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강무완의 선고기일
시연은 초조하게 필웅의 사무실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얘는 왜 가서는 올 생각을 안 해?’
필웅의 마음이 급해 보이고, 사태가 심상치 않아 보이기에 일단 자기가 어떻게든 해보겠다고 나선 시연이었다.
원칙적으로 선고기일에는 공판을 맡은 검사만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간혹 수사 검사가 직접 공판에 관여하는 경우도 있었고, 이에 따라 공판 검사가 둘 이상이 되는 경우도 존재는 했다.
시연은 삼영백화점 사건에 공판 검사로 이름을 올려 두긴 했지만 다른 사건이 워낙 많아서 직접 공판에 참석하지는 못했었다.
‘한 번도 얼굴도 안 비추다가 나가도 되나…?’
물론 선고기일에 검사가 출석하지 않는다고 재판의 효력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피고인만 출석하기만 하면, 선고기일에 검사가 출석하지 않는다고 해도 문제 될 것은 없었다.
하지만 법원에 나쁜 인상을 심어줄 수 있기 때문에 아주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검사들은 선고기일에 출석하는 것이 관례였다.
이제 곧 선고기일이 열릴 텐데, 필웅으로부터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알 도리가 없는 시연으로서는 애만 탈 뿐이었다.
‘안 되겠어, 일단 나라도 들어가야지.’
시연은 서둘러 서류를 챙겨 일어섰다.
* * *
같은 시각, 필웅과 장경은 윤진의 시체가 발견된 건물 입구에 서 있었다.
이미 기자들은 전부 흩어지고 없었다.
“오늘 모인 기자들 중에서도 있었단 말이죠?”
장경이 아깝다는 듯 발을 구르며 대답했다.
“예. 한 놈 있었슴다. 묘하게 눈에 밟히던 놈이 있었어요. 항상 모자를 푹 눌러 쓴 체구가 작은 남자 기자였슴다. 진우현 사건 때도 봤고, 강릉 페리 호텔 때도 봤고, 오늘도 아침에 봤단 말입니다.”
장경이 설명하자 필웅도 비슷한 인상의 남자를 몇 번 봤던 것을 떠올렸다. 항상 모자를 푹 눌러쓴, 체구가 왜소한 남자.
‘맞아! 왜 눈치채지 못했지? 하긴, 매일 모자를 눌러 쓰고 있고 눈에 띄는 인상도 아니니 기억에 남지 않았던 건가. 박 형사님 관찰력이 대단하군.’
“아! 말을 듣고 보니 저도 기억이 나는 것 같네요. 페리 호텔이랑 오늘 사건이야 어떻게 연관이 될 수도 있으니까 비슷한 기자가 올 수는 있다고 쳐도 진우현 사건 때도 있었다면 확실히 이상하긴 하군요.”
“그러니까 말임다. 이 사건들이 연결되어 있다는 건 저희만 아는 사실 아닙니까?”
필웅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일단은 그렇죠.”
“아, 그리고.”
“?”
“그 왜 김진범 잡으러 갔을 때 봤던 놈 기억나십니까?”
필웅은 기억이 잘 나지 않는지 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허공을 응시하다가 손을 딱 튕기며 외쳤다.
“아, 그 변태 팬티 도둑놈!”
장경이 피식 웃고는 대답했다.
“예. 그놈이 알고 보니까 이주남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요?”
필웅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잠시 후 필웅이 더 혼란스러워진 표정으로 장경에게 물었다.
“그런데 그게 이 사건이랑 무슨 상관입니까?”
“지금 생각해보니까, 제가 방금 말한 기자가 그때 인천에서 만났던 그놈이랑 인상착의가 비슷한 것 같더라는 말입니다.”
필웅이 아 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아하, 만약 이놈이 누군가의 사주를 받아 삼영그룹과 관계된 증인이나 피고인들을 입막음하고 다니는 거라면 김진범도 죽이려고 쫓아갔을 수도 있겠군요!”
“그렇죠. 그렇게 김진범을 쫓아서 같은 여인숙에까지 숨어들어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데 저희를 마주친 겁니다.”
필웅은 어느 정도 아귀가 맞아떨어진다고 느꼈다. 하지만 한 가지 설명이 안 되는 점이 있었다.
“그럼 그 속옷들은…?”
장경이 턱을 긁적이며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뭐, 그거야 알 수 없죠. 잡아서 물어보면 되지 않을까요? 사실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긴 합니다만”
“그…렇긴 하죠. 그러고 보니 그때 그놈도 좀 당황하지 않았었나요?”
장경이 잠시 그때를 떠올리기 위해 생각에 잠겼다가, 잘 기억이 나지 않는지 고개를 내저었다.
“그랬던 것 같기도 하네요.”
“그런데 그놈을 잡을 방법이 있을까요? 진짜 기자도 아닐 것 같은데”
장경이 인상을 찌푸렸다. 사실 생각해보면 그가 진짜 기자일 가능성은 크지 않았다.
“그러게요. 제가 서 기자님 통해서 혹시 그런 기자가 진짜로 있는지 한 번 물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단서가 좀 부족한 것 같긴 합니다만, 늘 그렇듯이 뭐 어떻게든 되겠죠!”
“예, 알겠습니다.”
장경이 떠나고 홀로 남겨지자, 필웅은 다시금 비로소 윤진이 죽었다는 현실을 절절히 느꼈다.
너무 비현실적인 상황이라 그의 뇌도 현실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엄연한 현실이었다.
‘선배가 죽었다.’
인권 변호사가 되고 싶다던 윤진.
현실에 끝없이 고뇌하면서도 자신만의 신념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던 윤진.
그리고 마침내 현실에서 벗어나오려 몸부림쳤던 윤진.
그런 윤진이 싸늘한 시신이 되어 건물에서 실려 나오고 있었다.
필웅은 문득 어마어마한 피로감을 느꼈다.
그가 필웅으로서 이 시대에 깨어난 이후 너무나 많은 사건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주변 사람의 죽음까지.
오늘 실려 나오는 시체는 그나, 시연이나, 장경이나, 다혜가 될 수도 있었다.
‘아차, 선고기일!’
필웅은 문득 오늘이 강무완의 선고기일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필웅은 재빨리 손목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이미 시간이 한참 흘러 있었다.
‘이런 망할, 이미 시간이 늦어버렸네.’
필웅은 혀를 찼다.
‘뭐. 시연이가 알아서 했겠지.’
이내 필웅은 스스로를 진정시키며 속으로 생각했다. 오늘 어차피 뭘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강무완에 대한 선고만 들으면 될 뿐이었다.
그리고 필웅은 너무 지쳐 있었다.
물론 육체적으로가 아니라 심적으로였다. 그만큼 윤진의 갑작스런 죽음이 그에게 미친 영향은 컸다.
‘나 때문이야….’
필웅은 터덜터덜 검찰청으로 돌아가며 윤진과 재판정에서 나눈 대화들을 떠올렸다.
강무완을 믿느냐는 질문.
자신도 모르게 새어 나왔던 원망의 눈빛.
‘내가 뭐라고 선배한테 그런 말을 했을까….’
티는 내지 않았지만, 윤진은 필웅의 태도가 마음에 걸린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마지막 기일에 굳이 자기가 강무완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강무완이 수상하다든지 하는 얘기를 할 필요가 없었겠지.’
어쩌면 그의 질문으로 인해 윤진도 강무완을 의심하게 되었고, 그 결과 오늘과 같은 사건이 벌어졌다고 생각하니 필웅은 도저히 자신을 용서하기 힘들었다.
‘더 이상, 더 이상 주위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히면 안 돼. 그냥 무작정 부딪히는 것만으로는 사태를 해결할 수 없어.’
필웅은 굳게 결심하며 근처에 있는 공중전화를 찾았다.
그리고 어떤 번호를 천천히, 그러나 힘 있게 누르기 시작했다.
* * *
“1998고합1067 사건 선고기일 시작합니다.”
시연은 떨리는 마음으로 재판정에 들어와 있었다.
삼영그룹의 실질적인 수장인 강무완이 유죄 판결을 받을지가 결정되는 날이었다.
그 때문인지 삼영과 직접적으로 상관이 없는 방청객들까지도 많이 몰려 재판정에는 남는 자리가 없었다.
강무완은 여유 있게 들어와 착석했다. 그의 곁에 윤진은 보이지 않았다.
윤진에게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알 턱이 없는 시연은 고개를 갸웃했다.
‘뭐지? 선고기일에야 변호인이 출석하지 않을 수도 있기는 하지만 법무법인 쪽에서 당연히 출석하라고 했을 텐데?’
선고기일에는 피고인과 검사만 출석하면 되고, 변론이 필요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변호인이 반드시 출석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강무완 같이 중요한 고객에 대한 중요한 재판의 선고가 있는 날에, 법무법인이 소속변호사를 보내지 않은 것은 여러모로 이례적인 일이었다.
“판결을 선고한다.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한다.”
시연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시연이 벌떡 일어서며 외쳤다.
“재판장님, 무죄라뇨? 재판장님도 그 증인들과 증거들을 다 보셨잖아요?”
재판장이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판결은 판사의 재량입니다. 불만이 있으면 항소하세요.”
그 말을 끝으로 재판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버렸다.
시연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시연이 휙 돌아보니 강무완은 관심도 없다는 듯 이미 수행원들과 함께 재판정을 나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말도 안 돼! 무죄라니? 뭘 더 어떻게 해야 유죄라는 거야?’
그때 강무완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자네가 정시연 검사로군.”
정시연은 대답 없이 강무완을 노려보았다.
“얘기는 많이 들었소만.”
“뭘 원하십니까?”
시연이 쏘아붙였다.
강무완이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별 것 아니네. 잘 싸워줬지만, 진실은 언제나 승리한다는 걸 말하고 싶었을 뿐.”
시연은 가증스럽다는 듯 그와 그가 내민 손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별로 악수할 기분은 아니군요.”
시연은 말하며 돌아섰다. 그렇게 법정을 나가려던 순간, 그녀는 뭔가 이상한 점을 깨닫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가 발견한 것은….
* * *
강무완 사건의 재판장이 복도를 나와 자신의 방으로 향해 걷고 있었다.
누군가가 그의 뒤에서 그를 불렀다.
“헛! 안녕하십니까!”
판사가 공손하게 그에게 인사했다.
“음, 그래. 재판은 어떻게 했나?”
“말씀하신 대로 무죄를 선고했습니다만….”
재판장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영 개운치 않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문제가 없을까요? 검사가 항소하려고 벼르는 것 같던데….”
“조필웅이 말인가?”
“아뇨, 선고기일에는 정시연 검사만 들어왔습니다.”
“정시연은 공판에는 참여 안 하지 않았나?”
“그랬습니다.”
“뭐 아무튼. 항소한다고 해도 결과는 똑같을 거야. 수고 많았네.”
“예….”
재판장인 판사는 공손하게 인사하며 누가 볼까 무섭기라도 한 듯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 * *
필웅은 한 커피숍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누군가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커피숍에 나타났다.
강유라였다.
강유라는 필웅을 찾지 못했는지 한참을 인상을 쓰고 주위를 살폈다. 필웅이 헛기침 소리를 내자, 그제서야 그를 발견한 듯 강유라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강유라가 얼굴을 가린 머플러를 내리며 물었다.
“뭐야? 다시는 나타나지 말라고 할 때는 언제고 먼저 전화질이야?”
뭔가 더 쏘아댈 듯한 기세였던 강유라는 필웅의 침울한 표정을 보고 미심쩍다는 표정을 지었다.
“표정은 왜 그래?”
필웅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강유라는 입을 비죽 내밀고는 점원을 불러 커피를 주문했다.
“넌 뭐 마실거야?”
여전히 필웅은 묵묵부답이었다. 강유라는 슬슬 그런 필웅에게 짜증을 느끼고 있었다.
“야, 바쁜 사람 불러 놓고는 뭐 하자는 거야?”
필웅이 마침내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손 좀 줘봐.”
“손?”
강유라가 되물었다. 필웅은 테이블 너머의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
“무슨 짓이야?”
강유라는 화들짝 놀라 손을 빼려고 했지만, 필웅에게 단단히 잡힌 손을 빼내기는 무리였다.
강유라의 얼굴이 분노로 부들부들 떨렸다.
“조필웅, 너 당장 이거 안 놓으면….”
“조용히 해 봐.”
필웅은 차갑게 그녀의 말을 끊으며 그녀의 손을 잡아 손등 쪽으로 돌렸다.
그렇게 잡힌 그녀의 손등에는, 하얗게 빛나는 점이 은은하게 박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