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한 놈이 있어요
“에취!”
시연이 딱하다는 듯 따뜻한 찻잔을 건넸다.
“요새 날씨 추우니까 따뜻하게 입고 다니라니깐.”
“이렇게 추울 줄은 몰랐지….”
필웅이 궁시렁대며 찻잔을 받아들었다.
필웅이 윤진은 만나기로 한 다음 날 오전, 필웅의 사무실이었다. 그날의 선고기일에 대비하기 위해 필웅과 시연은 평소보다 일찍 사무실에 나온 참이었다.
결국 필웅은 윤진을 만나지 못했다.
윤진은 그날 약속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필웅은 윤진의 집에 전화도 해보고 법무법인 진화에도 전화해 보았지만, 어디에서도 그녀를 찾을 수 없었다.
필웅은 불안한 마음에 장경에게 윤진이 사라진 것 같으니 찾아봐 달라고 부탁하고는 집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미 오랫동안 밖에서 윤진을 기다리느라 아무래도 감기가 든 모양이었다.
“그래서, 어젠 그 윤진이란 선배를 만났다고?”
시연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 만나려고 했는데 못 만났어.”
“그게 무슨 소리야?”
“어제 만나기로 한 장소에 안 나왔다고.”
“뭐? 그 선배 안 되겠네!”
시연이 화를 냈다. 그러나 필웅은 화를 낼 기운도 없었다.
감기 기운 때문이기도 했지만, 윤진이 걱정돼서이기도 했다.
필웅은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좀 걱정되네. 사실 어제 선배가 뭔가 중요한 할 얘기가 있다고 했거든.”
“뭔데?”
“모르겠어. 만나서 해야 하는 이야기라고만….”
필웅의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끊고 사무실에 전화벨이 울렸다.
필웅이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검사님, 큰일났습니다! 윤진 변호사님이…!”
장경이었다.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필웅은 자기도 모르게 전화기를 꽉 쥐며 얼굴에 더 가까이 가져다 댔다.
“윤진 선배가 왜요?”
“윤진 변호사님이… 돌아가신 것 같습니다!”
필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가 일어서면서 자리에 놓은 찻잔이 바닥으로 밀쳐져 깨졌다.
시연은 깨진 찻잔을 불길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어제 가셨다던 술집이 있는 건물 3층 화장실에서 사체가 발견됐다고 합니다. 저도 지금 막 출발하려는 길임다!”
“알겠어요. 저도 가겠습니다!”
필웅이 말하며 코트를 집어 들었다. 시연이 물었다.
“무슨 일이야?”
“윤진 선배가….”
필웅은 차마 말을 마치지 못했다. 그 말을 입 밖에 내는 순간 그게 바꿀 수 없는 현실이 되어버릴 것 같아서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시연은 잠시 눈치를 보다가 필웅을 떠밀며 말했다.
“일단 뭔지 모르겠지만 가봐. 혹시 늦을 것 같으면 말해줘.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
“부탁할게.”
필웅은 결국 말을 잇지 못하고 어설프게 시연에게 인사하며 사무실을 박차고 나갔다.
그의 심장이 점점 빨리 뛰고 있었다. 필웅을 심장이 목구멍까지 넘어올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청사에서 나가 바로 택시를 잡았다.
* * *
어느새 기자들이 몰려들어 있었다.
일전에 페리 호텔에서도 봤던 기자들도 몇몇 보였다. 아무래도 이 사건만 전문적으로 쫓아다니는 기자들인 듯했다.
최근 삼영백화점 사건을 맡았던 변호사의 사망 사건이어서 더욱 언론의 관심이 집중된 듯했다.
필웅이 도착하자 뚱뚱하고 머리가 뻗친 기자 하나가 쓱, 그를 돌아보았지만 별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가 삼영백화점 사건의 담당 검사였다는 사실을 잘 모르는 듯했다.
필웅은 잔뜩 긴장한 채로 건물 3층으로 올라갔다. 장경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검사님.”
장경이 침울한 표정으로 그에게 인사했다. 필웅은 인사도 받는 둥 마는 둥 하고 사건 현장으로 들어갔다.
여자 화장실에 들어가자, 이미 도착한 감식반들이 바쁘게 이리저리 오가며 채증을 하고 있었다.
필웅은 떨리는 발걸음으로 3번째 칸으로 서서히 걸음을 옮겼다.
감식반이 그를 제지하려고 했지만, 장경이 다시 그를 제지하며 고개를 저었다.
“검사님이심다.”
필웅은 아랑곳하지 않고 힘겹게 손을 들어 화장실 문을 열었다.
윤진이 환기구 쪽에 달린 빨랫줄에 목을 걸고 매달려 있었다.
필웅은 잠시 비틀거렸다. 장경이 재빨리 다가와 그를 부축했다.
필웅은 간신히 괜찮다며 부드럽게 그의 손길을 뿌리치고는 비척비척 그녀의 차갑게 식은 주검에 다가갔다.
아무런 표정도 없는 사체.
필웅은 그녀가 죽는 순간 무슨 생각을 했을지 사뭇 궁금해졌다.
‘두려웠을까? 슬펐을까?’
필웅은 몇 번이나 윤진의 얼굴을 쓰다듬기라도 할 듯 팔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차마 이미 창백하게 질린 윤진을 건드리지 못하고 팔을 거두었다. 필웅은 질끈 눈을 감고 물러섰다가, 다시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으로 윤진의 싸늘하게 식은 시체를 쳐다보았다.
필웅은 그렇게 아무 말도 없이 한참이나 윤진과 대화라도 나누는 것처럼 윤진의 시체를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자살… 입니까?”
필웅이 잘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어 물었다.
“아직 좀 지켜봐야 할 것 같지만, 모양새만 봐서는 자살일 것 같다고….”
“아니, 그럴 리가 없습니다.”
필웅은 고개를 세차게 좌우로 가로저으며 말했다.
“어제… 어제 제게 중요한 할 말이 있다고 했습니다. 설령 정말 자살할 생각이었다고 해도, 저를 만나기도 전에 이렇게 목을 매는 건 앞뒤가 맞지 않아요.”
“그사이에 생각이 바뀌었을 수도 있고….”
“저와 만나기로 약속하고 2시간도 안 돼서 말입니까?”
장경은 할 말을 잃었다. 그 역시 듣고 보니 뭔가 자연스럽지 않은 구석이 있었다.
“일리가 있군요. 그럼 대체….”
필웅은 잠시 문에 기대어 괴로워하며 얼굴을 감싸 쥐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대체… 이게 왜… 무슨….”
장경도 그를 안쓰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장경은 그런 필웅을 바라보며 곰곰이 생각에 빠져 있다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검사님.”
“….”
“이 장면… 요새 너무 많이 보게 되는 것 같지 않슴까?”
머릿속이 하얘져 있던 필웅은 처음에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힘없이 고개를 들어 장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예?”
장경이 여전히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말했다.
“이상하다는 말입니다.
물론 자살 사건이야 하루에 수십 건도 일어나지만, 진우현 사건 이후로 이상하게 우리 주위에 이렇게 목을 매서 죽은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지 않슴까. 심지어 전부 다 사건 관계인이에요.”
필웅은 구부정하게 서 있던 자세를 바로 했다.
“그래서요?”
장경은 뭔가 이야기하려고 하다가 말문이 막힌 듯 머리를 벅벅 긁고는 인상을 쓰며 대답했다.
“그게 제 생각엔… 어휴, 잘 모르겠습니다. 뭔가 그것들이 다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는 느낌? 그런 게 든단 말임다.”
필웅도 비로소 조금 정신을 차리고 장경이 지적한 사실을 따져보았다.
‘처음엔 진우현, 그다음엔 강석훈, 그다음엔 윤진 선배까지. 사망한 정황도 모두 비슷하고, 모두 삼영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이건 혹시…?’
“누군가… 삼영과 관계된 인물들을 죽이고 다니고 있다?”
필웅은 자신의 생각을 말로 끄집어냈다.
장경이 놀란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 있겠군요. 전부 다 삼영의 비밀과 관계되어 있거나, 삼영의 치부를 드러낼 수 있는 사람들이었어요! 가만, 그런데 윤진 변호사님은 왜…?”
필웅은 다른 사람이 듣지 못하게 화장실의 구석으로 장경을 잡아끌었다.
“왜 이러심까?”
장경이 어리둥절해 하며 필웅에게 물었다.
필웅이 집게손가락을 입 앞으로 가져대 목소리를 낮추라는 제스처를 했고, 장경은 영문을 알지 못했지만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필웅이 소리를 한껏 낮춰 말했다.
“윤진 선배도 얼마 전에 강무완과 관련된 비밀을 알게 됐다고 했어요.
강무완이 누군가를 처리하라고 지시하는 걸 들었다고 했거든요. 만약 강무완이 삼영의 비밀을 쥐고 있는 사람들을 하나씩 처리해 온 게 사실이라면, 그 사실을 알게 된 윤진 선배도 ‘처리’하려고 시도했을지 모릅니다.”
장경은 크게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윤진 변호사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단 말임까!? 이거 그렇다면 정말 그럴 수도 있겠는데요.”
“그래서 말인데 혹시 사건 현장 주위에서 공통적으로 목격된 인물은 없습니까?”
“공통적으로 목격된 인물이요?”
필웅이 심각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물론 정상적인 범죄자라면 사람을 죽여 놓고 그 근처에서 얼쩡거리지는 않겠죠.
하지만 만약 진우현, 강석훈 그리고 윤진 선배를 습격한 게 동일인물이라면, 그 인물은 매번 같은 방식으로 자살을 위장해서 사람을 죽이는 싸이코입니다.
그런 싸이코들은 자기의 독특한 스타일을 남들이 알아주길 바라서 그러는 걸로 알고 있어요. 자의식 과잉이죠. 그런 인간이라면 살인을 저지른 후에도 그 주위를 맴돌면서 주위 사람들의 반응을 관찰하는 걸 즐길지도 몰라요.”
아직 프로파일링 기법이나 연쇄살인에 대한 수사법이 정착되지는 않은 시기였다.
필웅은 내심 2020년에 수사물이나 미스터리 추적 프로그램들을 열심히 봐두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방금의 말도 어떤 미스터리 추적 다큐멘터리에서 한 프로파일러가 해준 얘기를 그대로 읊은 것이었다.
“오? 그럴싸한데요?”
“그러니까, 만약 그동안의 사망자들이 단순히 자살한 게 아니라 자살로 위장한 살해를 당한 거고, 그 범인이 동일인이라면 분명 어디선가 사건 현장 근처를 맴돌며 사건 이후의 반응을 관찰했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그놈이 범인일 가능성이 높겠군요! 그런데 공통적으로 목격된 사람이라면 저나 검사님밖에 없을 것 같은데요.”
“우리가 범인일 리는 없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은요? 구경꾼들 중에 혹시 비슷한 사람들이 있었다거나?”
“사건 현장이 다 동떨어져 있었고 워낙 사람들이 우글우글대서 똑같은 사람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겄는디요.”
장경이 아쉽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필웅은 관자놀이를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기자들은요?”
장경이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기자들이요?”
“예, 기자들. 생각해보면 모든 사건 현장에서는 사건 직후에 기자들이 나타났었죠. 그 기자들 중에 똑같은 인물이 있었습니까?”
장경은 생각에 빠졌다.
기자들. 진우현, 강석훈, 그리고 오늘 윤진의 사건 취재를 위해 몰려든 기자들.
기자들의 수도 물론 많았지만, 구경꾼들처럼 많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명확하게 기자임을 알 수 있도록 카메라나 마이크를 들고 있었다.
‘아예 생판 구경꾼이 아니고 기자들만 추려내면 비슷한 사람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몇 번 대화를 나눈 사람들도 있고.’
장경은 스치듯이 본 그들의 인상을 되살려 보려고 노력했다.
진우현 사건 때 본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기자.
강릉 페리 호텔에서 본 깐깐한 인상의 여기자.
오늘 아침 건물 입구에서 서성이던 뚱뚱한 기자.
그리고….
장경은 자신도 모르게 스읍, 하고 숨을 삼키며 눈을 크게 떴다.
필웅은 그의 반응을 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형사님?”
장경은 자신이 기억해 낸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술을 꽉 깨물고 눈을 질끈 감았다.
“검사님.”
“예?”
“있습니다. 한 놈이 있어요.”
“정말입니까?”
“게다가….”
장경이 고개를 들며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놈은, 김진범을 잡으러 갔을 때도 근처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