지 조용히 들어. 그 후 우리는 AG케미컬의 사건을 수사하면서 AG케미컬에게도 가짜 임상 실험을 종용해서 결국 패망하게 한 작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지. 그를 부르는 호칭도 K였어.

그리고 삼영그룹은 진우현에게 간접적으로 투자를 하고 있었지. 네 이니셜은 K고.”

강유라가 잠자코 듣고 있다가 물었다.

“지금 그런 정황 증거만으로 내가 K라고 하는 거야?”

“정황 증거뿐만이 아냐.”

필웅이 손을 뻗어 강유라의 손등을 가리켰다.

“진우현에게 공모 현장을 목격한 사람 말로는, 지시하는 사람의 손등에 흰 점이 있었다고 했어. 바로 네 손등에 있는 그런 것 말이지.”

강유라는 비로소 자신의 손을 천천히 올려 손등을 바라보았다. 흰 점이 손등의 한 가운데에 박혀 있었다.

강유라는 피식 웃었다.

필웅이 씹어뱉듯 말했다.

“이제 인정하는 건가?”

강유라는 고개를 저었다. 필웅이 분노하며 말했다.

“이렇게까지 모든 정황이 너를 가리키고 있는데 아직도!”

“이봐,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뭘?”

강유라는 장난스럽게 손을 펴서 손등을 보이며 말했다.

“이런 점, 나한테만 있는 게 아니거든?”

* * *

시연은 어떻게 사무실로 돌아왔는지도 모르게 멍한 상태에서 사무실로 돌아왔다.

‘강무완…! 강무완이 K였어!’

법정에서 손을 내민 강무완의 손등에서 그녀가 발견한 것은 다름 아닌 뚜렷한 흰 점이었다.

‘진우현과 AG케미컬 모두 K와 연결되어 있었고, 삼영그룹도 진우현과 연결되어 있었어. 그렇다면 삼영그룹을 움직일 정도의 실력자여야 한다는 얘기지.’

생각할수록 강무완 외에 다른 후보자를 찾기는 어려웠다.

시연은 필웅이 돌아오면 빨리 이 얘기를 하고 싶어 좀이 쑤실 지경이었다.

‘얜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안 오는 거야?’

시연은 필웅이 장경의 연락을 받고 사무실을 뛰쳐나갔던 것을 기억해 냈다.

시연은 별생각 없이 장경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형사님, 저 시연이에요.”

“아, 검사님. 무슨 일이십니까?”

“아까 필웅이 나간 거, 무슨 일이에요? 윤진 선배한테 무슨 일 생겼어요?”

전화기 너머에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잠시 후, 긴 한숨과 함께 장경의 힘없는 대답이 들려왔다.

“윤진 변호사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시연도 필웅만큼은 아니었지만, 적잖이 놀랐다.

“예?! 왜요!? 아니, 어떻게요?”

“어제 조 검사님 만나려고 약속한 건물에서 시체로 발견됐습니다. 처음 발견했을 때는 자살처럼 보였는데, 장소도 그렇고 정황도 이상해서 다른 범인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조사 중임다.”

“범인이요?”

장경은 이제까지 ‘자살’로 여겨졌던 진우현, 강석훈의 사건들과 공통적으로 목격된 한 남자에 대한 자신들의 추론을 간략하게 들려줬다.

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가 있네요. 모두 삼영과 관계가 있다는 점을 봐도 그렇고.”

“예, 그래서 그 사건현장에서 목격된 놈을 수배하는 중인데 쉽지 않네요. 서 기자님 통해서 확인 중이긴 한데 역시 진짜 기자도 아닌 것 같고….”

“그렇군요.”

시연은 전화를 끊고 필웅이 얼마나 상심했을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윤진이 그와 더 친했다는 사실은 차치하고서라도, 필웅은 이 일이 삼영을 상대로 한 싸움을 시작한 자신 때문이라고 자책하고 있었을 수도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시연은 너무 가슴이 아팠다.

‘네 잘못이 아닌데… 넌 지금 스스로를 자책하면서 어딜 헤매고 있는 거니.’

시연은 문득 돌아오지 않는 필웅이 더욱 보고 싶어졌다.

* * *

필웅이 미간을 찡그렸다.

“무슨 소리야?”

혼란에 빠진 필웅과는 달리, 이제야 무슨 상황인지 알겠다는 듯 강유라의 표정이 한결 여유로워졌다.

“말했잖아, 이런 점이 있는 건 나뿐만이 아니라고.”

“누굴 바보로 알아? 손등에 흰 점이 있는 사람이야 우리나라에 수백 명은 있겠지. 하지만 이 모든 사건과 관계있는 사람 중 흰 점이 있는 사람은 너뿐이잖아!”

필웅이 벌떡 일어서서 테이블을 쾅 하고 내리쳤다. 주위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하고 그들을 흘깃흘깃 쳐다봤지만 필웅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필웅이 집게손가락으로 그녀를 가리키며 말했다.

“경고하는데, 여기서도 개수작 부리면서 은근슬쩍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강유라는 필웅의 손가락을 무심하게 걷어치우고는 말했다.

“내가 언제 개수작을 부렸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개수작을 부릴 생각도 없어.

난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뿐이야. 이 사건과 연관되어 있으면서 손등에 흰 점이 있는 사람이 K라는 얘기잖아?”

“그래!”

“그러니까, 그 조건에 부합하는 사람이 하나 더 있다고.”

필웅의 표정에 한 점 의혹이 피어올랐다.

강유라는 필웅이 입을 다물자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 아빠야.”

“뭐?”

“우리 아빠라고. 이 점, 일종의 유전이야. 우리 아빠도 손등에 같은 점이 있어. 다만 아빠의 점이 더 뚜렷하지.”

필웅이 주저앉았다.

“그게… 사실이야?”

“응.”

“그래서… 너는 K가 아니다?”

강유라는 크게 팔을 들어 머리 뒤로 넘기고는 말했다.

“일단 난 모르는 일이야. 하지만 네 얘길 들어보니 우리 아버님이 K라는 인물일 수는 있을 것 같군.”

필웅은 잠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강유라를 100% 믿어야 하나? 물론 손등에 점이 있는 것 정도는 언제든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인데, 강유라가 그런 뻔한 거짓말을 했을 리가 없지.

하지만 반대로 둘 중 어느 누구도 K가 될 수 있는 상황이야. K로 의심받는 걸 피하기 위해 자신의 아버지를 파는 거라면? 강유라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지.’

“이봐, 설마 내가 K라는 의심을 피하기 위해 아버지를 내다 판다고 생각하는 거야?”

필웅은 뜨끔하며 강유라를 올려다보았다.

“표정을 보니 맞나 보네. 나는 너희들이 나를 K라고 의심하든 말든 전혀 쫄리지 않거든? 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내가 스스로 잘 알고 있고, 그건 조사해 보면 다 나올 수밖에 없으니까.”

필웅은 어렴풋이 강유라의 취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강유라는 기본적으로 조필웅이나 정시연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분한 일이지만, 필웅의 생각에는 강유라가 그렇게 그들을 무시하는 이상 그들이 수사망을 펼쳐오는 것이 두려워 거짓말까지 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일리는 있군.”

강유라는 그것 보라는 듯 득의양양한 표정을 짓다가, 의아하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너희는 왜 그렇게 K를 잡으려고 하는 거야? 어차피 진우현과 AG케미컬 사건은 종결됐잖아?”

필웅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기는 했다. 진우현의 사기사건의 배후를 잡지는 못했지만, 공범 중 하나인 김진범은 이미 감옥에 들어가 있고, 진우현은 사망했다.

또 AG케미컬의 사건도 관련자들에게 처벌이 곧 내려질 것이었다.

따라서, 어쩌면 K를 추적하는 것은 그저 자기의 욕심일 뿐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은전차사를 불러 지금이라도 마음을 바꾸고 돌아갈까 하고도 수없이 고민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만약 K가 이 모든 것의 배후라면, 진우현, 강석훈 그리고 윤진의 사망에 K가 관여했을 수도 있었다. 모든 사건 현장에 나타난 검은 모자의 왜소한 사내가 K의 심복일 수도 있었다.

만일 그렇다면, 윤진 선배의 복수도 하지 않고 돌아갈 수는 없었다. 이제 K를 잡는 것은 단순히 미래로 돌아가기 위해 성취해야 하는 어떤 퀘스트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필연이어야 했다.

“K가 살해를 지시했을 수도 있어.”

강유라가 불쾌한 표정으로 물었다.

“누구를?”

“진우현, 강석훈, 그리고 삼영백화점에서 강무완 사장의 변호를 맡았던 윤진 변호사.”

“진우현이나 강석훈은 자살했다고 들었는데?”

필웅은 한숨을 내쉬며 피로한 눈을 문질렀다.

“우리도 그런 줄 알았어. 하지만 타살이 의심되는 정황을 사후에 발견했어. 지금 그 살인범을 찾기 위해 조사 중이야.”

강유라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네 말은, 진우현이나 강석훈 같은 사람들을 입막음하기 위해 K라는 우리 아빠가 그 사람들을 죽여왔다는 거야?”

“맞아.”

“그럼 윤진은? 그 사람, 우리 아빠 변호인 아니었어? 그런 사람을 죽여서 득 될 게 뭐가 있지?”

필웅은 강유라의 냉철함이 감탄스러우면서도 섬뜩했다. 강유라는 그 사람들이 누군가에 의해 죽었다는 사실을 안타까워하는 대신 그들을 죽임으로 인해 무슨 득이 되는지를 묻고 있었다.

필웅은 간신히 입을 열어 대답했다.

“윤진 선배는 강무완 사장에 대한 어떤 비밀을 알게 됐다고 했어. 윤진 선배가 그 비밀을 알게 됐다는 걸 강무완 사장이 알게 됐을지도 모르지.”

강유라는 다리를 꼬며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결국 다 너희들의 추측이라는 거잖아?”

“그렇지만 근거가 뚜렷한 추측이지.”

강유라가 뭔가를 곰곰히 생각하더니 물었다.

“너희들이 의심하고 있다는 그 검은 모자의 남자, 인상착의를 설명해 줄 수 있어?

“인상착의까지는 잘 몰라. 우리도 그냥 기자인 줄로만 알았고 항상 모자를 눌러쓰고 있었으니까… 아!”

필웅은 언젠가 한 번 그의 얼굴을 봤던 기억이 났다. 인천의 여인숙에서였다. 비록 찰나이긴 했지만, 필웅은 분명 그날 그의 얼굴을 보았다.

필웅은 그의 얼굴을 생각나는 대로 묘사했다.

“일단 체구가 왜소하고 일반 남자들보다 확실히 작았어. 양쪽 눈의 크기가 좀 많이 달랐던 것 같아.”

강유라의 표정이 갑자기 달라졌다. 강유라가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체구가 작고 짝눈이라고?”

“응.”

필웅은 갑작스러운 그녀의 변화에 당황했다. 강유라는 눈에 띄게 놀라고 있었다.

“아는 사람이야?”

“글쎄… 음. 설마? 아냐, 아닐거야… 그치만….”

강유라는 초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필웅은 그녀에게 좀더 상체를 기울이며 대답을 독촉했다.

“아는 사람이냐고?”

강유라가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 있다가 비로소 필웅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응?”

“아는 사람이냐고 물었잖아.”

“그게….”

강유라는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 사람, 나도 본 적 있는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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