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뭐가 더 부족해?
장경은 그렇게 하면 뭔가가 더 보이기라도 한다는 듯 인상을 쓰고 한참이나 남자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이리저리 남자를 살펴보던 장경이 마침내 말했다.
“아닌디….”
후배 형사가 얼굴에 물음표를 띄우며 물었다.
“뭐가 아니에요?”
“이놈, 이주남 아닌데.”
“예? 그럴 리가요.”
“아녀. 내가 전에 이주남을 본 적이 있는데, 이놈은 아니야.”
장경은 예전 김진범을 좇아 필웅과 함께 인천항에 갔던 날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날, 그는 김진범이 묵고 있는 여인숙을 찾아가 그를 덮치기 위해 여관방을 돌아보고 있었다.
그가 처음 문을 두드린 방에 묵고 있던 것이 이주남이었다.
당시 그와 필웅이 가방 속에 가득 담긴 속옷을 보고 얼이 빠져 있을 때, 정작 김진범은 다른 방에서 나와 그대로 도주했었다.
그렇게 인상 깊었던 날 마주친 게 이주남이었으니 그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게다가 그날 만난 이주남은 체격이 왜소한 편이었는데, 지금의 남자는 장경보다도 키가 컸다.
“아니, 그럴 리가 없다니까요. 인천 경찰에서 수배 중인 애라서 사진이랑 신상정보까지 다 있어요. 이거 보세요.”
후배 형사가 혼란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하며 주머니 속에 접혀진 수배지를 꺼내 장경에게 보여주었다.
“너는 새꺄, 안면인식장애 있는 거 맞다니까. 전에도 남자 수배지 보고 웬 아줌마 체포해 갖고 와서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냐?”
“아, 진짜 그 아줌마, 남자 같았다니까요!”
장경은 킬킬대며 모자란 후배 형사를 갈굴 준비를 하고는 수배지를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눈을 크게 떴다.
장경은 입을 약간 벌린 채 수배지와 체포된 남자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수배지의 얼굴은 남자의 얼굴과 정확히 일치했다. 도저히 다른 사람으로 착각할 수가 없는 수준이었다.
“뭐야?”
“봐요, 얘 맞죠?”
후배 형사가 그것 보라는 듯 남자를 끌고 자기 자리로 가서 앉았다.
장경은 우두커니 자리에 서서 혼란스럽게 체포된 남자, 이주남의 뒤통수를 내려다보았다.
‘그럼 그날, 김진범을 체포하러 간 날에 만난 놈은 대체 누구여…? 이딴 놈들도 사칭범이 있나?’
* * *
강무완의 선고기일 바로 전날.
필웅은 윤진의 전화를 받았다.
“선배, 웬일이에요?”
“필웅아. 나… 강무완 사장에 대해서 뭔가를 알게 됐어.”
“그게 무슨 소리예요?”
“전에 내가 얘기했던 거 기억나? 누군가를 처리한다고 했다던….”
필웅은 긴장하며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를 낮췄다.
“예, 기억해요. 그게 왜요?”
“그게… 아니다. 전화로 이야기하기엔 좀 그래. 이따 밤에 잠깐 볼 수 있어?”
“무슨 일인데요?”
“만나서 이야기하자. 저번에 진우현 씨 사망하고 같이 갔던 술집 기억나지? 거기로 갈게.”
“알겠어요.”
필웅은 윤진과 시간 약속을 잡고는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윤진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이지? 선배가 위험한 일에 휘말린 게 아니어야 할 텐데.’
필웅은 시계를 보았다. 이제 6시였다. 윤진과의 약속 시간까지는 아직 시간이 조금 있었다.
‘이번 선고기일에는 반드시 강무완의 손등을 살펴봐야지.’
그때 시연이 헐레벌떡 사무실로 들어왔다.
“이제는 아예 노크할 생각도 안 하는구나.”
“크흠, 아, 아니. 지금 그런 게 문제가 아니야!”
시연이 다급하게 말하며 갖고 온 신문 조각을 내밀었다.
강유라의 삼영패션에 관한 인터뷰 기사였다. 필웅이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이런 걸 뭐하러 보고 있어?”
“손, 손! 손을 보라고!”
시연이 말하며 인터뷰 기사에 실린 강유라의 사진 부분을 탁탁 두드렸다. 필웅도 비로소 유심히 사진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강유라의 손등에 누가 봐도 확연한 흰색 점이 찍혀 있었다.
“이건!?”
필웅이 펄쩍 뛸 듯이 놀라 소리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분명히 흰색 점이었다. 필웅은 처음 커피숍의 주인으로부터 목격담을 들었을 때만 해도 흰색 점이라는 게 있나 싶었다. 최근에는 뭔가를 잘못 본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이렇게 사진을 보니 명백한 흰색 점이었다. 필웅은 이런 점을 잘못 볼 리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그러니까….”
“강유라가 K라는 거지! 앞뒤가 딱 맞잖아!”
필웅은 재빨리 머리를 굴려 보았다.
K와 연관된 단서들이 그의 머리에 차례로 떠올랐다.
K.
진우현과 김진범. 진우현의 사기 행각의 배후. 커피숍 사장의 목격담. 진우현을 쥐락펴락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존재. AG케미컬의 차명 주주인 K. 삼영이 진우현의 회사에 투자한 사실.
그리고….
만약 K라는 것이 이니셜이라면, 강씨는 K로 시작한다는 사실.
필웅은 맥이 풀려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뭐지…? 이렇게 갑자기 K의 정체를 알게 된다고?’
필웅은 이렇게 갑자기 K의 정체를 알게 되자 개운한 느낌보다는 오히려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쉬울 리가 없다. 아니, 이렇게 쉬워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그가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이 화살을 강유라에게로 돌리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강유라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했다.
“이 정도면 강유라를 잡아넣어 볼 만하지 않을까?”
시연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필웅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아직 아니야.”
“왜? 뭐가 더 부족해?”
“부족한 건 아니야. 부족하다고 하더라도, 만일 강유라를 기소한다면 그 과정에서 추가로 증거를 모을 수도 있겠지.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그럼 뭐야?”
시연이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우리가 아니, 내가 강유라와 거래를 했다는 사실.”
“그게 왜?”
“아직 강무완이 처벌받지 않았어. 여전히 강무완의 영향력은 건재하다는 말이야. 내일 선고를 받는다고 해도 만약 강무완이 항소를 한다면 재판은 더 길어질 거야.
물론, 그렇다고 대법원 판결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겠지. 내일 실형이 선고되고, 강무완이 구속되기만 하면 돼. 그러면 좀더 움직여 볼 여지가 있겠지. 지금 섣불리 강유라를 건드리면 우리도 어떻게 될지 몰라.”
“조필웅. 갑자기 왜 이래? 겁먹은 거야?”
필웅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겁먹은 게 아니라, 현실적으로 생각하자는 말이야. 오늘 조사를 시작하나 내일 조사를 시작하나 다를 것도 없고.”
시연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필웅은 그런 그녀를 불안하게 지켜보다가 말했다.
“뭐라도 말 좀 해.”
“알았어. 그게 네 생각이란 말이지.”
“그래.”
“아프다가 복귀해서 이상하게 재고 따지는 버릇이 생겼다가 요새 좀 나아졌다 했더니, 아니었구나.”
“재고 따지는 게 아니라!”
“그럼 뭐야!”
시연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오늘 조사하나, 내일 조사하나, 똑같다는 말. 그 범죄의 피해자들한테도 똑같이 말할 수 있어? 진우현 일당에게 사기당해서 길거리에 나앉은 사람들, AG케미컬의 신약으로 죽거나 다친 사람들한테?
그게 잡범은 적당히 봐줘도 된다는 말이랑 뭐가 달라?”
필웅은 반박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가, 금세 입을 닫았다.
반박할 말이 딱히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시연은 씩씩거리며 필웅을 노려보다가 이내 휙 몸을 돌려 사무실 문으로 향했다.
“어디가?”
“내가 기소할 거야.”
“정시연!”
필웅이 성큼성큼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코앞까지 다가온 필웅의 얼굴에 시연은 갑자기 얼굴을 확 붉혔다.
“왜왜왜… 왜 이래!”
필웅은 이글이글 불타는 눈으로 그녀를 내려보다가, 심호흡을 하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하는 말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래도…
그래도 하루만 더 기다려주면 안 될까? 오늘 당장 움직이기 시작했다가 내일 또 정직이라도 당해 버리면?
그럼 강유라고 강무완이고 다 끝이야. 이규필 차장이 다른 누군가에게 사건을 재배당해서 전부다 흐지부지시켜버릴 거라고.”
시연이 초조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입술도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한참 동안을 그렇게 서 있던 둘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잠시 떨어졌다.
시연이 앓는 소리를 내며 말했다.
“하아, 알겠어. 대신 내일 선고 내려지면, 바로 행동에 옮기는 거야.”
“좋아.”
“가 볼게.”
시연은 화를 낸 게 뻘쭘했는지 작은 목소리로 웅얼대며 조용히 필웅의 사무실에서 나갔다.
필웅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쳤다.
‘후우, 일단은 설득한 모양이군.’
필웅 또한, 당장 강유라를 잡아넣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일단 지금 상황에서 강유라는 그들의 지위를 보장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방패였다.
만일 물밑에서 알게 모르게 손을 쓰고 있는 강유라가 사라지면, 그 자리는 강무완의 손길이 대신하게 될 터였다.
그리고 필웅은 강무완을 핀치까지 몰아넣은 마당에 한 치라도 오차가 발생하길 원하지 않았다.
‘그래. 이건 타협이 아니라, 전략적 행동인 거야.’
필웅은 속으로 되뇌이며 자신을 다잡았다. 하지만 귓가에는 마치 시연이 옆에 서 있는 것처럼 계속해서 시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조사하나 내일 조사하나 똑같다는 말, 그 범죄의 피해자들한테도 똑같이 말할 수 있어? 진우현 일당에게 사기당해서 길거리에 나앉은 사람들, AG케미컬의 신약으로 죽거나 다친 사람들한테?’
필웅은 그렇게 한참을 천장만 바라보며 시연과의 대화를 곱씹다가, 문득 시계를 보고는 윤진과 만나기 위해 얼른 사무실을 나섰다.
* * *
필웅은 윤진과 만나기로 한 술집에 들어와 있었다.
‘왜 안 오지….’
약속 시간이 이미 10분 정도 지난 시점이었다. 필웅이 기억하는 윤진은, 자기가 먼저 와서 기다릴지언정 약속 시간에 이유 없이 늦는 사람은 아니었다.
필웅은 아무 생각 없이 전화를 해 볼까 하다가, 지금은 1998년이고 자신은 핸드폰이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벌써 여기에 온 지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났군.’
영전은 처음 필웅으로서 깨어난 날을 떠올렸다.
그때만 해도, 그는 빨리 여기에서의 유배(?) 생활을 마치고 2020년으로 돌아가고 싶은 심정뿐이었다.
그만큼 1998년의 모든 것들은 불편하고, 낯설었으며, 지루했다.
하루에도 수백 건씩 사건 사고가 터지고 그 사건 사고를 전부 손안의 핸드폰에서 찾아볼 수 있던 2020년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영전은 자신이 조금씩 여기에 적응해 가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아니, 적응해 가는 게 아니라 이미 적응한 건가.’
이미 대부분의 경우 스스로를 영전이라기보다는 필웅이라고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 이미 적응이 완료됐다는 점을 증명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필웅은 하나둘씩 1998년에도 정을 붙일 데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 갔다.
핸드폰도, 넷플릭스도, 빠른 컴퓨터도 없었지만, 여기에는 사람이 있었다.
그것은 2020년의 나영전은 분명히 갖지 못했던 그 무엇이었다.
필웅은 상념에서 빠져나와 시계를 보았다. 이미 약속 시간으로부터 30분이 지나 있었다. 필웅은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필웅은 자리에서 일어나 술집이 있는 건물의 입구 쪽으로 나가 윤진을 기다려 보기로 했다.
날씨가 상당히 쌀쌀해졌다.
필웅은 아무 말 없이 추운 거리에 서서 윤진을 기다리기 시작했다.